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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안식일 11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4. 4.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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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합당한 행위는 어떤 것인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은 주님의 날에 행여 잘못된 행위를 하게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가끔 목사나 상담자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대답을 원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요일에 자전거를 타되 됩니까? 주님의 날에 조깅을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가기에 걸린 자녀를 위하여 약을 사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것은 마치 그 신자가 많은 항목들을 모아 놓고 그 다음 칸에 ‘된다’‘ 혹은 ’안된다‘라고 써 넣는 것과도 같습니다.

상세한 대답을 요구하는 이러한 질문은 불행하게도 스스로를 윤리적인 스승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만심을 충족시키는 교회 지도자에 의해 부추김을 당합니다. 이상적인 장로나 양심적인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 이 ‘지도자’는 즉시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에 대한 특별한 지시를 내립니다. 삶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그의 스타일은 그의 교인들로 하여금 완전히 그의 충고에 의존하도록 만듭니다. 그의 교인들은 ‘지혜의 신탁’이 명확하게 허락하거나 금지하지 않으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값진 충고를 해 주는 상담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은 질문하는 사람들을 의존적인 어린아이들로 만들고 맙니다.

이 장의 서두에 기록된 것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는 주님께 그의 양떼들의 지식과 총명을 풍성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이러한 은사들을 구한 것은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게 되었을 때 무엇이 최선의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조목조목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모든 특별한 상황마다 상세한 충고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장로들에게 지도자의 직분을 맡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관한 커다란 원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우리의 이해를 돕도록 성령을 보내셔서 각 성도로 하여금 영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만 성도들은 영적인 싸움에서 성령을 힘입어 어떤 것이 최선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5:14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골치 아프게 여려 가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점검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편리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습관은 정신과 마음의 기능을 감퇴시킨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출된 일반적인 원리들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예측할 수 없는 사건에 대비할 수 있게 하는 안내자로서 적합합니다. 안식일은 마음속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는 기쁨으로 전념해야 합니다. 이날은 특별한 날이며, 또 이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을 제외하고 우리가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어수선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한 안내자입니다.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어떤 것이 최선의 것인지를 스스로 분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악을 분별하기 위하여 자신을 연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이 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의견을 두려워함으로써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 원리들을 적용하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아무에게서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과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인간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묻는 특별한 질문들 중에는 명확한 대답이 주어질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행하는 일은 외적인 행동보다 동기와 의도에 더욱 의존합니다. “일요일에 자전거를 타도됩니까?”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동기를 분별하거나 일반적인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들은 가정의 규칙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아마 한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일요일에 자전거를 타면 안돼”라고 말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주 중의 6일 동안에 열심히 자전거를 탈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날을 평소와는 다른 활동으로 채움으로써 그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한쪽 부모가 자녀에게 “우리는 일요일에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그날은 주님의 날이야”라고 막 얘기하자마자 이웃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왔습니다! 그의 동기는 어린 자녀들이 저녁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가족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가서 성경 말씀을 묵상할 조용한 장소를 찾을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조깅을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터무니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일 인내심을 가지고 맥박수를 재면서 7마일씩이나 조깅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정말 지치게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그 날을 주님께 바치고 그 거룩한 시간을 횡령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조깅은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업은 1주일 내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가 일요일 오후에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리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을 조금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더 갖기 위하여 핼액순환이 잘 되도록 반 마일쯤 조깅을 한 다음에 성경을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중요한 것은 ‘오 주여, 내가 당신의 얼굴을 바라나이다’라고 부르짖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과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하루에 젊은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의 힘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조깅을 하지 않고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했다면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만든 규칙이 생겨나고 압제적인 전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국 강압적인 율법주의는 안식일을 보존하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더 지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지키는 안식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사회에 관한 문제는 보다 복잡합니다. 우리 서구 사회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무시하는 풍조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어떻게 안식일 문제에 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의 법률체계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 모두에게 적합하지 않은 지금,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한 원리들이 이방 국가에서 어느 정도까지 적용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경제체제 속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까?

이러한 중요한 난제들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각자 그리스도인들이 더욱더 깊은 통찰로 풍부해지고 사회의 소금으로서 봉사할 때 우리의 의문들에 대한 해답들이 주어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매주일 제4계명과 관련해서 선악을 분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모든 형태의 공적 예배가 광범위하게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물질적인 것들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신령한 것을 생각하는 데 하루를 바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어깨는 축 쳐져 있고 그들의 눈은 땅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은 무시되고 간과됩니다. 인간 본성의 영적인 국면은 주의를 끌로 만족을 얻기 위하여 소리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금이나 은, 또는 옷이나 환락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의 목숨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의 풍족함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절박한 일입니다.

비록 회의론자들은 제4계명을 비웃지만,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안식일의 유익을 부르짖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매주일의 하루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에 관해 듣기 위해 진실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숙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모임에 참석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영적으로 굶주린 물질주의자들이 되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헛된 망상을 좇아 사이비 종교와 동방의 신비주의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나침반도 없이 물질주의라는 대양 한가운데 떠 있는 현대인들은 스스로 각자의 노력으로는 아무데도 도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매주일 영적인 모임, 영적인 예배, 영적인 친교와 영적인 섬김을 위한 거룩한 날에 모이는 회중들에 의해서만 육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즐거움을 알고 있을 때 그들의 증거가 커다란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보다 더 절박하게 안식일 지키는 것이 필요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을 조각조각 찢어 버리고 그것을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계획으로 대신하려는 시도들은 비참한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오직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이 모든 인간의 불행에 대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법은 다른 모든 법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다른 도덕법 조항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아주 작은 부분에서라도 기쁨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면, 그들은 엄청난 유익을 거둬들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쁨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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