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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배반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4. 11. 1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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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배반  

유대인의 배반(18:38하-19:16)
빌라도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놓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나아가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한 그리스도를 놓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18:38-39).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바라바와 예수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강도보다 더욱 악한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자기 궁전에 들어가 예수를 채찍질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또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이런 일들은 물론 유대인의 왕을 조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때린 것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따라서 여기서 씌운 가시관은 왕관을 대신하고, 자색 옷은 왕이 입는 위엄스런 긴 옷을 대신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죄를 찾지 못했음을 천명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의 처리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넘기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를 본 대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너희가 데리고 가서 못 박으라고 하면서 자기는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신성모독죄로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8-9).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하면서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서 '너는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혹시 신적인 자를 잘못 건드리면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이런 물음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빌라도를 통해서 자신이 넘기움을 받을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내게는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데, 네가 말해주지 않느냐'고 타박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런 권세가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런 권세를 빌라도에게 이미 주셨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20:11)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넘겨 준 자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온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를 대표하는 믿지 않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버리고 세상을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넘겨주어서 죽도록 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형식적으로 법적인 집행인이지만, 유대인은 자기들에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팽개치고 자기들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도록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으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배반자요, 알면서도 메시야를 넘겨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죄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단순히 메시야의 죽음에 가담하게 된 빌라도보다 더욱 죄가 큰 것입니다.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죽이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자기들에게 왕이 없다고 외치면서,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를 죽이지 않으면,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압박하는 유대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12-16).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와 유대인의 행위를 대조하면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한 짓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정치인이 정치적인 유익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위해서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는 정치적인 안정이 그가 존재하는 지상 목표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안정이 지상 목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상 목표는 하나님이요, 또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을 자기들에게서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의 대속을 이루시는 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궁극적 목표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진리요,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존재 목표를 부정하고 이방인에게 메시야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배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죄는 이방인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큽니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한 이스라엘의 모습 역시 지극히 정치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로마 가이사(황제)를 원수라고 생각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죽이도록 빌라도를 압박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왕은 가이사밖에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가이사를 이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위 가야바를 대 제사장에 앉히고 뒤에서 세력을 잡고 유대 사회를 조종했던 안나스 역시 엄청나게 정치적인 간계가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하에 놀던 유대인 관원들과 바리새인들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진리를 따라서 살지 않고 정치적으로 사는 사람은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제사장들과 종교 전문가인 유대인들이라도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이방인 빌라도와 같이 진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진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 없으며, 결국 인간의 힘과 세력과 이권을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이런 것들이 그들 존재 이유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은 우리 인간과 예수님을 구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궁극적인 진리 자체이신데, 인간은 진리에 소경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잘 해야 진리를 깨달아 아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잘 믿는 자라도 불완전하여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진리를 버리면서, 그렇다가 돌이키고, 회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모르는 자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가 아닌 어두움의 세력과 가장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싸울 수 있고 또 이길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비진리와 싸워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은 바로 이러한 싸움과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한 예수님의 싸움과 승리는 인간 누구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요,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과 우리 인간은 구분이 됩니다. 진리를 몰라서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진리를 안다고 하지만 불완전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온전히 진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진리이신데 반해, 믿는 자는 예수님을 진리라고 고백하는 자일 뿐입니다. 신자는 은혜를 고백하는 사람일 뿐이요,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원천입니다. 이 구분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에, '유대인 대제사장이나 지도자들을 욕할 것만이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게도 그들과 같은 불완전함과 죄성이 함께 있음을 보기 때문에 '그들을 욕할 자격이 내게 없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단지 그들과 내가 다른 것은 그들은 눈이 어두워서 회개할 줄 모른 채 완고한 길로 갔지만, 나는 은혜를 입어서 진리를 보면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가야바나 안나스 같은 사람 혹은 빌라도 같은 사람이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들도 용서하시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신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도 마찬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아무리 큰 죄를 짓던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각종 비리와 권력과 돈에 눈이 어두워서 죄악에 빠져 있다고 생각 되는 교직자들도 내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는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종국을 기다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인간적으로 부족하며 결함이 많았던 사람들도 그래도 믿는 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짐이 되고 있는 사람들도 내려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보니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도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그들이 준 아픔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아픔을 용서하고 이제는 지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마음에 생각나곤 하겠지만 이제는 '사람이 다 그럴 수밖에 없구나'라고 하면서 나도 아픔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판단자와 같은 자리에서 내 자신이 좀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경계한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인간인 나는 이런 것에서도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런지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이런 모습이 옳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회개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하지만 주님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때에 그 힘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죄악의 흔적으로 인한 영혼의 아픔을 치료하는 길은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베푸신 은혜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는 옛날의 은혜를 현재의 우리 것으로 우리 심령에 되살리십니다. 그래서 영혼의 치료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인 방법으로는 영혼의 아픔을 치료할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비 뽑는 군병들과 십자가 위의 예수님(17-27).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었던 겉옷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군병들에게 주어졌고, 통으로 짜여진 속옷도 제비 뽑아 한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를 십자가 위에 못 박아 놓고 밑에서 군병들은 이런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인간상입니까?  이 일을 사도 요한은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했던 말씀을(시22:18)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오래 전 이스라엘 왕 다윗의 역사 속에서 했던 말이 예수의 생애에서도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역경 중에서 했던 말이 예수의 역경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역사 속에서 했던 말이 예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도록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옛 역사는 미래에 예수와 신약 교회의 일을 예언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시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에 십자가 위에 달려서 피를 흘리면서 고통하고 계시던 예수님은 자기를 쳐다보고 서 있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리아 옆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두고 마리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리아에게 '이제부터 요한을 아들로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요한에게도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에게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서 모시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과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이종사촌이기 때문에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종사촌 동생 요한에게 맡겼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일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자기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를 자기의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가족을 넘어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족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교회 가족을 육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살 수도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도 교회 가족에 대하여 이와 같이 성숙한 이해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여건상 요한이 한 것과 같이 어려운 교회 가족을 돌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1차적인 의무는 자기 육신의 가족을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도 육신적인 가족 못지 않는 가족이라는 정신이라도 가져야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서로를 가족으로 돌아보며 함께 살아가는 일을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의 옷을 나누는 군병들의 정신을 가진 교회라면 그것은 악마의 정신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자본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지면 악마의 정신에 빠져서 예수의 옷가지를 갈라먹는 일을 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단자들의 대체적인 특성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정신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빠져서 진리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으면 주께서 교회가 가는 길을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은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하고, 은혜를 구하며, 회개의 정신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판만 하면서 경외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지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다툼을 야기시킵니다. 하지만 신앙은 경외하게 하며, 기도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지식에서 나온 것인지, 신앙에서 나온 것인지를 잘 살펴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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