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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차.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다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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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차.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다

 

본문: 2:42-47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초대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나라에 근접해 있는가를 보고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하나씩 풀어 보겠습니다.

    

 

2. 본문 해설

 

1) 먼저, 42절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했습니다.

 

- 세례를 받은 3천 명의 무리가 교회에 모여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역을 디다케 사역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신 것이기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고전12;28에 보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는데 그 첫째가 사도요 둘째가 선지자요 셋째가 교사요 넷째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이 병 고치는 자요 서로 돕는 자요 각종 방언을 말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회에 사도들을 가장 권위 있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가르침은 훗날 어떤 경로를 거쳐 기록된 문서가 되어 드디어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말하는 사도적 전통’(The apostolic succession)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이 거룩한 사도적 전통을 버리고 권력을 독점한 교황과 일부 성직자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회의 전통과 그러한 가르침을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적 가르침이라는 전통을 고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제정하신 율례요 뜻입니다.

- 한편으로,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성도가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배우지 않고 지식과 지혜를 얻고 깨닫는 길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참아들 디도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은 이유는 택한 백성들의 믿음과 그들에게 진리의 지식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믿음과 진리의 지식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1:1) 우리는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믿음을 갖출 수 있습니다. 가장 최고의 배움은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아울러 스승이 안내하는 좋은 책들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거룩한 독서라고 하는 좋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비록 카톨릭에서 시작한 것이라 해도 좋은 것은 버리지 않고 잘 다듬어 사용하면 더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것이 아니고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판단되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비토하기에 바쁜데 이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편협함을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뿐 아니라 교회에서 권장하는 좋은 책들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대충 읽지 마시고 깊이 있게 신중하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서로 교제하고했습니다.

 

- 교제는 코이노니아fellowship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가 살아있는 곳입니다. 성도들끼리 교제를 나누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끼리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미워하면 등을 돌립니다. 한자로 서로 등을 돌린 모습을 본 따 배반할 라 합니다. 원수끼리는 서로 배반하고 배신합니다. 그러나 성도란 모름지기 원수마저 사랑해야 할 책무를 가진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원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준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 사이에는 오직 선한 마음과 행실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잊어버리고 간혹 다른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행합니다. 한 몸에 붙은 같은 지체라면 한 지체가 아프면 동시에 나도 아파야 합니다.

- 교제를 열심히 행해야 할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저는 사랑도 연습을 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일이 서툰 것은 평소 연습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부지런히 연습을 한 사람이 정상에 서는 법입니다. 김연아, 이상화 선수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소에 훈련을 통해 쏟은 땀방울이 한강을 이루었기에 세계의 정상에 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의 노력에 감탄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빛내었기에 훈장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은 기술이라고 한 것입니다. 부부간에 싸우는 일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기술이 부족해서 입니다. 아리엘 성도들도 교제하고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떡을 떼며했습니다.

 

- 이것은 단순히 음식만 먹는 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만찬을 규칙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신학자 F. F. 브루스는 단순히 식사하는 일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히 이렇게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강조한 것을 보면 이 일이 의미심장한 거룩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성찬이 일상화된 초대교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넷째,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했습니다.

 

-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제 교회가 막 태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율법의 우산 아래에서 살던 구약의 사람들이 이제 성령의 복음의 우산 아래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고 기대감에 부풀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죽었던 자들이 이제 다시 살아났습니다. 지금까지 어둠속에 살던 자들이 빛의 세계로 이끌리어 살게 된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맹인이 눈을 뜬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냉랭하던 가슴에 갑자기 이상한 불이 붙어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평소에 서로 미워하고 냉대하던 삶들이 이제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찌 이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정말 이보다 더 뜨겁게 합심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렬히 사모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초대 교인들은 바로 이렇게 뜨겁게 기도한 분들이었습니다. 이 기도의 전통을 오늘의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키어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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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제 43절로 갑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했습니다.

 

- 저는 이 구절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말 사도들은 대단한 분들이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저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라고 해서 반드시 이런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가르치고 주님께서 맡기신 성도들을 잘 목양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잘 요리해서 먹이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양육하는 책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마치 사도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성령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필요한 경우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고 행하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사례에 속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들처럼 일상적으로 가진 능력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의 목사는 사도가 아닙니다.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마치 목사는 신령한 능력을 행하고 신비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하라는 딤전 5:17의 교훈대로 대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 한편, 사도들이 행하는 기사와 표적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에 이미 예언된 일입니다. 요엘의 말씀을 보면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늘의 기사와 땅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이러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사역을 뒷받침하고 아울러 사도들이 행한 기적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고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모인 사람들에게 기사와 표적을 증거해 보인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입니다. 지금 초대 교인들은 이제 막 신앙에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아직 믿음에 있어서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성경이 완성되어 손에 들려져 있지만 아직 초대교인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던 때였습니다. , 우리는 얼마나 은혜 받은 주의 백성들입니까?

    

 

3) 44-45절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 새로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이처럼 함께 거합니다. 여기서 함께epi to auto인데 이는 교회와 함께라는 뜻이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함께 한다고 아무 곳에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 안에서 함께 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 함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니꺼 내꺼가 없습니다. 공동소유의 정신이 나타납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줍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성경의 이 부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상이 성경에도 나타나 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는 전제를 망각하고 그렇게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판단할 때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만을 전제로 하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 그렇다면 왜 초대 교인들이 갑자기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공동생활을 한 것입니까? 이것은 한 가지 점을 크게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일부 사도들과 초대교인들은 하늘로 가신 주님이 금방 다시 오실 줄로 안 것입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1)는 말씀을 그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부활도 3일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재림도 그렇게 될 줄 안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것은 세상의 심판이요 종말을 뜻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좀 있으면 세상이 끝나는데 내가 부자이거나 가난하든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죽는 순간에 억만금이 있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 정말 중요합니다. 요즘은 돈이 곧 하나님 행세를 하는 세대입니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돈만 들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나 돈이란 살아 있을 때 필요한 것이지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분명한 것은 돈이 전부는 아니고, 돈은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예화) 배가 난파가 되어 무인도에 도착한 부부가 어느 날 바닷물에 떠밀려 들어온 상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열어보니 돈다발이 가득했다 합니다. 그 부부가 이 돈 다발을 어디에 사용했을까요? 밤에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불쏘시개로 썼다 합니다. 무인도에 사는 이 부부에게 삶은 종말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지금 초대 교인들에게 닥친 종말의 위기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정신이 바로 이 종말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일이 종말일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돈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돈을 인색하게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돈을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색한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겉옷 달라면 속옷은 벗어주지 못할망정 달라는 겉옷은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4) 46-47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첫째,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언제 마음을 같이하고 어디에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습니까? 부부지간에도 갈등이 있는데 나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의 경우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내일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리는 그 순간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여,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주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 사함과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매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택한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심판하러 오시지만 그 심판을 최대한 늦추어 택하신 백성이 모두 주 안에서 구원받기를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자비하신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을 꼽으라면 저는 시편 103편을 추천합니다. 그중 8-9절이 참 은혜롭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얼마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입니까? 얼마나 우리 죄를 오래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까? 이 자비하심을 생각하고 이런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간과한다면 우리는 정말 주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둘째,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 성도들은 성전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꼭 같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 하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데 초대 성도님들은 정말 그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신앙의 이중성이 얼마나 많이 발견됩니까? 교회 안에서는 그래도 신앙을 지키는 것같이 행동하다가도 교회 문만 나서면 바로 세상 사람들로 돌변하는 교인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교회를 손가락질 합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식사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 바보 천치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온갖 부끄러운 사건사고에 얽히는 교인들로 인해 사람들은 개독교운운하며 침을 뱉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맞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개신교라 해서 심판하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사기행각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에게로 돌아와 오직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

 

셋째,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초대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5;14).

(μεις εστε το ψως του κοσμου)

-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른 무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그 빛(το ψως, the light)라고 한 것입니다. 헌신된 소수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아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 모두, 신앙의 수준에 상관없이 그 모든 사람을 정관사를 붙여 단수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는 빛이 아님에도 빛이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빛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 빛은 어둠을 물리치듯이 누리는 모두 하나의 빛이기에 나누어 질 수 없고 서로 미워해서도 안 되는 사람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의 사명을 망각할 때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교회의 불빛이 사라질 때 세상은 곧 타락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지 못할 때 그것은 가장 암울한 시기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좋은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입니.

    

 

3. 결론

 

우리는 오늘 초대교인들의 신앙과 삶을 통해 좋은 교훈들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초대교인들은 종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말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당신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초대교인들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구원받은 백성이 주 안에서 하나로 통일“(1:10)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지 못할 때 교회가 분열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셋째, 초대교인들은 신앙과 삶이 일치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동일한 생활을 했습니다. 늘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볼 때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아리엘교회가 실행하는 토요가정예배가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이번 주에도 평강을 이루시고 많은 사랑으로 세상의 그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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