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주차. 우상숭배의 땅, 아덴
본문: 행17:16-34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6-18)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4-25)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로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 하니라”(30-31)
1. 아덴에서
오늘의 배경은 아덴, 오늘날의 아테네라는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의 3대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아덴입니다. 그중 아덴은 비록 로마에 복속된 도시이지만 헬라문명의 중심지로 워낙 유명한 도시이기에 실제로는 거의 로마로부터 독립된 도시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아무리 로마제국이라 해도 아덴의 수준 높은 문명과 철학사조, 그리고 지식인들의 품격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 도시는 주전 5세기경부터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 문명을 헬레니즘이라 합니다. 헬레니즘의 중심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도텔레스, 에피쿠로스 등 쟁쟁한 철학자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만큼 아덴의 시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습니다.
헬레니즘은 발전된 문명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헬레니즘을 전수 받고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해서라도 헬레니즘의 세상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탄생한 제국이 헬라제국입니다. 비록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헬라제국은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헬라어와 그리스문명의 전파는 로마제국을 헬라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도시의 헬라화입니다. 헬라화된 도시는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예로 원형 경기장과 대형 극장, 음악당(오데이온)을 기본으로 로마사회의 특징인 목욕탕이 들어서고 그리고 장터(로마광장)와 신전이 건설되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1차적으로 신전이 있고 그 다음에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지배층의 구조물이 들어서고 그리고 일반시민들의 공간으로 채워집니다.
특히 아덴에서는 아테네 여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아 로마의 유명한 신들을 총집합해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이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머큐리신, 박카스, 쥬피터, 다이아나, 비너스 신들이 숭상되었습니다. 이외 로마의 여신들과 만신전(에릭테리온)과 로마 초대황제를 모시는 신당 등이 즐비해 한 마디로 ‘신들의 도시’라 해도 과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페트로니우스라는 시인은 ‘아덴에서는 사람보다 신을 찾기가 더 쉽다’고 꼬집었습니다.
2. 세 가지 이야기
첫째, 당시 문명의 특징들과 철학사조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신들을 다 모아 놓은 곳이 아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들 신들에 얽힌 신화들은 거의 에로이즘이었습니다. 거의 90% 이상이 에로틱한 신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과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를 대변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문화의 배경에는 오직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존재했습니다. 이 학파의 시조격인 에피쿠로스(주전 341-271)는 인간의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보고 당시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사람들의 자유를 억제한 스토아학파와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신은 인간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거나 동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심이나 두려움, 질병 등에서 구원받는 길은 육체의 정욕을 불사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혹하여 난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잘못된 사상 하나가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역사를 통해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대립했던 학파로 ‘스토아학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사물이 신이라는 범신론을 믿으면서도 인간의 고귀한 품격을 위해 악한 육적인 삶을 포기하고 형이상학적인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선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금욕을 통해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향인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결국 이들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입니다. 이들의 아류가 나중에 영지주의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두 학파가 서로 달랐지만 한 가지만은 입장을 같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후 세계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심판이나 지옥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에는 기겁하고 반대했습니다. 이런 부류들이 역사에서 사라졌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영국의 무신론자협회를 이끄는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사람은 버스 광고판을 통해 ‘하나님은 없으니 인생을 즐기라’고 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에피쿠로스학파의 현대판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보고 ‘종교심이 많다’(22)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데이스다이온’이라 했는데 이 말은 긍정적으로는 ‘경건하다’이고, 부정적으로는 ‘미신적이다’로 풀이됩니다. 오늘 아덴 사람들의 경우엔 후자로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2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보통 우상숭배자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좋아합니다. 더 웃기는 것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신을 새긴 단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산 청수장 둘레길 입구에 사찰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절인지 무당 굿하는 곳인지 잘 구분이 안갑니다. 모양은 그냥 보통 쓰레트 지붕을 한 집인데 머리 깎은 분들이 들락거리고 부처님 오신 날을 1년 내내 기념하는 연등을 메달아 둔 것으로 보아 절간 같기도 하고 어떤 때엔 무당굿을 하는 것을 보면 무당집인 것 같기도 하고 장독대 위에 줄을 쳐놓고 붓글씨를 하나씩 써서 깃발처럼 걸었는데 글귀들을 가만히 보니 소산, 대산지신이 있고 대호지신 등 온갖 잡신들의 이름을 써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정통 불교 같아보이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곳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심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덴 사람들처럼 미신에 푹 빠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장독대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어떤 날은 바위 밑에 앉아 소원을 빌고 어떤 날은 굿을 하며 귀신을 불러 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의 아덴이라는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실로 우상숭배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상은 한 마디로 ‘알지 못하는 신’입니다. 인간이 왜 ‘알지 못하는 신’을 찾고 그 우상의 도움을 바라고 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종교심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도탄에 빠진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 유일한 절대자가 하나님인데 눈이 가리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만들어 낸 우상을 하나님이라 여기고 그를 섬기고 숭배하는 결과를 맞이한 것입니다. 실제로 2세기경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라는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아덴에서 발굴된 한 제단에서 ‘미지의 신에게’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본 그때의 아덴의 모습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문명도시이면서 아울러 최고의 우상숭배를 할 만큼 미신적인 도시가 바로 아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떻게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 산다는 최고의 화려한 도시에서 최고의 미신행위가 공존하다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인간의 미신행위는 지위고하와 학력고하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얼마나 스스로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이며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력자인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덴에서의 바울의 복음전도의 방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아덴에서 세 곳의 장소를 택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는 유대인 회당이고, 다른 하나는 장터이며 세 번째는 아레오바고라는 법정입니다. 회당이 있었다는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한다는 것이고, 장터를 택한 것은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며, 법정으로 끌려가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는 것은 최고의 지식인들을 향해 참 진리가 무엇인가를 변증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바울이 아덴에서 사역을 하기 전에 바울은 도시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습니다(16). 이것은 의로운 분노입니다. 악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의롭지 못한 일을 목격하고서도 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의분이라고 해서 폭력을 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비폭력주의자입니다. 어쨌든 마음에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충만한 바울은 회당과 거리와 법정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과 있는 힘껏 변론하고 쟁론하고 변증합니다.
- ‘변론하다’는 영어로 ‘reasoned'인데 이것은 이성적으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마 같은 유대인이고 서로 구약성경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이 있었으니까 좀 더 차분한 가운데 복음을 진술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 그런데 장터에서는 사람들과 ‘쟁론했다’고 말합니다. 영어로 ‘dispute'인데 이는 논쟁을 벌였다는 뜻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말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말쟁이‘(18)라 폄하하고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끌고 갑니다(19). 왜 끌고 갑니까? 18절과 19절을 보니 바울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등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가르침’(19)을 전했기 때문에 이것을 법정에서 따져보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세상의 지식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고 새로운 지식을 전하는 자를 존경합니다. 그래서 혹시 바울에게서도 그런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바울을 법정에 강제로 세운 것입니다. 20절을 보세요.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의 설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사도행전에는 총 9편의 바울의 설교가 소개됩니다. 그중 나머지 8편은 오직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설교라면 오늘의 설교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즉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세 번째로, 바울의 설교의 내용과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22-31)
1) 설교의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니 바울의 설교는 그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잘 준비되고 기획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이 유대인이 아니라 고위관리들과 그리스 철학가들을 비롯한 식자층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둡니다. 지금 아레오바고라는 법정에 바울을 세워두고 저가 어떤 말재주로 우리를 능가할지 팔짱을 기고 지켜보는 아덴 사람들이 그려지십니까? 이것이 교만해 빠진 세상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 이런 콧대 높은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바울은 시작부터 아덴 사람들의 허점을 잘 파고듭니다. 22절과 23절을 보세요.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맹목적인 종교성과 우상숭배를 지적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참신을 소개하겠다고 나섭니다.
2) 그런 다음 24-27절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은 손으로 형상을 조각하지만 하나님은 조각 같은 것으로 표현하실 분이 아닙니다.
- 또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은 우상에게 제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제물이 필요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입니다. 생명의 주재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생명이 주어진 것은 호흡으로 나타납니다. 생명이 다하면 호흡이 중단됩니다. 호흡이 우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면 과연 이 호흡을 인간에게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자기 지식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아덴의 교만한자들에게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다음으로 바울은 인간세계의 근원을 언급합니다. 인류는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서 한 혈통임을 밝힙니다. 나아가 인류는 하나님의 섭리로 온 땅으로 흩어져 각자 경계를 정하여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전반부인 1-11장의 이야기를 축약한 것입니다. 이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류사랑을 외치는 그리스 철학을 염두에 둔 것일 것입니다.
-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여기서 바울은 다른 설교와 달리 구약성경을 단 한 줄도 인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눈높이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세상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성경의 지식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영적으로 어린 사람에게 고차원적인 신앙지식을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영적 사투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모든 이야기를 비유로 풀어 주셨습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 쉽게 풀어 설명합니다. 눈높이 에 맞추어 복음전도를 하는 지혜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4) 성경을 인용하는 대신에 바울은 청중들이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시인들의 싯구를 인용합니다. 그것이 28절입니다. 바울은 두 사람의 시를 소개합니다.
- 하나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입니다. 이것은 헬라의 시인이며 크레타 섬의 현자로 알려진 에피메네메스의 시구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인데 이것은 클린티스라는 시인의 ‘조부의 찬양’이라는 싯구입니다.
- 바울이 이 시인들의 시를 인용한 것은 지금까지 행한 바울의 설교 방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방식입니다. 그렇게 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실제 생활과 관련된 사례를 들어 청중들의 반응과 흥미를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기술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아덴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 시인들이 읊은 시들이 실제 아덴 사람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와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가 굉장히 잘못된 것임을 변증하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인들마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5) 이제 바울 설교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그것이 29-31절에 있습니다.
- 먼저 29절에서 바울은 앞부분에서 행한 변증의 결과로 하나님은 새긴 우상과 다른 존재임을 선포합니다. 한 마디로 변증의 승리입니다.
- 나아가 30절에서 이제 알았으면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 그리고 31절에서 자연스럽게 구속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이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구원할 단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 길은 예수이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설교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를 주님, 즉 구원자로 믿고 고백함으로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3. 오늘의 교훈
오늘 아덴에서의 바울 설교에는 몇 가지 특성들이 나타납니다.
- 첫째, 다른 곳에서와 달리 아덴 설교는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전도자인 바울이 청중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적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복음 전도를 할 때 청중들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 둘째, 비록 설교를 상황과 관심사에 맞게 출발하지만 설교의 본론은 유대인이나 아덴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은혜의 복음을 핵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청중들의 관심사를 끌어내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속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자연과 인생과 역사에 대해 절대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과감하게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아듣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 셋째, 바울 설교의 마지막 부분은 항상 구속사역에 대한 윤리적 결단을 촉구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지적한 후 결론적으로 과거의 잘못된 우상숭배를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30).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천하를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1).
종합적으로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기대만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곳에서만큼은 바울이 어떤 기적도 행하지 못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아덴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극히 소수의 회심자를 얻습니다. 그 가운데 법정의 판사였던 디오누시오도 있었고, 다마리라는 부인과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34). 훗날 바울은 아덴에서의 자신의 사역에 대해 스스로 혹평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도시인 고린도에서는 십자가 외의 도는 알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을 서로 변론하고 논쟁하는 방식이 결코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복음은 쟁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덴 사람들의 교만함이 복음을 수용하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원래 식자층들이 잘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포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라”(롬1:16)
할렐루야, 지금도 쉼 없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13주차. 우상숭배의 땅, 아덴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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