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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8. 2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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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중생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그분의 은혜를 따라 그분이 명하신 말씀을 순종하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그러하고 예외가 없을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중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든지 지키고 싶지 않는 경우가 실제로 흔하다.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매우 궁금해 하다. 마치 기계처럼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여기는 과학적 사고가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학적 사고가 잘못된 것이라 굳이 여기지 않거나 맞다고도 말하지 않겠지만 그 사고가 경우에 따라 해가 될 수도 있고 득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기본적 자세는, 이 말은 자연적으로 누구든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고 싶어 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보기에 그것에 대한 해결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교리문답에도 밝혔듯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그분의 영광을 위하고 그분으로 기뻐해야하는 것이기에 그 기준이 말씀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본문이라고 되어 있다.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왜? 말씀을 지키는데 우리는 인색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심하다고 해야 할까? 또 아니면 원치 않는 것인지 몰라도 우리는 말씀대로 살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에 대한 답으로 타락한 본성을 들 수 있다. 원죄 아래 있기에 우리는 현저한 죄들을 범하고 싶어 한다. 이기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이런 삶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중생을 받았지만, 새 생명을 받았지만, 원죄인 타락성은 여전히, 즉 본성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경향과 성향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타락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죄의 종’이라 로마서 6장은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거스르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의의 종’이라고 말씀한다. 이 둘 사이에 신자라면 누구나 갈등하며 살아간다. 원인 파악은 되었는데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들다.
또 다른 답변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 중생한 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힘든 것 가운데 하나는 복잡한 교리들의 체계이다. 단순하지 않고 서로 얽혀있기도 해서 해석하기가 복잡하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명료하기보다 애매모호하다는 표현이 맞을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교리를 배우면 배울수록 머리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우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 같고 배우려니 복잡하다. 이 부분에 대해 이 글은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는 대표적 교리이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를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상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해하면 행하느냐는 식으로 꾸중을 듣는 경우가 있는데 바라기는 이해와 실천이 무관하다거나 관계가 있다는 얘기로 우리의 초점을 흩뜨리지 않고 진행하고 싶다. 또 다른 교리로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단성론 논쟁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예정론에 대한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끔 하는데 충분하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것도 있다면 이 둘을 어떻게 조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머리가 복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단순한 말씀인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도 복잡한 교리들을 성경에서 추출해 놓고 기독교인들만 아니라 비기독교들까지 아양과 조소의 대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인지 궁금하다. 복잡한 교리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치거나 배워야하는 당위성이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 보다 거짓된 자들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인 것이다. 복잡한 정보를 통해 참되고 거짓된 것을, 즉 옥석을 구별할 수 있다. 구별하기 위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지도자격에 있는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잘 규명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하면 따라가는 것도 일반 신자들의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잡한 교리들을 배워야하는 당위성의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모든 교리들은 성경에서 만든 것이다. 성경의 요약이라 봐야 한다. 성경을 신자들은 해석하며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간다. 성경을 해석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교리이다. 그 교리를 기초하여 체계를 세운다. 임의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미신적으로 빠질 수 있다. 해석에는 기준이 있는 법인데 그것을 위해 교리는 존재한다. 세 번째 이유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복잡하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한 교리를 통해 기독교인의 삶에 분명한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답변은 헷갈릴 것이다. 복잡한 교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보다 분명한 것을 알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답변이라기보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이것에 관해 좀 더 말해보도록 한다.
앞서 언급했던 복잡한 교리들이지만 중추적 교리들을 통해 우리는 그 의도를 깨달아야 하겠다. 교리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복잡한 것이고 애매모호하게 느껴지지만 인간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 관한 것이기에 복잡하더라도 이해가능하다.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분 앞에 서 있는 자신을 파악해야 그분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깨달으려고 한다면 당연지사 거울이기도 한 그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하다. 아니 이해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이해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는 교리는 이해를 위함이 아니라 인정을 위함이다. 풀이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항목들이나 교리들을 인정해야 인간에 대한 지식이나 교훈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지금까지 이해한 자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수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그분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분에 대한 서술이지 이해가 아니다.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이론을 통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하여 믿는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다. 시도는 영웅적이지만 실제는 아무런 효과를 발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정을 위함이라면 단순히 그분이 삼위일체라는 것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으로 인정하라면 입술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쉬운 것인가? 그분에 대한 지식을 인정하라는 것은 그 지식을 우리에 대한 지식에 늘 인정하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인정과 실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중생한 기독교인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에서 이 글이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지식이나 진리의 분명한 의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율법의 의도는 지키라는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존 칼빈은 말했다. 그처럼 그분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들은 신비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늘 우리의 삶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할 일은 그러한 지식이나 교리들을 이해하고 짜 맞추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지식에 따라 실천함에 있다. 실천함에 있어 올바른 것이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견주어 본다. 그 지식은 단순히 검증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이 있어야 우리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생은 그분의 영역이고 실천은 우리의 영역이다. 그분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역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또 ‘견인’(堅忍, perseverance) 교리가 있다. 끝까지 붙잡으신다는 그분의 ‘보존’(保存, protection)과 우리의 노력, 분투 또는 인내가 함께 있다. 그분이 보존하신다는 믿음을 늘 간직하면서 우리는 노력하고 분투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바른 길로 가는지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늘 상고한다. 성경은 한결 같이 그분의 말씀의 지침에 따라 살아가라고 명한다. 동시에 그분의 보호하심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내용이다. ‘견인’의 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궁금증이 풀린다. 하나님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두 영역을 연결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겨진다고 말하고 그 믿음을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의 영역은 우리의 실천이고 그분의 영역은 믿어야하는 대상이다. 이 두 영역의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이 명료해진다. 그래서 복잡한 교리를 통해 우리는 성경이나 그분의 교훈이 보다 명료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욱이 우리는 우리에 대한 지식, 즉 교리들을 배워서 실천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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