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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차. 순전하고 바른 믿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3. 2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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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차. 순전하고 바른 믿음


 

 

 

본문: 17:10-14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 피신과 동행자들


 

 

 

비록 3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의 열매들을 얻습니다. 이때 회개한 사람 중요한 사람은 데마(딤후4:10),와 아리스다고(19:29, 4;10), 그리고 세군도(20:4)와 가이오(19:29) 등으로 추정합니다. 이들은 바울이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전도를 하기가 어렵게 되자 바울 일행을 급히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일에 동참합니다.


 

 

 

바울은 아쉬운 마음이 있어서 떠나기 싫었지만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미 야손이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면서 도시의 읍장에게 바울과 그 일행을 도시에서 내보내겠다고 다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일행들은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훗날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런 상황을 빗대어 바울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성도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사람이라거나 혹은 바울은 돈 많은 귀부인 등에게서 받은 돈만큼 일하다가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돈벌이를 하러 간 삯꾼 목자등으로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살전 2:17에서 자신을 이렇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베뢰아라는 곳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이그나티우스 대로를 따라 데살리를 거쳐 아가야 지방에 이르는 약 100km 정도 떨어진 지역입니다. 보통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의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도로에 인접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베뢰아는 도로에서 한참 떨어진 산골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런 지역을 택한 이유는 당연히 끈질긴 유대인 방해자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도 안전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13절에 보니 끈질긴 유대인들은 이곳까지 쫓아와 소동을 피웠습니다. 1차 선교 때에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 소란을 피웠듯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점을 미루어 우리는 사단의 세력을 너무 깔보아선 안 됩니다. 그들은 몸에 베인 고기 냄새처럼 끈질기게 우리 몸에 달라붙어 냄새를 피우는 존재입니다.


 

 

 

2. 베뢰아 사람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작은 산골 마을에도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베뢰아에서도 회당에 들러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민족정신 강한 민족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민족정신은 자신들이 유일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라는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은 연약하여 핍박을 받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랑민 신세라 해도 반드시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세워진 정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계 어디서든지 성인 남자 10명만 모이면 회당을 지어 안식일 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 건국한 이스라엘이라는 현대국가를 유지하고 지키는 밑바탕이 됩니다.


 

 

 

196765일부터 610일까지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동맹군 12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을 ‘6일 전쟁이라 부릅니다. 당연히 열세였던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이었지만 개전 4일 만에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와 요르단 서안지구와 골란고원을 점령하는 쾌거를 올리고 6일 만에 아랍연맹군이 항복을 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절대 열세였던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승리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정신력의 문제였다고 진단했습니다. 한 예로 뉴욕에 같이 유학 온 이스라엘 학생과 아랍 학생이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이스라엘 학생은 즉시 짐을 싸고 조국으로 돌아간 반면에 아랍 학생은 혹시 자기에게 징집 명령이 날아올까 봐 일주일 동안 미국의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고 합니다. 작은 차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점점 애국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애국심 운운하면 마치 케케묵은 옛날 책 이야기나 초라한 한 늙은이의 잔소리 쯤으로 치부합니다. 얼마 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을 두고 어떤 젊은 평론가가 토가 나올 뻔 했다하여 시끄러웠습니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두고 토가 나오면 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조국은 어떤 조국인지 궁금합니다. 애국심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정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강한 민족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 정확히 말하자면, 베뢰아에 있던 유대인들이 다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정보를 얻습니다. 11절을 보니, 베뢰아 유대인들에 대한 평가가 소개됩니다.


 

 

 

첫째, 너그럽다고 했습니다.

- 영어로는 형용사로 noble입니다. 뜻으로는 고귀한, 고결한, 명예로운, 당당한등이 있는데 이것을 옛날 성경은 신사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이런 뜻 외에 순전한혹은 편견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알다시피 베뢰아는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산동네입니다. 데살로니가처럼 대도시가 아닙니다. 비록 대도시 사람들처럼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부족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도시문명에 때 묻지 않고 순박합니다. 종이로 치면 하얀 도화지 같습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말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어떤 편견도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식과 경험이 편견을 만듭니다. 편견은 왜곡을 낳습니다. 편견은 색안경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아사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특히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꾸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서 예고한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은 유대인이 보기에 자기들이 오매불망 고대하는 메시아를 깎아내리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렬하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높은 자리에 있는 고관대작들이나 지식이 출중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천사를 보내시지 않으시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고지했습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선입견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선입견도 없었기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둘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 ‘간절한 마음으로는 영어로 ‘with great eagerness'입니다. 우리말로 큰 열심으로입니다. 하나님은 열심을 품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열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부터 간절함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천하태평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노래하는 하여가인생입니다. 마음에 중심이 없으니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됩니다. 또 이런 사람은 베짱이 인생입니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배 째라하고 누워버립니다. 워낙 게을러서 미래를 준비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되는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간절한 마음, 애타는 마음, 불같이 뜨거운 마음, 열심을 품은 마음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여가 인생들이 유일하게 열심을 내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노는 일에는 누구보다 땀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오직 육체의 정욕을 불사르는 일을 위해 뜨거운 금요일 밤을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게으른 사람들의 자리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열심을 품고 일심으로 푯대를 향해 달음박질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도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리가 없다일심가를 부르는 사람의 간구를 듣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치열하게 삽니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엄중히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를 경계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엄격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세우고 높이고 아량과 관대함으로 배려하는 것입니다.


 

 

 

셋째, 받은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였습니다.

- 우리는 간혹 순전한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착하니까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 놓고 그리스도인들을 속이고 함부로 대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들은 우리가 순전하니까 잘 모를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순전했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혜는 분별하는 힘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분별하지 못하면 늘 실패할 것입니다.

-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옳은지 그른지를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가지고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examine, 시험하다로 표현했는데 바울의 주장을 성경이라는 시금석에 비추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어떤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수용할 때 매우 진지하고 신중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범입니다.

- 하나님은 가벼운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지 않습니다. 가벼운 사람은 책임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나 문제에 대해 깊이 상고하지 않습니다. 특히 진리의 문제는 인생들에게 가장 근원적이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멸망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진리보다 현실을 더 중요시여깁니다. 영적인 삶보다 육신의 삶을 더 우선시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빛처럼 밝으면서 동시에 진지합니다. 진지한 사람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분석하고 비교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자 하나님께 그일라를 도와주어도 되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400명의 동지들이 반대의 뜻을 표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뜻을 되묻습니다. 다윗의 신중한 자세를 엿보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자기 지파의 주민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즉시 돕는 것이 상식인데 다윗은 돕는 일에도 기도합니다. 아마 베뢰아 사람들도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3. 전도의 결과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파한 결과 많은 이들이 믿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습니다’(12). 대부분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가운데서도 극히 소수의 유대인들도 회심합니다. 이때 신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는 부로의 아들 소바더(Sopater)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7년 뒤에 베뢰아교회에서 파견한 사자의 자격으로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까지 수행했던 사람입니다(20:4). 만일 그가 롬 16:21에서 바울이 나의 친척이라고 부르고 있는 소시바더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베뢰아에 있던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영접한 새 신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한편, 바울이 이렇게 베뢰아에 머무는 동안 이제 갓 태어난 데살로니가교회는 상당한 고초를 겪습니다. 살전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는 만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으니”(1:6)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2:14)


 

 

 

한 마디로 데살로니가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을 정도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었고(1:7), 이 믿음의 소문이 온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데살로니가교회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자 교회의 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바울 일행의 뒤를 쫓습니다. 설마 했지만 그들은 이곳 베뢰아라는 작은 산골 마을까지 추격했습니다. 얼마나 악을 행하는 일에 끈질긴 악인들입니까? 선을 행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을 다했다면 하늘의 축복이 임할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즘 주변에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집집마다 거리마다 진을 치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보다 더욱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축호전도하고 가정전도를 합니까? 그러나 저들의 열심은 결코 옳은 열심히 아닙니다. 저들의 행위는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서 잘못된 하나님을 전파하는 것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외국에 가서 대한민국이 일본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용하던 마을에 소동이 일어나자 베뢰아 사람들은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판단합니다. 바울도 이들의 신중한 결정에 동의합니다. 대신에 베뢰아의 새신자들을 위해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두기로 합니다. 베뢰아 교우들은 바울을 해안으로 데리고 가서 아가야 지방에 있는 아덴으로 갔습니다. 지리적으로 베뢰아와 아덴 사이에는 테살리 지방이 있었는데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 판단하여 바울을 아덴까지 호위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책임감이 돋보입니다. 아덴에 도착하고 나서 이들은 디모데와 실라에게 빨리 합류하라는 바울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다시 베뢰아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이 얼마나 신중하고 진지하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인가를 조망하면서 이들의 신앙과 삶으로부터 좋은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4. 맺는 말


 

 

 

오늘은 작은 산골동네에서 일어난 복음의 전도와 복음을 방해하는 일들을 다시 보면서 언제나 복음전도 앞에는 방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각인하고 다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번잡하고 혼란스러워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전도의 사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우리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복음은 어둠에게 빛을 알리는 일이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요,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이요, 연약한 자를 강건케 하는 일이요, 슬픈 자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요, 억눌린 자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일이요, 차별받는 자에게 공평과 평안을 주는 일입니다. 어찌 이 좋은 일을 나누어 주는 일을 우리가 중단할 수 있습니까? 말로만 복음 전도한다고 하지 말고 새로운 한 주간 열심히 복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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