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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버리심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4. 11. 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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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버리심  

영혼을 버리심(28-30)


'이 일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28)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은 아마도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긴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다'는 것은 대속으로 인한 속죄함과 자기 백성에 대한 죄 용서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회복의 기초가 놓임 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죄와 관계의 깨어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남으로 세상에 임하게 된 비정상적인 상태였습니다.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인 관계를 인간이 깨뜨림으로써 초래된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은 마귀가 인간을 살해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8:44참조). 즉 마귀가 인간 생명을 죽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자기의 영적인 죽음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대속의 피를 흘려 죽으시는 자리에 처하심으로써 해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실 것을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에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 곧 마귀의 통치권을 깨뜨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게 됨으로 이루질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된 순간이 왔으니,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예수님은 아셨고, 그래서 복음서 기자도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모든 예언했던 구속사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관절 이 마지막 순간에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것이 그대로 이행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런 점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시편 69:21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편 61편은 다윗의 시라고 머리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21절에는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며'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생각해 보면 고통을 더하기 위하여 원수가 쓸개를 음식물로 주고, 목마름에 고통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마취제로 목마른 자에게 초를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갈증으로 목이 마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초가 된 포도주를 주면, 그것이 해갈하는 것이 아니라, 입과 목과 내장이 더욱 아리고 고통스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벗어진 살갗에 초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원수들이 다윗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원수가 다윗에게 야기시키는 아픔을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원수가 다윗을 비웃고, 하나님 섬겨 금식하고 애통하는 다윗을 오히려 비웃고 욕하는 자들로 인하여 다윗이 아파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말하는 아픔의 표현입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표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과연 이런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요한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면서 예수께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말합니다(눅23:36-37). 누가복음에서는 신포도주를 준 것이 예수를 경멸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혹자는 이 신 포도주는 마취제용이 아니라, 군병들이 마시는 독한 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군병들이 자기들이 마시는 술을 예수께 올려 주었다면, 군병이 예수를 동정해서가 아니라 '에라 너도 한 잔 마셔라'는 투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의 경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그들의 잔인하고 비웃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하는 인간들의 잔인함과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이러한 인간의 잔학성 곧 마귀의 정신을 가진 인간의 '마수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런 외침을 외치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심을 통해서 인간이 그렇게도 하나님께 완악했음을 드러내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이렇게도 완악한 존재임을 계시해 주는 사건입니다. 18장 끝부분에서 여기서까지의 문맥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 빌라도의 발아래 항복해버린 자칭 거룩하다는 유대인들, 옷을 나무며 독주를 마시며 비아냥거리는 군인들, 이들의 위세에 눌려서 가슴만 치는 대중들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진리를 모르기에는 한결 같습니다. 유일하신 진리는 십자가 위에 달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진리를 모르는 죄성 곧 마수성에 빠져 있습니다. 온 세상은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요한복음의 이 부분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를 모르는 이 세상과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인간으로서 볼 때에 이런 대비 속에서 제외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진리에 무지했던 죄성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십자가 아래서 이와 같은 한 사람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신 또한 이런 마수성을 가진 인간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는 인간에 대하여 할 말을 잃는 사람, 그리고 가난해지고, 애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과 자신에게 선함이 있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지성의 우월함, 도덕적인 우월함 따위로 자신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신도 마귀가 가진 마수성을 가지고 있고, 진리에 대하여 무지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야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참 기독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시자 악한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솜에 적셔서 갈대에 꿰어서 예수님의 입술에 닿게 올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받으셨다'는 말은 위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부탁하신 대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한 말이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요한이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여서 모시고 봉양하면서 살았다는 말과 똑 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신 포도주를 받아 잡수신 후에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면서 머리를 숙이고 돌아가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몇 가지 질문이 제기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졌던 마지막 만찬에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22:18)라고 한 말씀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고난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 실제로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 문자적인 의미에 초점을 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자,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신 후에 그 영을 버리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그저 받기만 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에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정황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받으시고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계시역사적으로 생각해 보는 견해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에 도착했을 때에 군병들이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몰약을 탄 포도주;막15:23,마27:34)를 제공했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신 포도주를 갈대에 꿰어 마시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마시기를 거절하였지만, 십자가를 지신 후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그것을 받아 마셨다고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는 순간은 모든 것을 이루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위의 견해들을 평가해 봅시다. 첫 번째 문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유월절 음식으로서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십자가에서 한 사람이 올려 준 신 포도주와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마지막 만찬으로서 끝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후에는 자신 이룬 유월절을 성령으로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유월절은 마지막 만찬으로 끝 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격의 유월절 포도주와 십자가 위에서 준 신 포도주와는 비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예수님은 옛 유월적인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대속의 고난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견해가 일반적으로 쉽게 고려되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절정은 결국 예수께서 아버지의 버림을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 포도주가 육체적 고통을 약간 감소해 준다고 가정해도, 그 감소가 고통 감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포도주가 육체적인 고통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고통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포도주가 고통을 감소시킨다는 생각이 타당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피를 다 흘려버린 상황이라서 입도 목구명도 바싹 마른 상태인데, 솜에 적셔진 신 포도주가 고통을 감소시킬까요? 오히려 시어진 포도주는 고통을 더해 주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할 때에 포도주의 기능이 고통을 감소시킨다는 것은 맞지 않는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고통을 감소시키지 않고 온전히 받기 위해서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는 생각은 그다지 알맞은 생각이라고 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깊이 숙고해 보지 않고 집어넣은 생각이 아닐까요?  


셋째,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하여서 신 포도주를 받기는 했지만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정황상도 그렇고, '받았다'는 말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에, 받기는 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헬라어를 보면 '마시게 했다'는 말이 미완료형 주동사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솜에 흠뻑 묻은 신 포도주를 빨아 먹을 수 있도록 올려 주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솜에 적셔서 올려 준 신 포도주를 먹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같습니다. 이것은 골고다에 도착하여서 마시도록 군병들이 주었던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따라서 저는 계시역사적인 설명이 타당성이 있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정황상 3번째 설명이 옳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네 번째 설명을 타당성 있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e;laben)고 하는 말은 위에서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받아들였다는 말과 같은 시제의 말이 사용되었습니다(직설법, 과거형, 능동태, 3인칭, 단수). 이것에 비추어 보면 예수께서는 해융에 적셔서 올려주는 신 포도주를 잡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잡수신 것은 계시역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역사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주는 축복의 상징(노아)이요, 또 약속성취의 상징입니다. 즉 이스라엘 역사에서 포도주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대표하는 식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가 대속의 죽음으로 죄사함 즉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복이 세상에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뜻에서, 신 포도주지만 그것을 마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유월절과 같은 축제의 포도주도 아니요, 원수들이 경멸하는 뜻으로 주신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모든 약속을 이루고, 하나님의 복을 이 세상에 가지고 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는 뜻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다 마신 것으로 이해해 봅니다. 그렇게 한 후에 운명하신 것으로 이해해 봅니다.  이렇게 하여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늘의 복을 가지고 오게 하셨습니다. 사죄와 영생을 믿는 자에게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처럼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되었으며, 새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머리를 숙이시는 것은 숨 곧 육신의 생명력이 끊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는 말은 '그가 영혼을 버리셨다'(30- pare,dwken to. pneu/ma)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는 번역은 영혼이 주어가 되어서 스스로 떠나가는 자동사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혼을 버리셨다'고 하면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영혼을 버리신 것이 됩니다. 따라서 동사는 영혼을 목적으로 하는 능동태 동사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동사가 바로 과거형 능동태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영혼을 버리셨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버렸다는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요13:21). 주체적으로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예수께서 자기 영혼을 버렸다고 읽었습니다. 이렇게 읽는 것은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취할 권세도 있느니라'고 한 말씀과도 부합합니다. 아무도 이런 주권을 가진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 홀로 자기의 영혼에 대하여 주권을 가진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 분이니까, 아버지의 손에 자기의 영혼을 위탁하였다가 다시 취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이 사랑과 존경으로 서로 동등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으실 때에도 자신이 이러한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실을 다른 복음서에 보면 처형장에서 군인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고백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5:39절에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로우신 신성이 백부장에게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이방인 백부장에게 그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구원이 주어질 것은 보여주는 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이 그 언약과 계시적인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민족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방 온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들일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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