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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에서 본 가나안(4)

장창수선교사(러시아)

by 김경호 진실 2015. 4. 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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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세워질 땅

모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죄 때문에(20:1-12) 안타깝게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다(34:5-6).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세대 교체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출애굽 2세대는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지도자는 그 누구보다도 더 솔선수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법치(法治)가 하나님 나라의 철저한 통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만 모세는 이에 실수를 범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0:12) 하나님은 반석에 명하라고 말했지만 모세는 반석을 자신의 지팡이로 두 번씩이나 쳐 물을 냈다(20:7-11).

모세의 행위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 행위이며 그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지 못했다고 하나님은 평했다. 이 당시 모세는 항상 불순종하기 잘 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에 사로 잡혔다(20:10-11). 이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서 그만 반석을 두 번씩이나 내리쳤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분노(忿怒)라는 감정(感情)을 믿음으로 억누르고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따라 철저히 행하여야 했다. 지도자는 하나님보다 앞서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면 안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함도 이해해야 했다. 인간 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늘 분노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이스라엘은 단 한 명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족장 언약에 근거를 둔 자신의 약속을 실현시켜야 했다. 하나님이 늘 이스라엘에게 변함없이 인자함과 성실함으로 대한 이유였다. 예전 모세는 하나님의 이런 인자와 성실을 잘 이해했었다(14:19). 위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위해 정말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가나안 입성(入城)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올 메시아는 이런 면에서 절대로 실수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메시아의 부적격성은 인류의 구원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신자(神子: Son of God)이면서 동시에 인자(人子: Son of man)여야 했다. 이렇게 구약의 인물들의 부족한 점들은 역으로 앞으로 올 메시아의 완전성을 강조한다. 아울러 모세의 잘못은 교회의 목사를 포함한 제직들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사명을 수행할 것을 가르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인간의 사조직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을 배출하는 어머니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지 못하는 제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도강(渡江)하도록 준비를 시켰다. 이 이전 무엇보다 먼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를 세워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두 가지를 언급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1:6)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7-8)

그의 통치력과 리더십은 족장 언약(言約)과 율법(律法)에 그 근거를 두어야 했다. 여기서 언약은 족장 언약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에게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가리킨다면 율법은 언약의 조건으로써 하나님의 조건적인 은총을 뜻한다. 족장 언약은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征服)을 반드시 실현시킬 것을 암시하지만(9:5) 율법은 지도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만 정복 사역이 형통할 것을 각각 암시한다(1:8).

반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켜 준다면 율법은 그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것이다. 즉 믿음의 순종만이 그에게 형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리더십이 세상 통치자의 리더십과 다름을 지적했다. 세상 통치자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땅을 정복하며 통치력을 자기 백성에게 과시할 것이지만 여호수아는 족장 언약에서 이미 약속된 땅을 믿음으로 정복함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하나님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증명해 보여야 했다.

아울러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했다. 창조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하고자 했다(1:26-28).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함으로 그의 통치권은 사단에게 넘겨졌다(3). 창조 목적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은 이를 회복시킬 메시아를 약속했다(3:15). 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자신의 전략을 바꾸었다. 이 세상 전체를 상대하지 않고 가나안이라는 특정한 땅에 자신의 통치를 먼저 실현시킬 것이다. 그 후 자신의 통치 영역을 세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다. 이를 목적하며 아브라함을 불렀고 그리고 그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의 이런 원대한 계획 아래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감과 사명감이 여호수아에게 필요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종에 지나지 않았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품꾼이라고 불려진 이유였다(25:40,42, 20:1). 사실 열방들도 하나님의 목적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품꾼이다(16:14, 21:16). 품꾼은 주인이 써주어야만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이다. 주인의 소용이 다 하면 품꾼은 그만 해고되고 그렇게 그의 사명도 완수된다.

여호수아와 세상 지도자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사이 차이가 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사(하나님의 특별은총)를 위해 그러나 세상 지도자와 이방 나라들은 세속사(하나님의 일반은총)를 위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일하는 품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알고 여호수아는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가나안 정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일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가나안 정복은 족장 언약 때문에 반드시 실현된다는 믿음이었다.

두 정탐군과 기생 라합 사건은 그의 믿음을 도왔다. 12 정탐꾼을 보냈을 때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예전 12 정탐꾼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강함만 보았다. 그러나 두 정탐꾼의 눈에 보기에 여리고 성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예상된 공격에 이미 모두 간담이 녹아있었다. 여리고 주민들은 애굽을 떠날 때부터 요단 강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놀랬다(2:9-11).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이길 수 없음을 안 여리고 성 백성은 성문을 닫은 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두 정탐꾼의 보고는 이랬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24)

여호수아도 언약괘를 앞 세워 요단 강으로 보내며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3:9-10)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을 상기시키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독려했다.

이 때도 요단 강물의 흐름이 멈춤으로 이스라엘은 쉽게 도강(渡江)할 수 있었다. 이 또한 표적이었다(4:21-24). 도강한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할례 의식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5:7).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행한 할례 의식은 애굽에서 행한 할례 의식과 연속선상에 놓였다. 하나님의 언약을 피부에 새긴 이스라엘만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입성 사건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식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구원은 구속과 기업 상속을 모두 포함한다. 가나안 입성 후 할례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114일을 맞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 의식을 또한 행했다(5:10). 유월절 이튿날 이스라엘은 그 땅의 소산물로 만든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처음으로 먹었다(5:11). 다음 날부터 만나도 그쳤다.

애굽을 떠나 광야에 살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았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신을 위해 스스로 일하며 그 결과물로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미의 젖만 먹고 자라는 어린 양이 이미 아니었다. 가나안에선 주인에게 자신의 젖과 털을 드리기 위해 수고해야 할 성숙한 양이 되어야 했다. 가나안에서의 삶 방식은 이전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예전 할례 의식과 유월절을 행한 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었다(12:43-51). 마찬 가지로 가나안에 들어간 후 할례 의식과 유월절을 지켜야 했다. 동일한 의식과 절기를 지킴으로 가나안 입성은 출애굽 사건과 분리되지 않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 애굽과 가나안이라는 전혀 다른 두 장소가 믿음으로 지켜진 의식과 절기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다. 애굽에서 지켜진 유월절이 가나안 입성을 목표로 삼은 출애굽 사건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설명된다. 구약의 구속사적인 사건들은 신약의 구원과 구속의 신학적인 의미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원주와 개인의 주()로 계속 신앙을 고백한다면 칭의(稱義)로 시작된 신앙 삶이 성화(聖化)를 거쳐 영화(榮華)로 반드시 종결될 것이다.

여리고 성의 함락 사건(6), 아간 사건(7:1) 그리고 아이 성 점령 사건(8:1-29)은 내용상 다르지만 의미상 동일하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가나안 정복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형통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의 명을 어긴다면 오히려 가나안에서 멸망 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만 달라졌지 광야에서나 가나안 땅에서나 이스라엘은 오로지 믿음으로 살아야 했다.

아이 성을 함락시킨 후 이들이 서둘러 한 일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이 준 율법을 선언한 것이었다(8:30-35). 이것은 모세의 명에 따라 행해진 의식이었다(27:11-26). 가나안 땅에 살 이스라엘의 장래가 향후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가나안 땅은 철저히 율법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 때문에 가나안 땅은 다른 이방 땅들과 구별된 아주 특별한 곳이 되었다. 그렇게 선민 이스라엘도 이방 나라와 구별될 것이다. 요단 강에서 모세가 이미 설명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11:10-17)

구약 성경의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에 대한 설명은 신약 시대 교회와 성도에 대해 그대로 적용된다. 구원의 은총으로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조직신학에선 이 은총을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라 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느냐 여부가 신약 성도의 영적 성장과 승리를 결정지을 것이다. 성도들이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신앙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함을 구약은 잘 설명한다. 칼빈주의는 이를 면전의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다(9-12). 그리고 얼마 후 지파 별로 정복 전쟁이 또한 수행되었다(13-21). 자신의 기업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지 여부가 지파 별로 믿음의 분량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모든 지파들이 여기에 실패했다. 이들 지파의 기업 내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사 시대라는 혼란 시대를 이스라엘에게 초래시켰다(2:1-3).

이 혼란한 사사 시대를 끝내기 위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할 수 있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출발시켰다(삼상8, 12).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도 이방 나라들과 같이 되었다(삼상8:4-22).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정은 첫 왕인 사울에 의해 실패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임을 잊고 자기 가문에 속한 왕국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삼상20:30-31).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싫어했다. 이것이 그가 폐함을 받은 이유와 원인이었다(삼상15:22-23).

그 후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정은 최절정을 맞았다. 이 때 다윗 왕국은 가나안 땅에 세상 나라 방식으로 마침내 세워진 하나님 나라였다. 아브라함을 부른 하나님의 목적(12:1-3)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더 거슬려 올라간다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1:26-28)과 타락 이후 하나님이 약속한 구속 목적(3:15)의 일차적인 역사적인 성취(成就)였다. 그러나 최종적인 완성은 아니었다. 그 완성(完成)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몫일 것이다.

다윗 왕국은 세상 나라와 여러 면에서 비교되었다. 다윗 왕국은 율법에 철저히 근거를 둔 법치(法治)의 나라였다면 이방 나라는 왕의 성품에 의존한 덕치(德治)의 나라였다. 이스라엘이 법치에 따른 통치를 실현한다면 다윗 왕국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약 시대에 가장 아름답게 꽃 피울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다면 이스라엘은 왕의 덕치에 의존할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전혀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사이 차이가 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모든 백성은 지파 별로 그리고 가문 별로 균등하게 땅을 분배 받았다(18:10). 이스라엘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 땅 즉 자기 기업을 소유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다 하나님과 왕 앞에서 평등했다.

기업의 경계선은 지계표가 알려주었다. 왕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 지계표를 함부로 이전할 수 없었다. 지계표는 기업의 소유자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백성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권한은 하나님 이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주인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런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에발 산에서 이미 선언했다(27:17).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시대보다 훨씬 앞선 완벽한 복지 국가였다.

반면 이방 나라에선 왕과 귀족들이 모든 땅을 소유했고 나머지 백성은 이들의 노예나 종에 지나지 않았다. 토지 제도에 근거를 둔 이방 나라의 경제 구조도 왕과 귀족들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에 의해 얼마든지 쉽게 왜곡되었다. 이것이 이 당시 우상 신들을 섬기는 이방 나라의 정치와 경제의 특징이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언함으로 선민의 법치와 이방 나라의 덕치 사이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이 어느 하나를 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둘중 어느 하나의 선택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 살 이스라엘의 장래와 운명도 완전히 바꿀 것이다. 믿음으로 전자를 택한다면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정치와 경제 제도를 보여주는 지상 낙원 같은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들 중 강력하거나 지혜로운 군주나 왕을 선택한다면 독재와 전재 정치의 굴레 아래 고생하게 될 것이다(삼상8:10-18).

사울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북 왕조들이 망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기록한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는 이를 잘 증명한다.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의 통치는 철저히 법치(法治)에 의존했지만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의 통치는 덕치(德治)에 의존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의 흥망성쇠가 그 때마다 결정되었다. 열왕들의 신앙 수준은 그대로 법치나 덕치, 이 둘 중 어느 하나로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열왕들에게 신앙과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 중 가장 완벽한 나라였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세상 전역으로 확장시키도록 부름을 받은 제사장 나라였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스라엘에게 신앙과 삶 즉 종교와 윤리는 전혀 분리되지 않고 하나였다. 그리고 문화 명령(1:28)에 따라 이들에게 인간(人間)과 자연(自然) 사이 이분법(二分法)도 존재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충돌하지도 않았다. 정신과 기술을 각각 뜻하는 문화와 문명이 분리될 수 없음과 같다. 이스라엘에선 인문사회과학이 주는 법과 제도에 따라 자연과학이 주는 열매가 선민 사이 잘 분배될 것이다(1:28). 자연스럽게 문화와 문명의 창달과 발전 면에서 이스라엘을 능가할 이방 나라들은 없었다(4:5-8, 왕상4:34, 10:6-9).

그러나 이방 나라에선 인간의 더러운 탐심을 채울 목적으로 왕들과 제사장들이 결탁하여 우상 종교들을 만들었다. 또는 부패한 왕은 스스로 신이 되어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과 탐심을 마음껏 채웠다. 우상 신들을 숭배하는 나라들은 이렇게 서서히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를 파괴시켰다. 고대 문명의 멸망 원인에서 이 사실은 잘 알려진다. 구약 시대 이방 나라들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법치에 근거를 둔 다윗 왕국이 번성할수록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더욱 구별될 것이며 그럴수록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모든 신들 중 가장 위대할 것이다. 이 결과 이스라엘의 영역은 점점 더 세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다윗 왕국을 통해 타락 이전 인류에게 준 문화명령(1:28)의 문자적인 성취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19:3-6)

구약 시대 가나안 땅은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적하여 선택된 특별한 곳이었다. 이를 위해 특별한 백성도 선택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일단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위한 과정이었다. 앞으로 아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차적으로 성취될 때 그 나라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구약의 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은 미리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앞으로 올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위해서도 모형인 이스라엘은 반드시 폐해져야 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 흥망성쇠를 거듭하다 다윗 왕국이 마침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망했다. 이를 미리 알고 있던 모세도 요단 강에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 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 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8:7-20)

그리고 신명기의 예언대로 다윗 왕국의 종말(終末)이 다가옴을 안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예언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우상과 금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2:6-22)

가나안 땅에 세워진 다윗 왕국이라는 하나님 나라는 이 지상에서 찬란한 모습을 잘 보여준 후 서서히 패망의 길로 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시대에 맡겨진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그리고 모세와 이사야도 이스라엘의 종말을 분명히 알았지만 그 시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열심히 수행했다.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원의 은총을 통해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살고 있다. 이들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도록 수고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이 세상이 불 심판으로 멸망 당할 것도 분명히 안다. 이 점에서 신약 성도도 구약 성도와 마찬 가지로 이중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소유할 수 밖에 없다. 낙관적이면서도 비관적이며 또는 비관적이면서도 낙관적인 것을 동시에……

신약 시대 성도들도 이 땅에서 열심히 수고하여 성공한 결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은총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사라질 것임을 알고 현세의 복과 형통을 거부하거나 부인할 줄 알아야 한다. 반면 이 땅에서 불행하게 산다 해도 성도는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 때 완전한 형태로 드러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가난과 빈곤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신약 성도는 그 시대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도록 구원의 은총을 통해 소명을 받는다. 재림 소망으로 무장하며 현실도피적이면서도 현실참여적인 삶을 성도들은 살아야 한다(고전7:29-31). 이 세상의 문화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도록 말이다. 이런 소극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삶 자세가 성도에게 이 세상과의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시켜 주며 이 덕분에 성도는 자신이 사는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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