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차. “부활로 살라”
본문: 고전15:35-44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영광이 다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행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1. 들어가는 말
현대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과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이것들이 전혀 성경적인 행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의 모든 절기나 규례나 전통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시행되던 하나의 모형이자 그림자였고, 이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종교개혁가들 뿐 아니라 칼빈주의 즉, 개혁주의를 따르는 믿음의 선진들도 더 이상 구약의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지침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절기에 대해 같은 입장으로 정리했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사실 매일이 부활절이고 추수감사절이고 성탄절이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기가 아니라 그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율법이 폐기되었지만 율법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절기는 사라졌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우리 신앙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다소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은 절기 무용론, 혹은 폐기론을 주장합니다. 일리가 있고 옳은 소리입니다.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만 남은 절기 행사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린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절기는 사라졌지만 그것을 기념할 필요는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념은 의식적인 기념이 아니라 가치적이고 의미적인 기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65일이 모두 같은 날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부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기념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각자 태어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처럼 절기 또한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고, 거기에 담긴 주님의 뜻과 신앙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거룩한 성례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자, 오늘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늘 공기를 마시며 살지만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늘 부활 속에 살고 있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의식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좀 더 깊은 성찰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뜻과 성경 상 용례
부활에 대한 성경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달리다굼’이고 헬라어로는 ‘아나스타시스’(일어남)와 ‘엥게르시스(일으킴)’입니다. 영어로는 resurrection인데 원래 surrection은 지질이 융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만큼 부활이 얼마나 놀랍고 거대한 사건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원어적으로 볼 때 부활은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웠다는 것은 잠을 자거나 죽은 사람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것’은 잠에서 깨어나거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능동태와 수동태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아나스타시스’는 본인이 의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엥게르시스’는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으킴을 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제 3자가 나에게 개입하여 나를 일으킨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비록 눈에 보기에는 인간이 일어난 것이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를 죽음에서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3. 부활은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1) 만물에 이미 계시되었다.
- 하나님은 인간들이 부활을 불신하지 못하도록 만물의 소생으로 부활을 예표해 두셨습니다. 겨울에 죽었던 나뭇가지에 새봄의 기운이 스며들면 새싹이 돋고 꽃이 핍니다. 이 광경을 보고서도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활은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듯이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2)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미 예고하셨다. 부활은 성경대로(15:3,4)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22:15)
“예순 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단9:26)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6:2)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52:13)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5, 10)
4.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인가?
1) 성경의 기록
-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먼저 게바에게 보이신 후(눅24:24), 열두 제자에게(요20:19, 26), 갈릴리 500여 형제에게(마28:16), 주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모든 사도들에게, 바울에게(행9:3-6) 직접 보이셨습니다.
2) 역사의 기록
-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과 기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심지어 아시아의 총독이었던 플레비우스마저 자신의 친구이자 로마황제인 하드리안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고 있습니다.
3) 두 개의 역사관(최덕성 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독일어는 ‘역사’를 두 개의 단어로 표기합니다.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히스토리에(Historie)라고 하고 그것에 대한 실존적인 이해와 해석을 담아 재구성한 것을 게쉬히테(Geschichite)라고 합니다.
- 유서 깊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셨고, 대속제물이 되셨으며, 그 사건이 인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믿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반죄나 모독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속죄사역이었다고 믿습니다.
-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가 믿어 온 예수와 2천 년 전에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가 같지 않다고 봅니다. 신약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종교심으로 가득 찬 광신자들의 ‘고백’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고백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일종의 과찬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 여인이라도 그를 사랑하는 남자의 눈에는 예쁘게 보인다. 그래서 ‘당신은 참으로 예쁘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그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의 ‘고백’과 무의식적인 거짓말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바 없는 데,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를 지나치게 존경하여 신화화 했고, 종교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포장했다고 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며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낸 상품으로 여깁니다.
-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 ‘역사적 예수 찾기 운동’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고백과 허상 이야기를 제거하고 찾아낸 실제 예수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에 대해 덧칠 되어진 신화적인 내용을 모두 걷어내고 실제의 이야기만 다루겠다고 나선 이들이 만들어낸 ‘재구성한 예수’를 일컫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예수는 정통 기독교가 믿고 말하는 구원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이 재구성한 예수는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단지 역사상 매우 존경할만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자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싫증을 느끼고 이젠 관념론적이고 실존주의적인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진보주의 신학자들로 알려진 이들은 이른바 부활 사건에 대한 ‘게쉬히테’의 의미에 집착하고 ‘히스토리에’적 역사 논의를 멀리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근거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케리그마―설교를 통해 선포되었기 때문이지 합리적 이성으로 검증할 수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자신들이 검증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실존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점입니다.
- 이에 반해 일부 보수 우파에 속한 신학자들은 진보적 신학자들과는 ‘게쉬히테’보다 ‘히스토리에’를 더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이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회피했다는 것입니다.
4) 바른 역사관
- 바른 역사관은 ‘히스토리에’를 바탕으로 ‘게시히테’가 어우러져야 합니다. 먼저 역사는 사실이어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부활, 승천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이 아니라면 그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고 놀림감이 될 꺼리가 될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종교지식이나 교리를 신앙하는 것은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고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 한편으로, 절대 객관주의 관점, 즉 사실주의로만 역사에 접근하면 역사지식에 동원되는 주관적 이해와 재구성적 측면을 간과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전해 준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서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1:1-4).
-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성경에 기술된 역사사건을 주관적인 ‘이해’라는 과정을 거쳐 재구성했음을 의미합니다. 역사가 ‘이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말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와 재구성에 미친 관점, 세계관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활동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한성을 뛰어넘는 특별계시라는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게 우리에게 알려지도록 했습니다. 성령은 역사가 안에서 역동적으로 유기적으로 역사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성령의 지도 아래서 자신들이 인식한 역사지식을 정직하게 전했고,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지식에 오류가 없도록 간섭했습니다. 성령의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활동은 성경 기록자들로 하여금 일어난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서술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초월적 활동의 감동으로 기록된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가 하는 것은 상식객관주의(Common Sense Objectivism)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 아래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었을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사역이라고 서술합니다. 예수는 부활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모든 잠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부활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직한 증언자들의 증언과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저자들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 예수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진실성은 특별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진정성에 버금갑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초자연적인 계시의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보편적인 역사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상식적인 의미의 ‘객관적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성경 기록자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역사를 정직하게 사실대로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신화, 과장된 고백, 고상한 거짓말이 아니라 목격자들의 정직한 증언을 담도록 했습니다.
5. 고전 15장에 나타난 바울의 부활사상
1) 당위론
- 부활은 복음의 핵심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13)’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복음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며 ‘부활이 없고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14-19절)’이라 말합니다. 또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듯이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22)’고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세례도 무용하다(29)’고 말합니다.
2) 열매론
-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20)’고 말합니다.
3) 형체론(육체론)
-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셨고(38)’. ‘사람, 짐승, 새, 물고기의 육체가 다르고(39)’, ‘하늘에 속한 형체, 땅에 속한 형체가 있다(40)’고 말합니다.
4) 영광론
-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있고(40), 해, 달, 별들의 영광이 다르다(41)’고 말합니다.
5) 파종론
-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42),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도 있다(44)’고 말합니다.
6) 아담론(소속론)
- ‘첫 사람 아담은 생령,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45), 먼저는 육의 사람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46),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시다(47), 흙에 속한 자들은 흙에 속한 자와 같이 되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48),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9)’고 말합니다.
7) 유업론
-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50).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53)’고 말합니다.
8) 승리론
-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54),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56-57)’고 말합니다.
6. 결론
하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 부활 이야기는 신화도 아니요 교주에 미친 광신자들이 만들어낸 사랑고백도 아닙니다. 부활은 실제로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죽음 뒤에 발생한 엄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3대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우리의 죄를 사함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가 영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에 우리가 영원 천국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셋. 부활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 죄인은 죄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있는 곳에 서지 못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12:24)
넷. 개혁주의신앙은 매일 개혁되는 것입니다.
- 종교개혁가들은 한 번 개혁된 교회는 매일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믿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자인 우리가 매일 죽었다가 부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에 죽고 의로움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미움을 죽이고 사랑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더러움을 죽이고 거룩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내 속에 남아있는 모든 죄악을 다 제거하지 못하면 진정한 부활은 없습니다. 물론 이 일은 주님 오심과 동시에 홀연히 변화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이 시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설익은 과일이 맛이 없듯이 설죽은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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