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진리는 불변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근거되어 있고 이 진리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희생을 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 카톨릭들은 이 진리를 감추기 위해 갖가지 고안된 의식들로 인해 감성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이 진리를 숨기고 일시적인 감성만으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이 거짓된 것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다해 글을 남기거나 전파하는데 전력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신뢰라 여깁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나갈 때에만 구원만 아니라 견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능동적이거나 주관적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기 않거나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즉 수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머리가 복잡해지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인데 믿음이 능동적이거나 자발적 또는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고 탁상공론과 같은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바라시는데 왜 믿음이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놀라운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산을 옮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믿음은 그분이 주셔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마냥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숙명론(宿命論)을 지지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상반적이고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명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믿음을 항상 우리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에 요구사항으로 여겨지고 능동적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믿음을 바라봅시다. 믿음은 신뢰라는 의미인 동시에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상대방의 신실함에 근거합니다. 그분이 약속을 지키시기에 우리가 믿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의 잘못과 오류를 참으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비 또는 인애라 명명합니다. 이러한 자비의 뜻 안에는 우리가 돌아오거나 회개하시는 것임을 신뢰하신다는 것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기 이전에 그분이 우리는 먼저 신뢰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믿음에 대해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지식을 근거로 하여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이 행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건이 되어 그분이 행동을 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도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뢰하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신뢰를 우리가 신뢰하게 될 때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어 우리에게 믿음이 싹트게 되고 사랑으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그분이 우리를 신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거나 믿게 됩니다. 이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즉 의지를 변화시키셔서 그분을 믿게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신뢰하거나 믿으신다는 것을 믿는 마음, 즉 의지를 가지도록 우리의 마음에 감화와 감동을 주십니다. 오 놀라운 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저 무릎을 꿇고 감사와 찬양만 나올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