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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차. 일어나 걸으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2. 09:54

본문

13주차. 일어나 걸으라

 

 

본문: 3;1-10

 

 

1. 가정교회에서 성전으로

 

 

3장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앉은뱅이가 평생 걷지 못하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다는 이 내용은 어린이 동화책에도 소개될 만큼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3장의 이 이야기가 단순히 기적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보면 2장과 3장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2장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성도들의 신앙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각 가정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서로 떡을 떼며 참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의 출발은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런데 3장부터 장소가 성전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러므로 2장과 3장은 가정교회에서 성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점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싶은 사건에는 항상 두 사람 이상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증인의 수가 두 사람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해설

 

 

1) 제 구시 기도시간에(1)

- 유대교에서 정해진 기도시간은 동이 트자마자 드리는 아침기도와 9(오후 3)에 드리는 오후기도, 그리고 황혼 무렵에 드리는 저녁기도가 있습니다.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에 두는 자라(2)

- 먼저 끝에 있는 미문에 대해 살펴봅니다. 원래 이 문은 니카노르문이라 불렀는데, 마카비 독립운동 당시 유대를 탄압하던 시리아의 적장 니카노르를 이 문에서 잡아 처형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성전을 다시 지으면서 이 문을 다시 지었습니다. 얼마나 크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었는지 그때부터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불렀습니다. 재료가 금과 은으로 치장했다고 하는데 당시 금은 고린도산에서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여인의 뜰이방인의 뜰을 지나갑니다. 다시 말해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이 문을 거쳐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 여기에 지금 누가 앉아 있습니까? 바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입니다. 참 죄송한 말씀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원통할 것입니다. 제 조부님도 한 쪽 다리를 저는 분이었습니다. 자라면서 얼마나 모욕과 차별대우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까지도 병신이라고 놀렸습니다. 조부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 진주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멸시하고 놀리던 사람들이 조부님에게 와서 머리를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조부님은 인심쓰기를 후하게 했습니다. 쌀이 떨어진 사람에게 창고를 열어 쌀을 나누어 주었고, 돼지라도 잡는 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함께 잔치를 열었습니다.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에게 약속날짜를 정한 다음에 돈을 싼 이자로 빌려 주었습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에겐 매우 엄했지만 사정이 있어 돈을 갚지 못하여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너그러웠습니다. 무엇보다 손자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강조하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여섯 살 때 삼국지를 사 오신 겁니다. 그 책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나중에는 동네 어른들에게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그를 폄하하거나 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짓습니다. 유명한 닉 부이치치의 경우를 보아서도 우리는 육신의 장애가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조건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생을 사느냐입니다.

- 그런데 오늘 이 미문 앞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미문에 앉아 있습니까? ‘구걸하기 위하여입니다. 3-5절에 보니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서도 구걸하고무엇을 얻을까하고 바라봅니다. 가장 화려한 문 앞에 가장 처량해 보이는 한 걸인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가징 비참한 인생과 절망을 끌어안고 평생 스스로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하여 남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와서 동냥을 하며 먹고 살아야 했던 한 불행한 인생이 지금 성전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미문 앞입니까? 여기엔 걸인들만이 아는 묘한 것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외식을 좋아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밖에서 식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꾸미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남한 테 잘 보이려고 하는 허영심이나 체면 따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옷만 보아도 이런 것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민15과 신22장에서 율법과 언약을 기억하도록 옷에다 술(tassel)을 달도록 했는데 외식하기 좋아하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을 과시하기 위해 옷술과 청새끈을 크게 달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갈 때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들을 보면 허영심이 발동하여 동냥을 주는데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돈을 통에 떨어뜨립니다. 소리 나지 않게 몰래 슬쩍 줄 수 있음에도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외식적인 행동에 대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심리를 누구보다 정확히 궤뚫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걸인들입니다. 그들은 돈이 떨어질 때 소리가 땡그랑 하고 나도록 돈 통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걸인들은 외식하는 자들의 그 허영심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오늘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 걸인은 예배자로 성전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나와 있습니다. 이 걸인은 예배와는 상관없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에도 존재합니다. 수없이 드려지는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서 언제나 무엇을 얻을 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히 참 예배자로서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를 보라(3-5)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의 미문을 지날 때에 걸인이 목격되었습니다. 여지없이 이 걸인은 구걸을 합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돈이 없습니다. 대신에 두 사도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그랬더니 걸인의 눈이 크게 뜨더니 뭔가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도를 바라봅니다. 아마 걸인은 속으로 보라고 했으니 제법 큰 돈을 줄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

- 그러나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이 들렸을 때 걸인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아마 큰 실망을 했겠지요. 이런 경우 악한 자들은 누구를 놀리느냐며 거품을 물고 악담을 합니다. 잘해 주면 굽신거리고 조금이라도 못해 주면 금방 등을 돌리는 타락한 죄인의 본성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 그런 걸인을 향해 베드로가 다시 말합니다. ‘내게 있는 것이 있다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베드로가 옛날의 베드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한솥밥을 먹고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음에도 막판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등을 돌렸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강림 이후 능력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동전 한 닢 쥐어주는 것으로 끝냈을 베드로가 이제 한 사람의 불쌍한 영혼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를 통한 하나님의 듯과 계획, 즉 하나님의 섭리에 눈을 뜨게 딘 것입니다. 무엇보다 섭리를 아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주님 이름으로 선포하자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 무엇보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나사렛이라는 출신고향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설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나사렛이라는 작은 촌에서 태어난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함입니다. 저는 치유나 축귀 등의 일을 할 때 예수님의 풀네임을 사용하라고 권장합니다. 나사렛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선포하라고 말합니다. 귀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예수님의 정식 호칭이자 풀네임입니다.

 

 

5) 뛰어 서서 걷다(7-8)

- 베드로는 선포와 동시에 걸인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이는 기적에도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대 진흙을 눈에 발라 주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치유를 할 때에도 아픈 곳을 만지며 하는 것이 환자에게 더 큰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안수기도 또한 머리에 손을 직접 얹어 행할 때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 이제 놀라운 결과를 목격합니다.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걷기도 하고 뒤기도 합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뻤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마찬가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지 않을까요? ‘은 인간이 기뻐할 때 행하는 몸짓입니다. 본능적으로 기쁨이 밀려들 대인간은 춤을 춥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춤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기쁨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민족성이 다르므로 다양한 춤이 있는 것이죠. 우리 민족은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느긋함이 베어 있습니다. 물론 한스러움을 표현하는 한풀이 춤도 있지만 대개 우아한 자태로 춤을 춥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좀 방정맞아 보입니다. 느낌상으로 작은 몸짓으로 추기에 까불까불하는 모습니다. 중국인들은 좀 요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추과 한민족의 춤이 서로 닮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다윗처럼 덩실덩실 춤을 춘다고 하니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서로 많이 닮은 민족입니다. 말도 닮았고(아버지=아비), 농경문화(우경), 음식(마늘과 말린 음식), 노래(아리랑), 풍습(돌무덤, 모자, 장례 시 곡하는 모습, 무궁화 꽃 등)들이 유사합니다.

- 기쁨에 찬 이 걸인이 그 다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걸인은 성전으로 갑니다. 40 여 년 동안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성전이 아닙니까? 얼마나 들어가 보고 싶었으면 일어서자마자 성전으로 달려갔을까요?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 사람은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요? 그 다음에 걸인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찬양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통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6) 기이히 여기며 놀라워하더라(9-10)

- 늘 하던 대로 기도시간에 맞춰 성전에 온 백성들이 오늘은 평생에 잊지 못할 기적의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런 기적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주변에 보면 속된 표현이긴 하지만 재수 없다고 하잖아요? 이런 분들은 어쩌다 한 번 예배에 빠졌는데 그날에 기적이 나타나거든요. ‘아뿔싸, 왜 하필 내가 빠진 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하고 후회해도 때는 늦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성실함입니다. 백 번 중 99개를 잘하고서도 단 하나를 놓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세상 사람들은 재수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나의 불성실을 탓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일으키신 진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기적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일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취미생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나라가 드디어 임했습니다. 그 결과 44절의기록처럼 남자만 5천 명이 회심을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참 성돋요 형제자매가 되어 하나의 믿는 무리가 되었고 자신의 재물을 누구도 제것이라 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4:32)

    

 

결론

 

 

오늘 초대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기 이전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기적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강력히 선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내가 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에게는 하나님나라에서 사용되는 권세,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위대한 선포가 있습니다.

    

세상은 비록 돈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교회는 세상과 다른 권세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권세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권세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혹시 잘못 건드렸다가 화가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받은 권세를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일어나 걸어라고 세상을 향해 명령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바르게 사용할 때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 중의 가장 큰 기적은 한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복음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과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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