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설교는? 설교자들은 바른 설교를 갈망한다. 바른 신자들은 바른 설교를 듣기 원한다. 바른 설교는? 참된 교회의 기준은 도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도덕군자가 설교자나 담임목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외할 수 없지만 준거기준은 되지 못한다. 그 기준은 외형적 화려함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형교회나 수십억의 예산을 통해 건축된 교회당이나 화려한 프로그램을 갖춘 문화센터가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참된 교회의 기준은? 또는 표지는? 복음의 바른 전파이다. 복음을 바로 해석하여 바르게 전파하는 것이다. 또 바른 성례의 집행이다. 나의 관심은 후자보다 전자에 관심을 갖고 있기에 바른 설교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본다. 바른 설교가 참된 교회의 기준이기에 그 설교를 위해 테크닉(기교)을 배우는 습성을 갖는다. 그러한 기교가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기도 하기에 대부분의 설교자가 빠지는 유혹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른 설교와 기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떤 이들은 대형교회 목회자의 녹음된 목소리까지 흉내 내려고 한다. 어느 정도 효과를 보면 만병통치약 인양 너도 나도 흉내 낸다. 흉내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기하게 들리다가 자꾸 들으면 식상해 진다는 사실도 모르고 마냥 흉내 낸다. 설교의 기교는 바른 설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있다면 겨우 1%도 안되는 연관성일 것이다. 바른 설교는 성경의 바른 해석을 시도한다. 원어 성경을 통해 번역을 시도하고 분석하여 의미를 찾아내고 적용점을 찾으려 한다. 성경강해의 올바른 과정이다. 그래서 성경의 전체 맥을 찾아 멋있고 깔끔하게 설교하므로 듣는 이들에게 멋있게 보이는 설교를 장식한다. 이것은 강의이지 결코 설교는 아니다. 바른 해석의 설교는 한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바른 삶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이다. 기교도 아니고 바른 해석도 아니라면 뭣이란 말인가? 바른 설교를 위해. 이 두 가지다 요청된다. 필요하다. 충분조건으로. 바른 해석된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는 바른 삶을 살기 위한 설교자의 부단한 노력이 있을 때 또는 고민이 있을 때 바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주관적 해석에 빠질 수 있기에 부단하게 역사와 바른 해석된 주석들을 통해 점검과 검증을 받아야 한다. 검증된 말씀에 따라 진실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에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이런 적용이야말로 말씀의 능력에 큰 도움이 된다. 설교자 자신이 진리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과 진실한 마음의 추구가 없는데 말씀의 참된 의미를 직접적으로 찾아내긴 매우 어렵다. 간접적인 의미를 주석과 같은 도움으로 가능하다. 이런 도움으로 검증을 받고 검증된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런 후 대중에게 자연스런 적용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바른 설교는 복음적 해석을 기초한 말씀이 우선순위이다. 그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설교자의 열망과 갈증이 따라와야 한다. 그 다음은 대중들을 위한 또는 향한 바른 적용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바른 설교를 했다고 성령의 역사가 곧 일어난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바른 설교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위한 준비일 뿐 그것으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실망해서는 안된다. 성령은 바른 설교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을 뿐 그것에 얽매이지 않음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된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는 단순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말씀 없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진리를 전제할 수 있지 바른 설교를 통해서만 역사한다는 섣부른 판단은 금해야 한다. 바른 설교자의 자세는 설교자의 임무이다. 우리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물을 주고 가꿀 뿐이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준 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바른 설교는 참된 교회의 표지이다. 그 설교는 바른 복음적 선포, 대중들에 대한 사랑 및 설교자의 진실한 삶으로 가능하다. 어느 하나라도 배제되면 바른 설교는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