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예술이라 할 때 둥근 천장(dome)과 모자이크(mosaic) 예술을 말합니다. 1,500년이 상 지나도 그들이 만든 모자이크 그림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찬란하게 빛납니다. 모자이크는 색깔을 가진 유리조각들을 붙여 만든 것으로 가까이서는 볼 수 없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한 조각씩 볼 때는 그 극치를 맛보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예술의 진정한 맛을 보게 됩니다. 행글라이더나 소형 비행기를 타고 장엄한 미국의 그랜드 캐넌 위를 지나면 그 웅장함에 누구든 찬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전망대에서 보던 웅장함과 전체를 볼 때의 웅장함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전체를 보았을 때 오는 충동은 세밀한 것을 볼 때와 사뭇 비교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또는 예배 때마다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식상(食傷)해지는 신앙생활과 예배를 느끼곤 합니다. 진정한 마음을 가져야된다고 다짐하지만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고자 여러 방법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도록 허락하신 대의(大義, cause)는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와 일반적인 이유로 나눌 수 있는데 개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에서 찾게 될 것이고, 일반적인 이유를 통해 얻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고 개인적인 이유만을 찾으면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분명한 일반적 이유는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읽는, 듣는, 그리고 지키는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느낍니다. 그분의 말씀이 현실로 이뤄질 때 우리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 즉 지식을 하나씩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희락과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말씀의 총체적인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죠. 편파적이고 단편적으로만 알게 된 복음의 진리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보다 더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총체적 진리를 배우게 될 때 나를 향하신 그분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총체적 진리를 이해하는 길은 조각적 진리를 하나씩 맞추어갈 때 가능합니다. 총체적 진리는 우리가 배우는 『기독교강요』를 통해 가능합니다. 오늘도 그 조각적인 퍼즐(puzzle) 진리를 맞추어 수정처럼 분명한 그분의 뜻을 알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