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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에서 본 가나안(3)

장창수선교사(러시아)

by 김경호 진실 2015. 4. 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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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광야 훈련 후 들어가야 할 땅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황야와 같은 광야(曠野)를 지나야 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 길을 택했다. 그 당시 왕의 대로(大路)를 통해 간다면 일주일도 안되어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잘 하는 블레셋과의 싸움이 불가피했다.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은 이 길을 피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면서 전쟁이나 훈련을 전혀 받아보지 않은 노예(奴隸)들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전쟁 용사들인 블레셋 인들과의 싸움을 이스라엘은 감당할 수 없었다(13:17). 하나님도 인간의 상태와 능력을 보아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다(고전10:13). 하나님도 자신의 전지전능함만을 내세우며 맹목적으로 인간사(人間事)에 개입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 상태가 아닌 성숙한 신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적(神的) 능력만을 과신(過信)하는 교회와 신자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에 목적(目的)이 있었다. 이스라엘을 광야(曠野)에서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오합지졸(烏合之卒)과고 같았다. 이들은 재조직되어야 했고 그 후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6:26, 12:51). 앞으로 가나안땅에서 수행될 정복(征服)을 위해 각종 전쟁과 전투는 불가피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훈련이었다.

첫 훈련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진()을 치고 쉬도록 명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갇힌 것을 안 애굽의 바로는 자신의 마병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았다(14:3-7). 얼마 후 이스라엘은 뒤쪽 멀리에서 사납게 휘날리는 흙먼지와 모래 바람을 보았다. 이스라엘은 놀라며 당황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후 이제 자유민으로 살 수 있다는 소망이 마음에 가득했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곧 멸망 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들은 모세를 찾아가 불평했다(14:11). 장례 지낼 곳이 없어 이곳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불러냈느냐?

이들의 이런 모습은 자격이나 공로와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주었음을 잘 증언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애굽에 10대 재앙을 내렸는가? 이 재앙들을 통해 나타난 기적들과 이적들은 사실 표적(表蹟)들이었다. 이 표적들은 이스라엘의 족장에게 준 언약이 영원하며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하고 그리고 언약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능한 오른손도 사용함을 증명해 주었다. 아울러 언약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한히 인자함도 증언했다. 표적의 이런 신학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여야 함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에 실패했다. 첫 실패는 이스라엘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을 암시했다. 출애굽 사건 전후(前後) 이스라엘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애굽에서 해방시켰다. 이제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훈련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또 다시 기적을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야 했다. 넘쳐 흐르는 홍해 가운데 대로(大路)가 생겨 이스라엘은 무사히 건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뒤따르는 애굽 군대는 그곳에서 모두 망했다(14:22-27).

홍해도수 사건은 많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애굽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신약 교회에서 행하는 물세례로 비유했다(고전10:1-2).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신분을 획득했다. 비로소 광야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훈련을 마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총도 받았다. 이 은총은 무조건적(無條件的)이어야 한다. 자격이나 공로로 이 은총을 받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훈련을 위해 절망적인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이들로 하여금 무능력을 깨닫게 함으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고후1:8-9).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심하게 불평하며 모세를 찾았다. 그렇게 시험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그리고 무조건적인 인자(仁慈)와 언약에 변함없는 성실(誠實) 덕분에 이스라엘은 절망 가운데 오히려 소망을 발견했다. 어떤 상황에서나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줄 알아야 했다. 이 사건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책임질 것이란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잘 보여주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놓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한 족장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고난과 역경이 보다 더 쉽게 그리고 빨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첩경(捷勁)이 됨을 증언한다(77:19-20, 107:23-30). 홍해를 곧바로 건널 수 없다면 이스라엘은 한참 둘러 가나안으로 가야 했다. 어린 아이들과 노약자를 포함한 이백만의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무리였다. 이를 잘 안 하나님은 기적으로 홍해 가운데 탄탄한 큰 길을 만들어 이스라엘로 쉽게 건너게 했다. 하나님이 의도한 고난과 역경은 이스라엘에게 바로 첩경과 같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이렇게 본다면 홍해도수 사건도 출애굽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사건과 신자가 받는 세례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6). 구약의 홍해 도수 사건이라는 표적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는 그대로 신약의 물세례가 갖는 신학적인 의미와 연결된다. 구약은 신약의 물세례에 다양한 신학적인 의미를 설명해 준다.

홍해도수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함께 광야에서나 가나안에서나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관계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향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느냐 여부는 이 두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잘 이해했느냐 여부에 달릴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이 앞으로 계속 받을 시험에서 승리할 것인가도 결정할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이후 이스라엘은 계속 시험에서 실패했다.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다.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다. 이 때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원망했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 쓴 물을 달게 만들어 마시게 했다. 이후 다음 성구가 기록된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15:25-26)

출애굽 사건과 홍해도수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구속주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 열악한 환경인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믿음의 순종으로 의()를 행하여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킴으로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질병 즉 하나님의 저주에서 서서히 치료될 것이다.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며 또 다시 모세를 향해 원망했다. 연속된 원망은 이스라엘이 족장 언약과 그에 따른 구속사적인 사건인 출애굽 사건과 홍해도수 사건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이들에게 만나를 매일 주었다. 이 때 이들의 시험을 위해 주어진 규례는 일용(日用)할 양식만 취하는 것이었다(16:4).

광야는 죽음의 땅이다. 음식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음식을 많이 비축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루 분의 양식만 취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훈련을 위함이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했다(8:3).

출애굽 사건, 홍해도수 사건 그리고 이를 위해 행한 표적들이 말하는 가르침을 잘 이해했다면 그 증거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며 매일 일용할 양식만 취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불신(不信)한다면 욕심으로 더 많이 취할 것이다. 일용할 양식에 관한 규례도 구속주요, 창조주 하나님이며 이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를 이스라엘이 결국 믿느냐 여부를 시험했다.

이 이외 다른 가르침도 있다. 광야는 정착 사회인 농업 사회와 완전히 다르다. 애굽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광야에서 요구되었다. 정착 사회에선 많이 가진 자가 강한 자로 지배자이다. 그러나 광야에선 이런 삶의 방식은 오히려 위험하다. 시기(時期)를 놓쳐 풀을 얻지 못하면 광야에서 모두 죽을 수 있다. 이동(移動)이 쉽도록 꼭 필요한 것들만 갖고 나머진 이웃과 나누거나 버려야 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애굽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사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이런 가르침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르비딤에서 물이 없음을 알자 모세와 다투며 마실 물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 때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17:2)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연단이나 훈련을 뜻하는 시험을 받고 있음을 잊었다는 증거였다. 훈련을 받는 중 어려움을 만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나 하나님의 인자함과 성실함을 잊어버리며 곧바로 불평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 다시 기적을 무조건적으로 행함으로 이스라엘이 충분히 물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도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며 이스라엘로 승리케 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무한한 인자함이 이들에게 든든한 보장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번번히 하나님의 시험에서 실패했다. 출애굽 사건 이전이나 이후에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무자격자였을 뿐이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인 이드로의 충고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행정적으로 재조직했다.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모세를 돕도록 했다(18:13-27). 하나님도 인간의 참여로 자신의 통치가 이스라엘에 실현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들 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다(18:21). 여호와 하나님은 구속주로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나라 법()이 없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과 시민법으로 구성된 율법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었다(20-23). 이로써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세우기 위한 법과 조직이 모두 구비되었다. 여기서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시내산 율법의 기능을 살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이스라엘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법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 앞에 모두 평등(平等)하다. 왕은 물론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통치 방법과 원리는 철저한 법치(法治)였다. 오늘날 말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의 근본적인 원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시대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이방 나라의 통치 방법은 덕치(德治)였다. 이들 나라에선 신적 존재와 같은 인간 왕이 스스로 법을 만든다. 나라의 법은 왕의 인품과 덕에 의존했다. 왕이 없으면 법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왕은 나라 법 위에 군림했다. 부패한 인간이 왕으로서 무한한 권력을 소유했고 이것은 당연히 권력의 부패와 타락을 초래시켰다. 우상(偶像)을 섬기는 이방 나라의 덕치는 오히려 전제 정치나 독재 정치의 온상(溫床) 역할을 했다. 유일신을 섬기는 이스라엘과 여러 우상 신들을 섬기는 나라 사이 정치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곧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 언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건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율법을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19:8). 이후 십계명이 적어진 두 돌판이 준비되고(24:12-18) 성막 제도(25-27, )와 제사장 제도(28-29)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성막 제조 후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 했고 곧이어 제사법(레위기)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언약식이 율법과 관련하여 몇 가지 가르침을 준다. 언약식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 인간 지도자에게 속했다. 즉 하나님 나라이면서 동시에 세상 나라가 되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와 완전히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우월해야 했다(4:5-6).

언약식 때문에 율법의 시민법이 규정하는 인간 윤리는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웃에게 죄를 지은 것은 곧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되었다. 달리 말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 안에선 윤리와 종교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과 화해하고 난 후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 제물을 드려 속죄 받아야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죄악(罪惡)을 열심히 지적한 이유가 여기 설명된다. 이들은 사회적인 타락과 부패 현상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의 법을 버린 결과임을 지적했다. 사회적인 부패와 윤리적인 죄악을 지적함으로 이들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했다.

이 점에서 신약 시대 목회자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가 아니다. 우선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시에 겸했을 때 활동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이후 나라와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따라 서로 분리되었다(22:21). 하나님의 일반은총 분야는 세상 나라가 맡았고 하나님의 특별은총 분야는 교회가 맡았다. 그리고 신약 시대 선지자 직분은 사라졌고 목사가 교사로서 교회를 위해 수고한다. 아울러 이 세상에서 윤리(倫理)는 신앙(信仰)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신약 시대 이후 목사는 더 이상 선지자일 수 없다.

율법(律法)은 구원의 수단이 절대로 아니었다. 출애굽 사건과 홍해도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노예 상태에서 이미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쳐졌다. 그 후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준수해야 할 나라 법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율법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방법이었다.

칭의가 신분과 그리고 성화가 신분에 맞는 삶과 긴밀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삶을 위해 하나님은 율법을 주었다. 그렇다면 칭의는 항상 무조건적인 은총과 그러나 성화는 조건적인 은총과 관계된다.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아 의롭게 되었다면 당연히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항상 따라온다. 이 때문에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논리적인 면에서 이 둘 사이 이해를 위해 서로 나눌 수 있지만 신앙 삶이라는 실천적인 면에서 이들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오해한다면 이 둘 사이 관계는 항상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며 불필요한 논쟁을 끊임없이 교회에 불러 일으킨다.

언약식 이전에 주어진 시내산 율법에는 제사법이 제외되었다. 제사법은 성막이 제조된 후 비로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레위기). 그럼 왜 제사법은 십계명 그리고 시민법과 분리되었는가? 십계명과 시민법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실천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이를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3:11).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부정(不淨)을 제거하기 위해 제사법이 주어졌다(1-7). 이를 위해서도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기 쉬운 부정을 사전(事前)에 제거하도록 이스라엘에게 정결법(11-15)도 주어졌다.

그렇다면 성화란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camp)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화는 근본적으로 성막(tent) 밖의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에서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비로소 성막으로 나가 제사를 드린다. 이렇게 제사법도 이스라엘의 성화를 도왔다. 제사법의 도움으로 성막(tent)에서 속죄(贖罪)를 받은 이스라엘은 다시 삶의 현장(camp)로 되돌아간다. 이런 긴밀한 관계성 때문에 제사법도 시내산 율법으로 취급되었다.

성막 제조 후 비로소 하나님은 성막에 임재(臨在)했다(40). 이 덕분이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었다. 성막은 구속주 하나님 여호와가 왕으로 이스라엘 중에 임재함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언약은 역사적으로 일단 성취되었다. 성막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증거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며 이스라엘의 나라 법인 시내산 율법을 준수함으로 이스라엘은 왕인 하나님에게 늘 순종해야 했다. 이에 따라 향후 이스라엘의 축복과 저주가 결정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라의 틀을 갖추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완료했다. 그러나 이 이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지키는 훈련을 광야에서 또한 받아야 했다. 출발하기 전 즉 출애굽 후 제 2 2 1일 하나님은 모세에게 20세 이상 이스라엘인들을 계수(計數)하라고 명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명부를 작성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함께 행진할 때 필요한 진형도 정해졌다(1-2).

같은 해 2 20일 마침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바란 광야로 행하였다(10:11-12).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고 이미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광야 길에서 어려움을 만나자 여호와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악한 말로 원망했다(11:1-3). 식욕(食慾)을 부리며 애굽의 기름진 음식을 먹고 싶다고 불평했다(11:4-15). 그리고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12:1-16). 백성은 물론 모세를 도와야 할 지도급 인물까지 모세를 원망함으로 하나님을 또한 원망했다.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잘못은 정탐군 사건에서 드러났다(13). 정탐에서 돌아온 12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 가나안 땅은 들어갈만한 곳이 못 된다고 악평(惡評)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절망하며 울었다. 이들은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말했다. 이로써 그 동안 받은 이스라엘의 훈련이 턱도 없이 부족함이 드러났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40년간 광야 삶을 살게 한 원인이 되었다(14).

그 동안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존재임을 항상 하나님 앞에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이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리고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실패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 위해 더 훈련을 받아야 함을 뜻했다. 그리고 앞으로 받을 광야 훈련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갈라냈다.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멸망 당했다. 이 기간 동안 출애굽 2세대들이 출애굽 1세대를 대신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14:20-25).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족장의 하나님 여호와를 불신(不信)한 것이다. 여호와는 전지전능한 창조주(創造主)로서 이스라엘의 구속주(求贖主)였다.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길에서 이들이 바라는 바가 하나님 약속한 것과 전혀 달리 보여도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그 언약을 신뢰하며 계속 진행하여야 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도록 하나님은 이미 애굽과 광야에서 충분히 수많은 표적들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 일에 출애굽 1세대는 그만 실패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푼 기사와 이사만 보았을 뿐 영안으로 표적을 알아보지 못했다. 훈련을 잘 받은 군사들은 아니었다. 이제 이들은 평상 삶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사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조그만 일에서부터 충성하는 훈련이 앞으로 큰 일에서도 충성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러나 훈련 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출애굽 2년째 가나안으로 들어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적(靈的) 세계에서도 충분한 훈련만이 승리의 비결이다.

출애굽 2세대들은 하나님이 매일 내리는 만나와 시시때때로 주어지는 메추라기를 먹으며 부족함이 없이 광야에서 40년간 훈련을 받았다(8:4). 험한 광야에서 사는 유목민들처럼 이들은 당연히 강해져야 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을 받은 출애굽 2세대들도 1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신 광야의 가데아 바네아로 되돌아온 이스라엘은 물이 없음을 알자 불평하기 시작했다. 1세대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극언(極言)까지 했다. 하나님은 또 다시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기적을 베풀어 이들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20:2-13).

또 다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향해 더 전진할 수 있었다(20:14-).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이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했다. 족장에게 준 자신의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출애굽 2세대의 구원도 족장 언약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실(誠實)함과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자(仁慈)함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이 증명된다.

이런 신학적인 가르침은 발람 선지자 사건으로 잘 증명된다. 요단 강으로 가는 과정에이스라엘은 아모리 인에 속하는 시혼과 바산의 영토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복했다(21). 이에 위협을 느낀 모압 왕 발락은 거짓 선지자 바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하려고 시도했다(22). 그러나 발람은 발락의 요구에 번번히 응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발람 선지자를 조종했기 때문이었다.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같이 일어나고 수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23:19-24)

족장 언약에 근거를 두고 항상 이런 망극한 은총이 이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망각하고 바알 브올 사건을 통해 이방 신에게 그만 부속되었다. 십계명중 제 2계명을 어겼다. 율법에 따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했다. 이 저주로 인해 죽은 자가 24천명이었다(25).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백성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구원의 은총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해야 할 이유였다.

이후 다시 계수 사건이 기록되었다.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명부가 재작성 되었다. 출애굽 이후 작성된 명부와 차이를 보였다. 르우벤 46500-43730(-2770), 시므온 59300-22200(-37100), 45650-40500(-5150), 유다 75600-76500(+900), 잇사갈 54400-64300(+9900), 스블론 57400-60500(+3100), 에브라임 40500-32500(-8000), 므낫세 32200-52700(+20500), 베냐민 35400-45600(+10200), 62700-64400(+1700), 아셀 41500-53400(+11900), 납달리 53400-45400(-800), 총계 603550-601730(-1820)

크게 감소한 지파는 시므온 37100, 에브라임 8000, 5150, 르우벤 2770, 납달리 800명이었다. 시므온 지파는 바알브올 사건에서 깊이 관련되었다. 이 때 많이 죽임을 당했다는 증거이다(25:14). 그 결과 야곱의 저주(49:5-7)가 시므온 지파에게 문자적으로 실현되었다. 지파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에브라임 지파의 감소가 눈에 띈다. 본래보다 1/4이 줄어들었다.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라는 자부심이 원인이 아닌가 짐작된다. 에브라임 지파가 지나치게 번성했다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르우벤은 광야에서 레위 지파와 함께 모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바 있었다(16).

반면 수가 증가한 지파는 므낫네, 아셀, 벤냐민, 잇사갈과 스블론 순이다. 유다 지파는 비교적 그 수를 유지했다. 유다 지파는 메시아와 이스라엘의 왕을 배출할 지파였다(49:8-12). 유다 지파는 수에서도 막강하여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그러나 이들은 광야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조용히 훈련을 잘 받았다. 유다 지파는 레위와 아론 집안 출신인 모세의 지도에 잘 순종했다.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 그리고 사명을 잘 이해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다 지파는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아주 치명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2차 계수는 이스라엘의 모든 삶의 과정에 개입하여 순종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축복하기도 또는 저주하기도 함을 보여준다. 명부 상의 차이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취소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말할 수 없다. 광야 시험을 통해 구원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들 사이를 하나님은 구별해 냈을 뿐이다. 그렇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결과임을 가르친다.

요단 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앞장 서서 인도했다. 이 과정에서 바아 브올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미디안 족속(31)을 전멸시켰다. 그 후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들은 시혼과 바산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이 소유한 목축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초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32:1). 모세도 마침내 허락했다(32).

이들 지파는 당연히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를 고려하여 하나님도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허락했다. 그러나 이 선택이 나중 이들에게 불행의 원인을 재공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해 공격을 받을 때 이들 지파들이 제일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방 나라에게도 이 지역은 정말 탐나는 곳이었다.

목축을 기르기에 넓은 초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들 지파는 쉽게 공격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이 이들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지파들이 제일 먼저 이방인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은 아주 높았다. 그러므로 이들 지파는 단지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이유만으로 정착할 곳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단 강 동편에 진()을 치고 그 동안 그렇게 그리던 가나안 땅을 마주하게 되었다.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무조건적인 은총 덕분에 이스라엘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 협동 사역이라고 여겨지는 성화(聖化) 과정도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함을 구약은 가르친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이 때마다 하나님이 일일이 징벌한다면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요단 강에 이를 수 없었다.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함과 성실함만이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함이 다시 확인된다(34:6, 14:18-19).

오래 전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도 이를 잘 이해했다.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24:27) 하나님의 인자함과 성실함이 언약 백성의 근본임이 여기 잘 설명된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32)을 용서한 후 하나님도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34:6)

그렇다면 아래의 성구도 좀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위의 믿음은 흔히 인간의 공로로 해석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신실함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의 은혜(헤세드)와 성실(에메트)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인간은 아무 공로를 세우지 않아도 아들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의 은총을 거저 받는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바울은 설명한 이유였다.

그리고 은혜와 율법 사이 관계도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고 그 다음 자신의 법을 지킬 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주면서 일용할 양식 규례를 지킬 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다(16:4). 그리고 출애굽 사건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며 지킬 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다(19:3-8, 20:1-3).

하나님은 공로(功勞)를 조건으로 인간에게 은혜를 절대로 베풀지 않는다. 창조 기사가 이를 확실히 중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난 후 에덴 동산에 거하도록 은혜를 먼저 베풀었다(2:7-17). 그 다음 인간에게 선악과 규례를 주며 지킬 것을 인간에게 명했다. 그러므로 율법을 구원이나 은혜를 받는 조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복음과 율법 사이 관계도 마찬 가지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성경에서 은혜(恩惠)와 율법(律法)은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란 것이다. 은혜는 율법으로 인도하며 율법으로 은혜가 확인된다. 즉 받은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성도는 기쁘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노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가 나타난다. 사랑과 계명 사이 이런 관계는 성경 여기저기에서 잘 기록된다(20:6, 5:10, 22:5, 9:4, 14:15, 15:10, 요일5:2, 요이1:6).

출애굽 사건 후 이스라엘이 머문 광야라는 학교는 대단히 중요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로서 재조직되었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그 훈련의 주목적은 <st1:personname w:st=on">신명기</st1:personname>가 잘 설명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2-3)

목적이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첫 목적은 이스라엘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기 위함이며 둘째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여부를 알기 위함이며 그리고 셋째 목적은 이스라엘이 떡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만나는 모든 시험은 이스라엘에게 향한 하나님의 선()에서 나온다. 이스라엘이 시험에 놀라지 말아야 할 이유였다(1:2-4). 그러나 이들 목적에 따른 시험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결국 파멸케 하는 유혹(誘惑)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연단(鍊鍛)을 목적한 훈련(訓練)이 될 것이다. 이것은 불순종이 마음의 고의적(故意的)인 악()에서 나오는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은 이런 악을 결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15:30, 19:13, 10:26-27).

결국 하나님의 시험은 한 가지 목적으로 줄어든다. 이스라엘 중에서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을 가려내는 것이다. 시험을 통해 의인은 연단을 받으며 잘 세워져 가지만 악인은 탈락되어 멸망 당할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멸망 당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시험 중 인내로 견딜 수 있다면 연단을 이룰 것이며 이 연단은 소망을 이룰 것이다(5:2-4). 그러나 이 인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확실한 근거를 두어야 한다(5: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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