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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차. 베드로의 설교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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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차. 베드로의 설교

 

1. 본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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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에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임과 함께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구약의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시대를 시작한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아리엘교회가 이렇게 이 시대, 이 지역에 세워진 것도 바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지금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모든 교회의 뿌리이자 탯줄이며 아리엘교회의 근간입니다.

    

 

이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날에 베드로가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머리에 갑자기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이 모든 일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근거를 구약성경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인용되고 있는 요엘 2;28-32과 시편 16:8-11, 그리고 110:1절이었습니다. 그의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졌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큰 감동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순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 증거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소개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하나씩 그 내용과 설교의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베드로 설교의 내용과 특징들

    

 

첫째, 성령 충만: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다(14)

-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가 지금 상당히 고무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성령 충만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입이 열립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은 이때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두었을 때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뜨거움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쳐야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할수록 속에서 불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충만할수록 말씀을 증거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 서서 회개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갑자기 길에 서서 이렇게 큰소리로 오치지 못합니다. 누가 쳐다볼까봐 창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말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수요일 오후에 옆 교회에서 거리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 여성 성도께서 건물 앞에 서서 큰소리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듣지 않고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읽는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얼마나 우렁찬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기막힌 전도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위대한 전도는 없습니다.

- 오늘날 설교자도 성령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열정적으로 전합니다. 우리 모두 뜨거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에는 냉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악인은 싸늘하고 매몰차고 인정머리가 없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증오가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얼굴 표정부터 딱딱하고 화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빛이 벌써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얼굴이 해 같이 빛납니다. 늘 활기가 가득찹니다. 인사를 해도 힘차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둘째, 오해에 대한 변증: 때가 3시다(15)

- 알다시피 오순절 다락방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의 제자들이 갑자기 각 지방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제자들이 술에 취한 것으로 폄하했습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은 뭐든지 오해합니다. 그 사람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고깝게 보고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이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고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선사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11:19)

- 여기서 굳은 마음레브 하에벤이고 부드러운 마음레브 바사르입니다. 하에벤은 이고 바사르는 입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굳어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거두어졌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심판을 위하여, 종종 사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억제력을 제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굳어있는 순간을 늘 발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즉시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굳은 마음은 돌 같은 마음이고 돌 같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7세기 청교도 신학자인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부드럽고 연하고 녹아내리는 마음이 하나님의 참 자녀의 초자연적인 경향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 한 마디로 오해는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서도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이런 오해를 불식시킵니다. 한 마디로 시간이 제 3, 지금으로 치면 오전 9시에 불과한데 술은 무슨 술이냐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이 시간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혀 논리에 맞지 않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훼손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이 사명을 회피한다면 그는 그 머리에 하나님의 진노의 숯불을 쌓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구약을 인용하다: 요엘 2:28-32, 16:8-11, 110;1

-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는 사도들을 비롯한 그 당시 모든 복음 증거자들의 메시지와 그 방식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초대교회 복음증거자의 공통된 주요 메시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바로 그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늘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늘 베드로를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며 오순절 성령강림이 이미 구약 성경에 예고된 일이었음을 증거하므로서 자신의 설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이는 오늘날의 설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모든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을 벗어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언제나 자신의 설교에 인간의 생각이나 철학이 개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설교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설교자들은 언제나 강해설교를 고집합니다. 다른 방식의 설교를 하면 혹시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덧붙여 전할까봐 오직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것을 본업으로 삼습니다.

- 역사적으로 교회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이 개입되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왜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았습니까? 중세 1천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회의 전통 즉, 공회의 결정사항이나 교황의 명령 등을 첨가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회의나 명령 자체가 성경을 벗어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함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인본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세에 성령을 모든 육에 부어 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을 받은 사람은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17) 예언을 하고(18), 기사와 징조(19)와 이적(20)이 나타나고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약속을 근거로 22절에서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일을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 25-28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시편 기자가 증언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이미 주를 보았다는 것이고, 선지자로서 다윗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31-32절에 있는 베드로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얼마나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전개입니까? 과연 일자무식한 베드로가 행하는 설교가 맞는 것입니까? 성령 충만이 아니면 어찌 베드로가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 사실의 선포

- 다음으로 우리는 22-24절과 29-26절을 통해 베드로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 하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지금 청중을 향해 그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아주 호소력 있는 수려한 문장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 설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냥 사실성을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사실성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이것입니다. 그것이 24절과 32절가 36절에 있는 선포요 이것이 복음의 진수인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 성도님들의 지나치게 감성적인 신앙의 모습에 대해 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칩시다. 그러면 저마다 거기에 대한 반응들이 나옵니다. 은혜를 받았다든가, 지루했다든가 등 다양한 반응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들의 이면에는 그것이 다 설교 속 어떤 사실에 기초한 반응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지루했다, 말씀이 좀 어눌했다, 재미 없었다 하고 느끼면 은혜를 못 받았다그럽니다. 대신 어느 목사님은 언변이 뛰어나서 말 한 마디를 해도 맛깔나게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거의 문학가 수준이어서 마치 별이 쏟아지는 들녘에 있는 것처럼 여성들의 감수성을 자극해서 눈물을 쏙 빠지게 만듭니다. 적어도 눈물을 쏙 빼게 하지 않고서는 은혜로운 설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설교에는 절대로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좀 큰 교회에서는 예배를 몇 부씩 나누어 드립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시는가 하고 주보를 보고 시간대를 옮겨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는 진풍경이 연출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신자의 무지를 깨우치고 마음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주입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님을 통해서든지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긴 본문이지만 끝까지 읽어보시면 청중을 향해 호소를 했다든가, 설득하고 설명하는 흔적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 딱 하나 사실을 그대로, 마치 집어던지듯이 선포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가 성경에 예언한대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고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가 됩니다. 정말 재미 하나 없이 투박하고 무미건조한 설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오늘 한국교회에 오시어 이런 설교를 하면 언제 끝나나 하고 하품하고 있을 것입니다.

-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내가 기분 좋게 알아들었다든가, 내가 말씀을 들을 때 정서적으로 참 내 맘에 맞았다든가 이것이 좋은 설교이고 나쁜 설교, 은혜 받은 설교, 은혜 받지 못한 설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사도들이 한결같이 한 입으로 같은 말을 이야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심장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종교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 깊이 자각한 사람입니다. 고전 15:13-15절을 읽어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 이것이 사도 바울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째서 달라졌습니까? 그는 분명히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후로 바울은 다시 살아난 예수를 전파하는 인생으로 일재 전환을 한 것입니다.

-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관이 어디서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 설교 듣고 기분이 좋아서 그것을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잠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실적인 문제, fact를 인정하고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나 감정은 쉽게 사라집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실에 뿌리를 둔 사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사도 바울의 믿음이 정서적인 것에 기초하지 않고 어떤 설명과 논리로도 흔들 수 없는 엄연한 사실위에 기초하여 완전히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진 것처럼 여러분도 어떤 이론과 논리로도 바꿀 수 없는 이 절대 불변의 진리를 품는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3. 결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증언하는 일에는 무엇보다 성경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포하다케리그마라고 하는데 성도는 케리그마 사역자입니다. 이 좋은 용어를 불트만 같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오용하여 신학적으로 케리그마하면 선포된 말씀의 재해석으로 각인이 되어 우리를 씁쓸하게 만듭니다. 특이한 것은 자유주의자들, 좌파들이 항상 좋은 용어들을 선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도 물을 흐려놓아서 우리 쪽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려면 괜히 오해 받지 않을까 조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 말씀사역에 있어서 왜 중요한 가를 재차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배 시 설교에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설교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다음 주에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3천 명씩이나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재미있는 강의를 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한 사람을 180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늘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함을 스스로 안타까워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죄인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오직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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