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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 <사도행전강해>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6. 23:02

본문

2주차. <사도행전강해>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본문: 1:4-5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 본문 주석

 

1) 사도와 함께 모이사

- 원문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늘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즐겨하신 것 같습니다.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가족정신을 말합니다. 가족은 무엇보다 함께 식사를 하는 식구들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 되어야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바로 자기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것입니다.

 

2) 분부하다

- 원문은 ‘명령하다’(command)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이 나오면 우리는 즉시 마음을 경건함으로 준비시키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단단히 다짐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교훈이자 삶의 지침입니다. 명령준수가 생명줄입니다. 이를 어기면 반드시 주님의 책망이나 심판이 기다립니다.

- 불행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행복한 인생을 바랍니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잘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소원은 행복해지고 싶다 하면서 몸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행복해 지고 싶다면 최우선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알고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특별히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 성경에 기록된 바로 주님의 명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십계명이요, 둘째는 사랑명령이요, 셋째는 전도와 선교명령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생명샘입니다. 이 계명은 모든 율법의 요약이자 율법의 심장에 해당합니다. 심장이 멈추면 생명이 중단됩니다.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나라의 키워드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입니다. 이 나라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날마다 세워져 갑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각자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를 서로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연결’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연결되지 않은 것은 단절입니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자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단절은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연을 끊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 번 단절된 것을 연결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기 위해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희생을 치루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확장공사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내용물이 사랑이라면 이 내용을 담아낼 그릇을 더 크게 만드는 일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작은 그릇에는 작은 용품과 물량에 담깁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릇이 커야 멀리 보고 깊이 보고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릇이 커야 배포도 있고 용감하고 지칠줄 모르며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영적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릇이 커야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른 이를 용서하고 배려하고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체구는 작아도 포부가 커야 합니다. 성도의 그릇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매진할 때 커지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키우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열심을 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3)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 하나님은 중요한 사역을 담당시키실 때 장소문제를 거론하십니다. 장소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성취하고 완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새로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불러내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고 쫓기던 다윗에게 왕위를 이어받게 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선물하셨습니다.

- 그런데 이 말씀도 강한 명령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명령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민감하신 분은 바로 이런 명령이 내릴 때 뭔가를 직감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평상시에 가지고 계신 성도는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 그러나 세상에 익숙하고 세속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둔감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눈을 뜬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둔감한 사람은 목사가 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경을 풀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열심히 설명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미 그 속에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선 이런 현상을 ‘편향’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라고 하는 것인데 인간은 누구든지 지금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다른 지식의 침투를 경계하고 방어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의 틀을 갖추어 놓고 새로운 지식을 수용할 때에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지식이 들어오면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거의 때에 각자는 지지하는 후보가 있습니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지지후보를 끝까지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변화를 지독히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그냥 지금까지 생각해 온대로, 살던 대로, 현실에 안주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과연 자기를 고집하면서 행복해 질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우리에게 왜 오셨을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 스스로는 변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성령님이 이미 알고 우리를 도우시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4) 내게 들은 바

-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동거동락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전혀 새로운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가 하신 말을 다시 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꺼내는 이 말이 지금 처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왜 주님이 승천하기 전에 다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망각증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듣고 들은 말씀임에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 사건이 있긴 전에 제자들에게 무려 네 차례나 자기의 죽음이 어떠할 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들은 제자는 없습니다. 그만큼 타락한 인간은 귀가 닫히고 마음의 문이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비유로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셨습니까?

- 귀를 열고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귀를 열어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예배 때엔 설교에 집중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설교가 곧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더 성숙한 성도라면 설교 말씀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좋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 신학적으로 약속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보존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변괴치 않으시겠다고 스스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 안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울러 이 땅에서 복을 받아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이 약속을 우리에게 행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의 전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물론 이 믿음마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서 그냥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약속하시고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시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천국 가는 ‘티켓’하나 받아 놓고 이 땅에서 무병장수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약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을 부르셨을까요? 성경이 약속하는 내용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지금까지 하신 약속 이외에 성도들에게 주실 엄청난 선물이 있음을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24:49)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요14:16)

- 우리는 약속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림도 하나의 성숙한 영성입니다. 어린아이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떼를 씁니다. 그래도 아무 런 반응이 없으면 혼자 찾으러 길을 나섭니다. 결국 길을 잃고 미아가 됩니다. 때로 하나님의 응답이 늦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생토록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답이 주어지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것이거나 내게 필요치 않은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된장을 만들기 위해선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그것이 숙성되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숙성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충분히 기다릴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이제 모든 약속의 대미가 장식됩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앞서 누가복음에서 보았던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히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물세례는 단지 그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하나의 예식이지만 성령의 세례는 그가 속까지 진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대체 성령이 어떤 분이길래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 해답은 요 14:26에 있습니다.

“보혜사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보혜사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파라’는 ‘내 옆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거한다’는 뜻이므로 즉 내 옆에서 언제나 나와 함께 머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누구의 이름으로 오십니까? 주님은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고 했으므로 예수님 이름으로 성령님이 내게 오시는 것입니다. 이 분이 내게 오시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혜로 열어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먼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할 때 반드시 뜨거운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 맛을 체험한 사람은 평생토록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끼고 살게 되는 법이지요. 시편 기자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꿀맛보다 더 좋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냐?“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눅24:32).

-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제일 첫째 특징이 있는데 바로 그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읽어도 규칙적으로 읽지 않으며 또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자기에게 이용하겠다는 인본주의의 사상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도에게 성경은 폼으로 들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적어도 성숙한 성도라면 1년에 한 번 이상은 성경 전체를 다 읽고 쓰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암송하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읽지 않으면서 전도한다고 하는 사람의 행위를 두고 딱 들어맞는 표현이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입니다. 이런 사람이 기독교에 있어서 제 1의 방해꾼입니다.

- 성령을 받으면 가장 중요한 복은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생고생을 했습니다. 왜 고생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아브라함부터 4대 만에 내 민족을 돌아오게 할 것이다, 창성하게 하여 구원할 것이다’ 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광야에서 방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약속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그 영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 캄캄한 길을 가는데 조명 없이 길을 가는 사람과 조명을 가지고 길을 가는 사람은 천지차입니다. 조명 없이 길을 가는 사람은 가다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웅덩이에 빠져 상처가 나는 등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조명을 들고 가는 사람은 캄캄할수록 그 빛의 위력이 더해져 태산을 넘고 험곡을 가도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로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우리는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우리의 삶에 대한 모든 해답을 담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덮어놓고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열어야 말씀이 보이고 그때 성령이 조명을 비추십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누구를 증언합니까? 말씀을 열어 밝힘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을 받고 충만한 사람은 충만할수록 예수님이 나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거나 충만하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자꾸 예수님이 나오지 않고 ‘자기’가 나옵니다. ‘내가 지난번에 산에 가서 40일을 금식 기도했고, 저번에는 다니엘 금식기도를 했고, 내가 무엇 무엇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 주체할 수 없는 잘남, 자기자랑 속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벧후 1:20-21을 보시지요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모든 이단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성령의 조명없이 해석한 자들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신앙의 선조들이 오랫동안 성령의 조명을 받아 연구하고 함께 모여 마련해 둔 공의회의 해석기준을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해석하기를 즐겨 하다가 잘못된 길로 빠진 사례들이 교회역사에 있어서 부지기수입니다.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도 처음엔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단의 교주가 된 것은 공교회의 지침, 즉 신앙고백서가 마련해 둔 지침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단의 교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느 날 산에서 기도하다가 어떤 신의 계시를 받게 되었고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체험에 대해 신학적으로 검증을 받았더라면 그에게 기회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2. (결) 하나님 나라의 일꾼

 

1)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을 하나씩 살피고 미루어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하나님 혼자서도 구원의 대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대우해 주시기 위해 일거리를 주십니다. 일거리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백수건달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만 있으면 백수건달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들하지만 한 번 그렇게 살아들 보시지요. 백수건달이 얼마나 지루하고 무료한 삶인가를 금방 실감할 것입니다. 결국 백수건달은 심심해서 살지 못하고 금방 죽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는 만큼 불행한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허구헌날 빈둥거리며 놀면 좋을 것 같지만 사람은 태생적으로 이을 해야 무병장수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담에게 내린 노동의 형벌은 어찌보면 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2) 일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십니다. 심부름꾼과 일꾼은 다릅니다. 심부름꾼은 주어진 일만 잘하는 사람이고 일꾼은 주어진 일 뿐 아니라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솔선수범하는 사람입니다. 심부름꾼은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이지만 일꾼은 다른 사람의 몫까지 훌륭히 감당하고 해치우는 사람입니다. 심부름꾼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일꾼은 일을 능숙하게 수행하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요즘 세대들에 대해 여러 어른들이 많은 염려들을 합니다. 그것은 일꾼으로서의 재목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을 시켜 보면 그 사람의 능력과 자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딸에게 앞으로 사윗감을 데리고 오면 먼저 한 달동안 일을 시켜보고 결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것이 서툴고 뭘 할이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당신의 사역을 위임하지 않습니다. 제 딸에게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정리정돈하고 반찬 만들고 김치 담그는 법과 사람을 대하는 법과 사랑을 나누는 법을 특별히 강조하고 일부러 가르치는 것은 언제라도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일꾼으로서의 자질을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3) 그러나 무엇보다 오직 성령의 사람만이 일꾼이 됩니다. 지금 제자들이 일꾼이 되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기다리가고 오늘 힘주어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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