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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차. 우리가 어찌할꼬?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2. 09:52

본문

11주차. 우리가 어찌할꼬?

 

 

본문: 2:37-41

 

 

1. 사실과 믿음

 

지난주에 우리는 베드로의 투박하고 사실적인 설교를 통해 진짜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그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회개를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행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베드로와 다른 형태의 설교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다루겠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논리 정연합니다. 구원사적으로 보면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구약을 인용하며 왜 그리스도가 올 수밖에 없었는가를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사실 스데반만한 설교자도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투박한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하며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7:54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꼭 같이 마음에 찔려 하지만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죽이려 듭니다. 베드로는 설득하려는 애씀도 없고 막 죄를 들추어내고 공격하고 거의 협박에 가까운 설교를 했음에도 3천 명이 회심을 했고, 스데반은 논리정연하고 친절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결말은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통해 누구의 설교가 더 우월하고 더 좋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전달자의 어떤 재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2. 놀라운 반응(37)

 

 

이 사실을 그대로 증명하는 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37절을 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는 놀라운 반응입니다. 베드로의 짧지만 강한 메시지가 담긴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복음에 소극적인 사람들이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멀찌감치 뒤에 서서 구경꾼에 불과하던 그들이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설교를 듣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37절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에 찔려(cut to heart)

- 이들이 이렇게 순간적으로 달라져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 원인은 바로 마음에 찔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택자와 유기된 자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을 받을 때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으면 마음에 찔림을 받아 바로 회개를 하지만 버림을 받은 자는 징계가 떨어지면 바로 노한 얼굴로 대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악행으로 내달립니다. 교리적으로 선택과 유기의 차이는 결정적일 때 나타납니다. 꼭 같이 벌을 내렸는데 택자는 그것을 달게 받고 유기자는 튕겨 반발하는 것입니다.

-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속에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동생을 대했던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인이 마련한 제물이 아벨의 초라한 제물에 비해 얼마나 풍성하고 화려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지 못한 제물을 흠향치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얼굴빛을 바꾸어 하나님께 반항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죄과에 대해 정확히 보응하십니다. 이후 가인의 삶은 처참했습니다. 그는 끝없는 유랑길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 그러나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그토록 완강하게 고집을 피우던 사람들이 드디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사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참이스라엘인 것입니다.

 

2) 형제들아

-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의 일행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알다시피 예루살렘 사람들이 얼마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하고 천대했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의식, 우월감을 내려놓고 갈릴리에서 온 촌뜨기들을 자신들과 같은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 상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에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존재이고, 나와 관계없는 대상이었고, 나의 적이었고, 나의 경쟁자였다고 생각하면 나와 상대는 영원히 형제가 아닙니다. 형제는 같은 몸에 붙은 지체입니다.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 태어나 같은 피를 나누고 같은 집에 살며 모든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주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자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보다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를 라가라 하고 핍박하는 자는 하나님도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3) 우리가 어찌할꼬?

- 그런 다음 그들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의 밑바닥에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무지와 흑암 가운데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은 입까지 닫고 삽니다.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꼴도 보기 싫은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고하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드디어 입을 열어 좋은 지도를 바라고 있습니다.

- 한편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이 고백을 통해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삶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전까지 절대적으로 자기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중심이 였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자기애’(self love)라 하고 에고티스트’(egotist)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항상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중심으로 일을 합니다. 에고티스트들은 일을 하다가 완전히 막히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식대로 하다하다 일리 풀리지 않거나 완전히 무능력한 자기를 발견해야 비로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좀 도와 줘”. 그런데 이때 도움을 거절하면 마치 당연히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온갖 욕설과 비방과 섭섭함을 뱉어냅니다.

- 그러나 회심한 사람은 다릅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의해 달라진 사람은 자기를 내려 놓습니다. 자신의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다가섭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어떤 말이든지 달게 받겠다는 순종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비로소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나옵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 됩니다.

 

 

3. 구원의 순서(38)

 

 

이제 그 유명한 38절의 말씀을 해설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을 들은 베드로가 청중을 향해 제시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그 답변이 바로 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정리하면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 사함을 얻으라는 말은 구원에 관한 문제이입니다. 기독교에서 구원론은 역사적으로 숱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늘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 먼저, 누가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이 증언하는 바대로 오직 택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은 택자 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인류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른바 보편구원론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선택과 유기를 믿지 않기 때문에 늘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 두 번째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하는 세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강조하고 그럴 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지 않고 인간의 죄악과 그 상태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행사할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인간의 편에 서서 신학을 합니다. 인간에게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사상은 인본주의에 불과합니다.

 

- 세 번째로,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공격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어떤 존재도 자기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설파하는 진리의 상대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보니까 모든 종교는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여러 소리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독교를 몰아내기 위한 사탄의 계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구원론은 기독교의 교리를 지키는 보루입니다. 구원론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일반종교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것은 타종교에는 진리가 없고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나듯이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구원을 받습니다.

 

 

다음으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구원의 순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회개가 먼저 등장하지만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회개가 먼저고 구원이 그 다음이 아니라 구원, 즉 성령의 선물인 믿음을 받아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다음에 회개가 나타난다는 것이 이론상의 순서입니다. 만약에 회개한 결과로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면 회개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의 조건이 되고 맙니다. 회개는 구원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인간의 반응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죽은 시체가 하나가 있다고 칩시다. 그 시체를 보고 너 회개하면 내가 살려줄게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죽은 시체가 어떻게 회개를 합니까? 일단 살려놓고 난 다음에 회개도 있고 성화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먼저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불어 넣어 주시고 그 반응으로 우리로 하여금 회개를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숨이 붙어 있으므로 회개도 하는 겁니다.

 

완전히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 즉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이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보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이제부터 제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서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먼저이고 회개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를 정리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이고,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또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시고 구원을 결정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회개를 열심히 하고, 선행을 쌓았다고 구원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구원받을 자를 택하여 두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을 수 있습니까? 할렐루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드립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세례를 언급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세례는 씻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씻는 것입니다.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심으로 회개를 했다고 인정하시고 그 표징으로 주시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눈에 보이는 물세례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물세례는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선언이고,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나아가 이 세례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이 모든 선물의 이름은 성령입니다. 정리하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믿음을 받았고, 구원을 이루었고, 회개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39)

 

이제 39절에선 구원받은 자의 사명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평생 동안 반드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내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가 받은 구원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전해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의 이기주의자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다른 사람이 듣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이 널리 세상 가운데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1945815, 이 날은 대한민국의 광복절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네슨 커녕 골에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강원도 오지에 사는 사람은 해방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1년이 지난 뒤에도 광복이 된 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무도 해방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고 무인도에서 숨어 살던 일본군이 30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에 알져진 뉴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들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10;12)

 

 

5.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하다(40)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단지 전하기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베드로는 무리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 40절에서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했다고 했습니다.

- 첫째, 여러 말이라 했으므로 여러 번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말프레오이신인데 이는 영어로 many입니다. 당연히 여러 번은 수고가 포함됩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한 두 번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 열매를 선물하십니다.

- 둘째, 확증했습니다. 헬라어로는 디마르튀라토인데 영어성경에는 경고하다’(he warned)라고 했습니다. 문자대로 해석하면 마치 협박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원 뜻은 증거했다입니다. 다시 말해 조목조목 변증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베드로가 변증의 능력까지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셋째,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파레카레이인데 영어성경은 plead라 했습니다. 이는 간청하듯이 설득하고 호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열심과 성실함과 끈질긴 인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사람의 형편에 맞도록 잘 설명하고 이해가 될 대까지 성실하고 진실 되게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6. 3천 명의 세례자(41)

 

이제 오늘의 마지막 본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와 진지한 복음의 권면과 설명을 들은 사람들 중 무려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놀라운 기록입니다. 과히 교회 역사상 이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한 일이 아니라 성령이 베드로를 통해 나타내신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설교는 성령의 일입니다.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도구입니다. 만약 성령이 개입되지 않는 설교라면 조금의 감동은 줄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영혼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교회가 행하는 물세례입니다. 아마 사도들이 직접 세례식을 거행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 사도들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12사도가 약 3천 명을 대상으로 시행했다면 한 사람 당 250명씩 할당된 것입니다. 아마 시간상으로도 두어 시간 이상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이겠습니까? 만약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상상해 보시지요. 여러분 모두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겠습니까?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함께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비록 형식은 물세례이지만 성령님과 동거한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나는 지난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겠다고 온 세상에 공개적으로 공포하는 일입니다.

 

 

7.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세례를 받으신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이미 결혼한 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신랑을 알고 굳게 정절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믿음의 서약자들입니다. 결혼생활을 잘 하려면 상대에게 성실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합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식대로 주장하고 고집피우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먼저 우선시하는 잘못된 습관과 관행들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신부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얼굴이 잘났고 못났고 문제가 아니라 신부의 영혼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영혼은 거듭났을 때 나타납니다. 성령의 선물인 믿음을 받았을 때 가능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 얼굴은 믿음을 가진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얼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명령을 잘 지킬 때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굴도 아름답고 몸의 향기도 아름답다면 우가 그를 싫어하겠습니까? 그런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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