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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차. 시스템 사역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6. 27. 09:27

본문

 

25주차. 시스템 사역

 

 

본문: 6:1-7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1. 사탄의 전략

 

 

알다시피 사탄은 줄기차게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교회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탄의 전술은 늘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핍박입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이라는 막강한 권력 하에 세워졌으므로 당연히 로마 황제의 영향을 심대하게 받았습니다. 황제는 갖가지 구실로 자신을 우상화하고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 숭배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였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당연히 핍박이 따랐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독교회는 핍박이 강할수록 더 성장했습니다. 초기 약 100년 동안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네로황제, 칼리큘라 황제, 트라야누스 황제 등에 의해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히려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서기 313년경에는 로마 제국 시민의 절반 이상이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탄은 전략을 수시로 바꿉니다. 박으로부터 핍박 전략이 잘 먹히지 않을 경우엔 안에서 교란작전을 수행합니다.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을 핍박합니다. 머리가 사라지면 혹시 교회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매질을 하고 고문을 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핍박에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며 주님의 복음을 더 열심히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사도들로 인해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귀신이 곡한다는 속담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사탄은 다시 전략을 수정합니다. 이번에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두 파로 나뉘게 하여 분란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사탄의 이 전략을 말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히브리파와 헬라파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은 거의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번도 유대 당을 벗어나지 않은 토박이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귀한 초대교인들입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서부터마지막 예루살렘 사역까지 거의 주님과 함께 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오순절 날 성령강림을 목격한 사람들이며 이후 제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예루살렘교회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교회를 운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무리가 더해집니다. 바로 이방지역에 살다가 조국으로 귀향한 사람들인데 우리는 이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헬라파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이들이 언제 어떤 루트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거나 정확한 문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4복음서에서 허다한 이방인 무리가 예수님을 목격했고, 그의 주님의 처형장에도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구브로에서 온 한 청년은 주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예루살렘은 성지순례자들이 거의 매일같이 찾아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이방인들도 주님의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교회에 갑자기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교회에는 두 파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드는 사회의 특징입니다. 제아무리 하나가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어느새 파로 나뉘게 됩니다. 각자 자기 생각으로 살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려는 강한 심리적인 경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기보호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 앞을 막아서면 속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차를 운전해 보면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가 내 앞으로 새치기를 하려면 즉시 빵빵- 하고 크락숑을 누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앞서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설 때도 맨 앞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밥도 먼저 먹으려고 하고 쉬는 시간에 먼저 교실을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사회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집니다. 같은 민족이면서 서로 당을 나누어 으르렁거리며 싸웁니다. 오히려 적군보다 상대방을 더 미워하고 저주합니다. 같은 당 안에서도 무슨 파 무슨 계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세상만 그런 거시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탈락한 인간사회의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입니다.

 

 

3. 분란의 꺼리

 

 

그런데 대개 분란은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사고하고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큰 일 앞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모든 국민들이 향응과 유희를 절제하고 심지어 여행하고 외식하는 일도 자제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하찮은 일에는 핏대를 올리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만큼 이상한 동물도 없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초대교회에서의 분란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우상숭배나 배교 등 크고 근본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작은 구제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교회는 부자들이 헌납한 공동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당시 구제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매일구제이고 다른 하나는 주간구제입니다. 매일구제는 말 그대로 매일 구제하는 것이고 주간 구제는 일주일 단위로 하루 두 끼씩 계산하여 열네 끼에 해당하는 식량을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의 대상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주간구제는 오랫동안 예루살렘에 살았던 토박이들 즉,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 이런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주로 합니다. 그 사름들은 원래 여기 사는 사람들이므로 매일매일 식량을 나누어주기 보다는 일주일 분량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반면에 매일 구제는 예루살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대상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로서 예루살렘에 임시로 상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간구제를 할 수 없고 매일매일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파들이 보니까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기네 쪽 사람들에게만 구제를 하고 이방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사람들이 이런 불공평한 일에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게 된 곳입니다. 요즘 말로 일종의 컴플레인입니다. 현대의 기업들은 이 컴플레인을 해결하게 위해 굉장히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일이 조금만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면 즉시 민원이 쏟아지고 야유를 받고 비난을 받기 때문에 매우 조심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이런 컴플레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사를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감사하라는 정신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지만 감사를 방해하는 불공평한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책무도 함께 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드디어 사탄의 전술전략이 원망’, complain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탄은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이 사탄의 교묘한 작전 앞에서 우리의 사도들은 과연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할까요?

 

 

4. 사도들의 대처

 

 

2~3절을 다시 읽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택하라

 

 

우선 여기서 접대(옛 성경에는 공궤’)라는 말은 공동식탁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돌아가면서 음식 서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교회의 조직이 아직 꾸려지지 않았으므로 누구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맡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들도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 서빙을 했다는 것입니다. 너나 구분 없이 밥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수가 적을 대에는 이런 스타일이 통하지만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 혼사서 1인 몇 역을 하는 차원을 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직의 필요성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직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사회의 체계를 말합니다. 사도들은 지금 바로 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바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들이 제시하고 있는 집사 제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들은 이 집사들을 성도들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제안합니다. 사도들이 회의를 열어 결정해도 되는 일이지만 사도들은 택할 수 있는 권한을 성도들에게 위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민주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의가 어디서 발원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성도들의 선택입니다. 지금 교회의 다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히브리파입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일곱 집사들 모두 헬라파들이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소개되고 있는 안디옥이라는 이방인이었습니다. , 이 얼마나 놀라운 결정입니까? 히브리파들은 지금 자기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자 그 문제의 해결을 상대방에게 전담시킨 것입니다. 이 정도면 얼마나 성도들의 수준이 높은 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 충만한 사람들만이 내릴 수 있는 위대한 결정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들은 이제 자기들은 집사들과 달리 두 가지 일에 전념하겠다고 공표합니다. 4절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니라 하니이것으로 초대교회의 질서가 잡힌 것입니다. 사도들과 집사의 조직이 이루어지고 하나의 굳건한 조직이 정비된 것입니다. 조직은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시스템이란, 어떤 일을 일정하게 질서 있게 해결하는 지렛대입니다. 이 시스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굉장합니다. 시스템은 인간사회를 안정적이고 발전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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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앙에도 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감성적이고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시스템적인 신앙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시스템은 바로 교리입니다. 교리라는 시스템을 장착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리분별을 하고 미혹되지 않으며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리 없는 신앙은 시스템 없는 사회와 같습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교회의 덩치가 커지자 바로 교회의 시스템 즉, 조직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조직의 중요성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5. 결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갈등이나 분쟁에 대한 사도들의 대처입니다. 사람 사회는 언제나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갈등을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은 초대교회에 일어난 갈등을 절대로 무시하거나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과 갈등이 발생했습니까? 그렇다면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어절 수 없는 일도 있지만 적어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시도는 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등의 크기에 관계없습니다. 적든 크든 갈등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작은 갈등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 그깐 일로 뭘 그리 고민하니?”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매우 사소한 일일지라도 어떤 이에겐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매우 작은 거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는 바람입니다. 그런 미세하고 가녀린 바람을 지나치지 않은 시인의 위대함이 엿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혼구원사역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영혼의 작은 소리, 작은 떨림, 작은 움직임, 호소, 눈물을 직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문제는 크게 보고 남의 문제는 작게 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와 정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름도 모를 불쌍한 소자에게 냉수 한 사발을 대접한 일을 기억하고 칭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표방하는 더욱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을 말합니다. 크고 위대하며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한 사람 한사람에게 친절한 것이 더욱 사랑입니다. 성도 간에 안부를 묻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더욱 사랑입니다. 교회를 찾아온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접대하는 것이 더욱 사랑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작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 더욱 사랑입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바로 교회가 이런 사랑, 헌신, 양보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로 왕성해짐을 바로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사랑을 먹고 더욱 번성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아리엘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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