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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사도행전강해>성령의 사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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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사도행전강해>성령의 사람

본문: 1:6~8

 

1. 본문 해설

 

1) 여쭈어 이르되(6절)

- ‘여쭈다(eroton)’는 단순히 한 번 물어보았다(ask)는 뜻이 아니라 긴박한 마음으로 비밀을 캐내기 위해 계속해서 물었다(pry into the secret)는 뜻입니다. 문장 자체가 진행형인데, 이는 모여 있는 제자들이 기다리면서 주님께 자꾸 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물론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어떤 학생이 질문을 잘한다는 것은 지식에 목말라 한다는 것이고 원래 질의응답 학습이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르쳐 주었는데도 믿지 못하고 자꾸 귀찮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3년 동안이나 직접 사사를 받은 제자들의 현재 모습을 지금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무엇을 물었습니까?

 

2)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6절)

-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회복’입니다. 이 단어는 영적인 차원, 즉 기독교의 본질인 영적인 소생과 새로움과 치유 등에 사용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땅을 돌려받을 때, 또는 빌려주거나 임대했던 것들을 돌려받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질문은 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육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궁금한 것을 물었다는 뜻입니다.

- 제자들이 귀찮을 정도로 궁금했던 대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수준을 가늠합니다. 수준이 낮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이고, 무지하다는 것은 진리의 일에 깨달음이 더디다는 것이고, 깨달음이 없으면 자기 고집과 자기 식으로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돈이라도 생기면 큰 일이 납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돈이 주는 여러 유익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누구도 이런 사람을 말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적으로 무지와 고집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 제자들의 수준이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카비 독립운동으로 탄생한 약 80년간의 하스몬 왕조 이외에는 거의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며 살지 못한 민족입니다. 늘 타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앗수르, 페르시아, 바벨로니아, 헬라,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끊임없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한 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비운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자 민족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 속에는 우리 민족처럼 ‘한’이 있습니다. 체증 같은 역사의 응어리가 있습니다. 언제나 한 번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워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 성경은 예수를 환호하고 따랐던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누가복음 19:11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차원은 제자들이 거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꾸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헛 다리를 짚는 것입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이 같은 오해가 오늘날에는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지금의 교회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기독교가 약속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본질, 즉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믿고 있느냐는 겁니다. 많은 교인들이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하나님께 나옵니다. 십자가를 목말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목마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십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보다는 삶의 어떤 절실함이나 필요성, 자기의 절박함, 안타까움, 세상적인 일의 성취 등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십자가가 약속한 것처럼 복음이 약속한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로 그리스도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세우시고자 한 나라를 오해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오늘의 이 시대에서 복음이 추구하는 그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기독교는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십자가는 편히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주의자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기복주의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이 세상이 오염되고 타락한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려 하지 않고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어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내가 죽어야 다른 이가 사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죽기는커녕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부들부들 떨며 겁을 먹고 있습니다. 모두 복음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3) 때와 기한은~ 알 바 아니요(7절)

- 그러자 주님은 7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와 ‘시기’입니다. 우리말로는 잘 구별되지 않지만 헬라어를 살펴보면 구분이 됩니다. ‘때’는 ‘크로노스’이고 ‘시기’는 ‘카이로스’라는 단어입니다. 몰론 이 둘 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성취하는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비슷한 것 같지만 의미상 매우 다릅니다. 지금 시간이 12시라면 이것은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나 어떤 시간에 의미가 더해지고 거기에 가치가 더해지면 그 시간은 이제 카이로스가 됩니다. 크로노스가 인간의 때를 가리킨다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카이로스가 누구에게 임합니까? 그것은 평소에 크로노스를 잘 관리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하나님이 설정하신 카이로스의 때가 당도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를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 다음으로 주님은 ‘너희가 알 바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책망에 가깝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많은 관심거리는 언제 마지막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복음서를 통해 누누이 그런 일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와 기한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그런 관심보다는 오늘을 충실히 살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 종말을 강조하는 사교집단이나 종교집단일수록 공통적인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젯밤에 어떤 계시를 받았는데 저한테만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겁니다. 주님 오신 날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그 날짜를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 오시느냐 하면 이번 설날 아침 6시 정각에 오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웃습니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정도의 사술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놀라운 사실은 신천지 이단에 넘어간 사람들 대부분 엊그제까지 우리 교회에서 멀쩡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던 집사님들, 권사님들, 장로님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한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입니까? 결국에는 속아 넘어가 집 팔고 자식들 공부하던 거 다 때려치우고 직장도 사표 쓰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날은 어느 농부가 밭을 매고 있는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쭉 한 줄로 서서 산으로 올라가더랍니다. 하도 신기해서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 마중 간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지금 밭이나 메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농부더러 함께 가자고 하더랍니다. 자기들은 지금 집도 팔고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는 것입니다. 참 별 일도 다 있다 싶어 무시하고 밭을 매고 있는데 한 나절 있다가 이번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다시 산에서 내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어찌 되었소?“하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연기되었다‘고 하더랍니다.”

- 우리 속담에 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만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심리학에선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열 번만 지껄이면 대중들이 믿기 시작하다고 합니다. 이걸 군중심리학이라 하는데 원래 히틀러 밑에 있던 괴펠스라는 선전부장관이 써먹던 수법입니다. 오늘날에는 북한을 비롯한 좌파들의 전용수법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쇠뇌교육입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잖아도 교리에 관심 없고 성경공부도 시원찮게 하면서 나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늘 근신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는 사자에게 먹잇감이 되지 않습니다.

 

4) 1장 8절의 의미

-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8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읽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Ekjd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먼저 세 가지 용어를 살펴야 합니다.

 

성령

-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입니다. 루아흐는 성경에서 세 가지 의미, 즉 ‘숨’ ‘바람’ ‘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의 숨은 생명의 근원이자 창조적입니다. 하나님이 숨 쉴 때 죽었던 생명이 살아납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으로 표현되고,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이자 ‘진리의 영’으로 표현됩니다. 다음으로 성경에는 성령의 일이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람이 오고가는 흔적이 없듯이 성령의 일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구원파들이 몇 날 몇 시에 구원 받았다는 기억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말하는 데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새벽과 아침의 시간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영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담당합니다. 누구든 성령을 받아야 중생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은 특히 성령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신약에는 약 150회 정도 성령이 사용되는데 사도행전에 약 70회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부릅니다. 우리 인생도 거듭나기 전에는 세상살이였지만 거듭난 사람의 사람은 ‘성령살이’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 난 신자는 성령과 함께 살아갑니다. 잠을 잘 때에도 성령임과 함께 꿈을 꾸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늘 성령님과 동행합니다. 그래서 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일을 해도 피곤치 않게 되고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절망하거나 낙심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거듭난 사람을 성경에 있는 대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믿고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말하고 성경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맛보다 달고 오묘하고 신비한 것을 느낍니다.

 

권능

-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영어로 ‘다이나마이트’입니다. 이는 성령의 엄청난 권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약 1톤의 폭약이 쿵 하고 터지는 위력입니다. 옛날 이리역 폭발사고를 기억하시는 분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옛 것이 순식간에 파괴되고 거기에 새로운 활력의 역사,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얼굴 표정부터 다릅니다. 변화산에서 본 주님의 얼굴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스데반 집사처럼 얼굴이 항상 해 같이 빛납니다. 사는 모습이 다릅니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놀라운 성령의 두나미스가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증인

- 헬라어로 ‘마르투스’입니다. 구약에서 증인이란 법정에서 범죄를 성립하는 것을 확인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 단어를 누가가 이곳에다 빌려 쓰고 있습니다. 즉, 마르투스는 예수님에게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눅24:48, 행10:41).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자로 사용합니다(요3:11, 계1:5).

- 그러다 예수님을 증거 하던 사람들이 계속 목숨을 잃어감에 따라 이 단어는 ‘순교자’라는 의미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영어로 순교자를 martyr라 하는데 이는 마르투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는 참되고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순교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우하십니까? 계시록 7장 13~17입니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2. 결론: 성령으로 살라.

 

1) 자동차

- 성령 충만한 모습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자동차에 엔진을 켜고 시동이 걸리면 그 다음부터는 운전석에 앉아서 엑셀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밟기만 하면 자동차가 앞으로 나갑니다. 세게 밟으면 밟을수록 자동차가 질주합니다. 독일에는 속도제한이 없는 도로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한 번 질주하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질주본능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똑 같은 자동차인데 엔진이 고장 났거나 기름이 떨어졌거나 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끌고 가긴 가야 하는데 어찌 해야 합니까? 할 수 없이 자동차를 밀고 갑니다. 밀어도 차가 굴러 갑니다. 그런데 어디가지 갈 수 있습니까? 자기 힘 빠지면 거기서 끝입니다.

-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앞의 것을 저는 ‘세상살이’라 하고 뒤의 것을 ‘성령살이’라 부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제일 위험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바로 자기 힘과 꾀와 지식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지 않고도 당분간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폼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폼 잡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척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힘 빠지면, 자기가 의지하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바닥나면 거기서 끝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없는 인생은 피곤합니다. 지칩니다. 낙심합니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쉽게 거꾸러집니다. 엎어지지 않기 위해 돈을 쌓아 놓고 그 힘으로 버텨보지만 돈이 바닥나면 끝입니다. 이걸 알면서도 우리는 돈을 놓지 못합니다. 마치 끈끈이 쥐약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늘 새는 물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입니다. 돈 떨어지면 바로 추락입니다. 추락하면 복구 불가능입니다.

 

2) 성령의 사람의 특징

 

첫째. 성령의 사람은 먼저 생각부터 다릅니다.

- 생각이 오직 예수님께 닿아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입니다. 말에나 일에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제주도에 놀러간 어느 여자 집사님이 만발한 유채꽃의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잠깐 동안 넋이 빠져 주님을 잊어버렸다고 하더랍니다.

- 자기가 성령의 사람인지 육의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자식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여기 자식이 있다 합시다. 그러면 내 자식을 보고 하나님이 먼저 생각나지 않고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먼저 나는 사람은 아직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식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자녀를 태어나게 하신 것이고 나는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잘 양육하는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둘째, 성령의 사람은 시야가 다르고 이해가 다릅니다.

- 시야가 넓고 전체적이고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막힘이 없고 모든 것이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은 과대망상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과 차원이 다릅니다. 제아무리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연구해도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내 영혼과 마음을 조명하고 밝혀 주셔야 성경이 이해되고 믿어집니다.

- ‘예수는 신화다’는 책을 쓴 어느 자유주의 신학자가 성경을 읽다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부분에 이르자 그만 성경을 덮었답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순례의 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기에 쉼 없이 기도한다는 말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은 것이었습니다.

 

셋째, 다음으로 성령의 사람은 말이 다릅니다.

- 말이 곧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말해야 합니다. 말에 사랑이 묻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그 어떤 말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다 듣고 계십니다.

-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귀에 들리는 대로 보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 없는 말은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사랑은 정직하고 진심이며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저주하고 비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고 없는 말을 지어내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남을 험담하는 일을 놓치지 않고 계산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섭리적이며, 하늘에 속한 일들을 땅의 차원,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폄하하고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일들에 대해 반드시 계산하십니다.

 

넷째,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 기독교의 생명과 능력은 말보다는 행동 속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백 마디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행동은 말보다 더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영적인 열매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완벽한 삶의 본보기입니다. 참된 선은 오직 그분의 삶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십계명의 사람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오늘 우리 주님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고,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어 권능의 사람이 되고, 드디어 주님을 증거하는 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 대문에 믿음을 선물로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는 단지 종교 개혁가들과 순교자들만의 구호가 아닙니다. 이 땅의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하나님의 생명과도 같은 구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고 모든 성도님들에게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다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중생하였음을 믿습니다. 이제 성령의 사람으로서 남은 생애동안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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