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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에서 본 가나안(1)

장창수선교사(러시아)

by 김경호 진실 2015. 4. 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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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에서 본 가나안

애굽을 떠난 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 방황해야 했다(8;2-4). 마침내 이스라엘은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마주 바라볼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요단 강 동편이었다(1:1). 이곳에 진()을 치고 지난 날들의 모든 아픔을 잊고 감개무량하게 가나안 땅을 이들은 보았다. 방황의 시대는 끝났고 마침내 자유인으로 앞으로 평화롭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이 마음에 가득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을 이들 앞에서 재해석했다(1:3-5).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시내산 율법을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묵상할 필요를 모세는 느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미래와 장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처한 구속사적(求贖史的)인 위치는 구원 받은 후 세례 교인들이 모여 구성한 신약 교회의 그것과도 전혀 다르지 않다. 달리 말한다면 신약의 4복음서가 증언한 대로 구속사가 이 땅에 이미 성취된 후(now and here already fulfilled) 출생한 초대 교회의 위치와 너무나 흡사하다. 물론 둘 사이 차이는 존재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미 조상(祖上)으로부터 약속 받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신약의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분명히 경계선을 긋고 나타난 나라로 들어가지 않는다. 달리 말한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형태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신약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이 세상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땅의 나라와 교회가 하나인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면 신약의 이스라엘은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이 둘 사이 동질성(同質性)과 이질성(異質性) 즉 연속성(連續性)과 불연속성(不連續性)을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 성도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가나안 - 조상 때부터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약속 받은 땅

아브람을 부를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12:1-3)을 믿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기를 명했다. 그가 태어났고 자랐고 살았던 갈데아 우르는 고대 바벨론 제국의 수도였다. 이 제국의 건설자는 고대 유명한 사냥군인 니므롯이었다(10:9-12). 그가 바로 바벨 탑을 쌓도록 주도한 인물이었다(11).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런 배역의 도시에서 불러내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명했고(12:1-3) 그와 그 자손에게 그곳을 기업(基業)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12:7, 13:15). 이 약속 때문에 아브람과 그의 후손은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갈데아 우르와 결별해야 했다.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를 위해 부름을 받은 성도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신학적인 가르침이 여기 보인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른 목적은 니므롯이 세운 불순종의 나라(11)와는 달리 하나님께 순종하는 나라와 민족을 가나안 땅에 별도로 세우고자 함이었다(12:1-3). 이 덕분에 아브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종()이 되었다.

이 사실은 노아 시대 발생한 홍수 심판의 신학적인 의미를 살피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만 홍수 심판에서 구원한 목적은 이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 사회를 세우고자 함이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실패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다시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홍수에서 구원 얻은 새로운 인류는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기 시작했다(10). 그러나 100년쯤 지나자 새로운 인류는 니므롯을 중심으로 바벨 탑을 쌓아 창조주와 <st1:personname w:st=on">구원주</st1:personname> 하나님인 여호와를 또 다시 버렸다(11). 아담과 노아 이후에도 하나님의 목적은 또 다시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브람 소명(12:1-3)의 이면에는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목적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를 위해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인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12:1-3)을 믿고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르면 이들이 가나안 땅의 진짜 주인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보기에 이들은 가나안 땅에서 유리 방황하는 소수의 족속에 지나지 않았다(105: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을 잃지 않고 그곳에서 기꺼이 나그네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언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인지에 대해 계시해 주었다. 이 계시에 따르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기 위해 이들은 먼저 이방 땅에서 400년간 나그네 삶을 살아야 했다(15:13). 이들 족장은 이런 계시에 하나도 불평하지 않고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서 기꺼이 나그네 삶을 살았다(11:9).

이미 계시되고 예언된 구속사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은 온 세상에 기근을 보냈다(45:5-8, 105:16-17). 이로 인해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애굽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다. 이를 위해 형들의 미움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냈고 그곳에서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은 이들을 평안히 영접했다. 이 덕분에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 들어가 세계적인 기근(飢饉)을 잊으며 안전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점점 잊어버렸다. 가나안은 먼 옛날 이야기 같은 전설의 땅으로 서서히 파묻혀 갔다. 더더구나 애굽은 그 당시 이 세상에서 최강대국으로 선진국이었고 지상 낙원 같은 곳이었다(13:10, 11:10). 그런 나라의 시민과 백성은 영광스러웠다.

애굽에서 사는 기간이 길수록 그 만큼 더 야곱의 후손들은 조상 대대로 약속 받은 가나안 땅을 잊었고 애굽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400년 동안 이들은 애굽에서 살았다. 이들은 그곳에서 애굽인으로 출생했고 자랐으며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다만 혈통적으로 애굽인들과 구별되었을 뿐이다.

이 기간 동안 가나안 땅은 까마득한 먼 옛날 이들 조상이 살았던 곳이었고 하나님이 기업으로 준 땅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입에서 입으로 이스라엘 사이에 대대로 전해졌다. 아마 이들은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가 살아야 할 곳이라고 막연하게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를 원했다 해도 현실은 절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애굽의 노예가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방될 수 없었다. 그렇게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잃어버린 복락의 땅 또는 전설 속으로 그만 사라져 버린 약속의 땅이 되었다.

야곱의 후손들에게 이런 의미를 갖는 가나안 땅은 타락 이전 인류의 조상 아담이 잃어버린 낙원 에덴 동산을 상기시킨다. 현존 인류도 에덴 동산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 속의 에덴 동산은 하나의 전설(傳說)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죽은 아벨 대신 셋을 주신 것, 노아를 홍수 심판에서 구원시킨 것, 아브라함을 부른 것 그리고 야곱을 애굽으로 들어가도록 한 것 등등이 모두 이를 잘 증명한다. 이 모든 사건들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며 발생했지만 모두 하나님의 구속사에 속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을 거의 잊어버렸다. 설사 잊지 않았다 해도 이스라엘 스스로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이들에게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인과 구별되어 살았고 혈통적으로도 애굽인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스라엘의 혈통은 원복음(3:15)에서 예언한 여인의 후손에 속했다.

이 여인의 후손이 앞으로 올 메시아를 가리킨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 때부터 혈통적으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존재했다. 이 덕분에 출생 전부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얻을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요단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이런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족장 언약(12:1-3)을 되새기며 하나님의 언약(言約)에서 변함없이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인자(仁慈: 헤세드)와 성실(誠實: 에메트)을 깨달았고 조상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했다.

구약의 이런 기록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론(1:4-6)과 칼빈의 5대 교리(TULIP)를 너무나도 잘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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