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생명의 성신의 법을 좇아 행함

김기찬목사(전주)

by 김경호 진실 2014. 10. 30. 10:45

본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생명의 성신의 법을 좇아 행함
김기찬  (한사랑교회 목사)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을 시작하자마자 교회가 일어서고 넘어짐이 달린 복음의 핵심 교훈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정죄함이 없다는 표현은 사도가 로마서 3-5장에서 힘써 전한 도리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도리를 가리킵니다. 개혁자들은 이 ‘오직 믿음’으로 중세 교회의 미신과 어둠을 뚫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거룩한 자태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역사는 오직 믿음으로 개혁교회와 개혁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기에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의롭고 거룩하고 선합니다만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안에서 다 행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율법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죄를 정(定)하는 것 곧 죄를 심판해 버리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로마서 7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롬 7:8)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구현한 하나님의 계명조차도 죄가 각종 탐심을 일으키는 데에 이용될 뿐이라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선한 것들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떠나서는 결국 죄를 더하는 방편으로 전락합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하지도 않았을 일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차라리 재주가 없었으면 생각하지도 않았을 그런 범죄를 꾀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이 세상에 그 누가, 죄를 이기는 것은 차치하고 죄를 조금 억제할 수나 있습니까? 중세 가톨릭교회의 미신과 악습이든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적 일탈과 도덕적 타락이 결국 ‘죄의 강력한 세력’을 반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개혁자가 중세 교회의 미신과 어둠을 이긴 일이든지 무릇 교회가 거룩한 교회로 서서 사명을 행하는 일에는 이 죄의 세력을 물리치는 그런 큰 능력이 요구되는데, 그 능력은 오직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그 육신에서 죄를 심판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형벌과 저주와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마다 ‘정죄함’이 없고 오히려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를 정죄할 수도 없고 송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주셔서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복된 소식을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신자가 죄의 권세를 이기며 사는 도리를 전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여기서도 다시 ‘그리스도 예수 안’이 나옵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와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생명의 성신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 실질이 로마서 8:4에 잘 나오지 않습니까?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성신을 좇아 행하는 신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삽니다. 이것이 곧 죄의 권세를 이기고 사는 실질입니다. 온 세상이 죄의 권세 아래서 신음합니다만, 성신을 좇아 행하는 신자는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율법의 요구, 곧 거룩한 사회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며 삽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한 사회를 이루며 삽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와 신자가 성신을 좇아서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능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께서 전부이시고 전부 안에 계신 세계(골 3:11)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성신을 좇아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실, 거룩한 사회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사는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은혜의 사실에 밀접히 붙여서 교훈합니다. 로마서 8:1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하고서 2절에 가서 “이는 .....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물론 성신을 좇아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사는 생활이 결코 의롭다 하심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 할 만한 사람을 불러서 그의 전 생애 가운데서 자기가 정말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골라서 내어놓으라고 해 보라. 그리고 그 일을 아주 자세하게 살펴보라고 해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에선가 육체의 부패한 냄새를 맡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의로운 행위를 추구하는 우리의 열심 완전치 못하며, 신속히 달려가야 하는데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14.9).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고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오직 그리스도의 공효를 겸손히 의지할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 점은 흔들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만, 그러면서도 사도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신자라면 틀림없이 성신을 좇아 죄의 권세를 이기고 거룩한 사회로 서서 사는 법이라고 교훈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거룩한 교회의 지체로 살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형제를 위하여 목숨 버리는 것을 마땅한 일로 여기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용서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기이한 사랑을 아직 제대로 맛보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한낱 사람 스스로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으며 어떻게 형제를 위하여 목숨 버리는 것을 마땅한 줄로 여길 수 있습니까? 죄인 스스로 어떻게 율법의 정신이 구현되는 세계를 알고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세계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신을 의지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길은 오직 ‘은혜’로만 접어들고 또한 걸을 수 있습니다. 한낱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행하는 교만한 마음, 스스로 무엇을 이루려 하고 스스로 무엇이 되려는 태도를 완전히 부인하는 교회에게만 그 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얼마 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차기 대선을 위하여 동성혼인 합법화를 추진한다는 기사를 다들 접하셨을 것입니다. 이보다 율법의 요구를 짓밟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을 사람이 감히 짝지우려 하는 무서운 도발이고 게다가 그것을 합법화하려는 두려운 반역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동성애가 어떻게 신성한 혼인과 결합될 수 있으며, 게다가 그것이 어떻게 합법한 규례가 될 수 있습니까? 배도의 물결이 더욱 높아만 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두려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거룩한 자태는 실로 시대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성신을 좇아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일은 거대한 파도를 뚫고 나가야 하는 우리 교회들에게 더욱 절실합니다.

 

 

 

 

http://www.sybook.org/sub5_newsletter.asp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