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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사도행전강해> 사도행전 입문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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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사도행전강해> 사도행전 입문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1-4)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1. 개관

 

1) 본래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하나의 책이었으나 주후 2세기 이후 분리되었습니다.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신약성경 유일의 역사서입니다. 기록 시기는 바울의 로마체제 이후(61년), 바울의 재판과 1차 석방(63년), 로마의 기독교박해(64년) 등과, 예루살렘멸망(70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61~69년 사이로 봅니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에 1차 감금된 이후 누가가 약 3년간에 걸쳐 직접 발로 뛰어 다니며 취재를 한 것으로 보고 약 64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2) 행전이라 함은 ‘프락세이스’인데, 이는 탁월한 인물의 업적을 요약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 다른 성경과 달리 이름이나 지명이 아니라 내용을 기준으로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이란, 맛디아가 포함된 12사도와 바울, 바나바의 사역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고, 사도들 중 베드로와 요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만 소개하고 있으며, 16:4 이후에는 사도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 정확하게 사도행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전도보고서, 혹은 성령행전, 사도들의 사역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3)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이자 역사가로서 독특한 문체와 전문용어 등 수준 높은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어 어느 계층을 독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가를 엿보게 합니다. 특히 그는 역사가의 안목으로 사실적인 기록을 위해 직접 발로 뛰며 취재를 하는 등 헌신했습니다. 그는 누가복음을 통해 마태 마가가 놓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일들을 약 35가지나 새로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누가는 타 복음서에 비해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가진 고뇌와 아픔, 좌절과 분노, 희로애락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런 저술태도는 계속됩니다. 누가는 사도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철저히 카메라 밖에 서서 관찰하듯이 역사의 현장을 기술합니다. 이런 누가의 저술태도는 아마 로마사회의 지식층이자 고위층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대개 지식층들의 특징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의인화된 현상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그런 신화적이고 전설에 대한 인기는 주로 하층민들의 몫입니다. 반면에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싶은 대상에 대한 고상하고 수준 높은 지식의 접촉에 고무되는 부류입니다. 의사이자 역사가인 누가는 바로 이런 독자층의 입맛을 맞추는 데 손색이 없는 저자입니다. 결코 흥분하거나 과장됨 없이 차분한 어조와 매우 세련되고 수려한 수사기법으로 기술된 문장, 여기에 분명한 내용 구성과 사건의 전개 등은 당대 최고의 저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2. 사도행전의 내용구성

 

1) 지역적인 구분

- 예루살렘 사역(1-7장)

- 유대와 사마리아 사역(8-12장)

- 갈릴리 북부와 소아시아, 유럽, 그리고 로마 등(13-28장)

 

2) 인물로 본 구분

- 베드로행전(1-12장)

- 바울행전(13-28장)

 

3) 네러티브 구조

기) 서언: 부활하신 주님(1;1-11)

승) 오순절 성령강림(1;12-2:13)

전) 베드로행전(2:14-12:25), 바울행전(13:1-21:16)

결) 로마에 들려진 복음(21:17-28:31)

 

3. 데오빌로여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1:1)

 

1) 먼저 살펴볼 것은 데오빌로라는 수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복음에서는 ‘각하’라는 호칭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로마의 고위 관료이거나 귀족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거지고서 진리에 대해 상당히 목말라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당시 로마사회에 복음이 침투되면서 특별히 고급장교들이 많이 믿는 일이 일어났는데 누가는 이제 막 복음을 듣고 걸음마를 시작한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이라는 서신을 써 보내어 예수님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데오빌로를 각하라는 호칭을 생략한 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데오빌로가 신앙에 있어서 걸음마을 걸을 때엔 그가 사회에서 갖고 있어던 직함과 지위에 대해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를 입고 신앙에 있어서 성숙하면서 누가는 더 이상 그를 격식을 차리고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자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3) 시대와 환경과 관계없이 교회의 중심 가치는 신자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유교사회에선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존중하고 낮춤말을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선생이 제자에게 높임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이 점잖아 보이고 제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격식은 거리감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유교의 문화는 사람들의 사이에 예법이라는 격식과 절차를 둡니다. 남녀는 칠세부터 같은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남녀칠세부동석). 서로 볼을 비비고 껴안기라도 하면 큰일이 납니다. 부자지간도 구별되고 심지어 부부도 구별하여 남편은 사랑방에 거하고 부인은 안방에 거하도록 합니다.

 

4) 그러나 기독교의 문화는 친한 사이가 되면 격식을 없앱니다. 서로 호형호재하고 친밀감으로 하나가 되어 갑니다. 초대교인들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같이 식사를 했다는 것은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인들은 서로 가족구성원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이런 가족문화가 사라졌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하루아침에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대형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그저 예배를 구경하는 청중이 되어 버렸습니다. 옆 사람이 어떻든 나만 은혜 받으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만연합니다. 모두 사우나 한 번 가듯이 주일날이면 지친 영혼의 몸을 이끌고 교회에 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영혼의 몸에도 굳은 살이 배겨서 점점 신앙생활이 형식화 되고 예배도 무덤덤해 지고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를 ‘화석화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영적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마치 개구리를 물에 집어 넣고 물을 서서히 끓이면 개구리가 뜨거운 줄 모르고 어느새 익어가는 것처럼 영적 침체에 빠진 신자들이 그렇게 신앙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5) 교회가 부흥될수록 더욱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분이나 지위나 빈부의 차등이 없습니다. 지금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호칭을 생략한 것은 그만큼 관계가 친밀해 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4. 먼저 쓴 글

 

1) 다음으로 우리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누가가 뭐라고 하는 지 들어봅니다. 누가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이미 먼저 쓴 글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누가복음의 기록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것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기간적으로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한 이후부터 승천까지의 일대기를 기록했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 알다시피 각 복음서는 기록목적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대로 인간의 족보상에 왕으로 오셨는가를 다룹니다.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목숨을 많은 자들의 대속물로 주셨는가, 스스로 종이 되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사셨는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째서 사람이자 하나님인가 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조명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뇌, 즉 아픈 자와 힘없는 자, 외로운 자, 천대받고 소외받은 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어떻게 마음으로 아파하며 사람의 아들로서 살아갔는가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3) 사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징들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게는 한국교회는 이 시점에서 세상에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에서 시작하여 작게는 내가 다니는 교회는 과연 어떤 복음을 세상에 증거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세 가지의 메시지 밖에 전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하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고 셋째는 조금 고상한 신앙이라 할 수 있는 인격의 성숙, 치유 등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것들 중 불과 1~2%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진리의 체계는 신묘막측합니다. 공부를 하고 또 해도 미치지 못하는 경이로움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4) 이런 점에서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데오빌로는 그 다음의 일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죽고 승천하신 다음 그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고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하는 궁금증이 데오빌로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데오빌로에게 이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도행전에 담아 보냅니다.

 

5. 목적: 하나님 나라의 일(3절)

 

1) 이제 누가는 3절에서 자신이 데오빌로에게 말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필요한 일꾼이 누구인가?, 하나님과 함께 일할 동역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 줄 청지기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책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도행전을 읽고 그 내용을 숙지하고 배우기를 원하는 우리를 향해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의 증거자가 될 것인지 질문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과연 누가 나와 같이 복음을 전할 동역자가 될 것인가 하고 묻고 기다리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과연 누가 땀을 흘리며 헌신하는 일꾼이 되고 맡은 일에 청지기로서 충성할 것인가 하고 우리의 순종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2)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 과연 우리가 무엇을 듣고 보고 배워야 할 것이며 이 복음의 도를 연마한 뒤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이자 목적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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