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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에서 본 가나안(2)

장창수선교사(러시아)

by 김경호 진실 2015. 4. 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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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출애굽 후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땅

구약 시대 구원의 은총은 장소(場所)의 이전(移轉)이라는 형식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타락 사건이 잘 증명한다. 아담은 에덴 낙원으로부터 쫓겨남으로 구원의 은총을 상실했다. 이 후 회복된 구원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통해 에덴으로 복귀함을 뜻했다(3:15).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의 구원도 이를 잘 설명한다. 이들은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음으로 옛 세상으로부터 새 세상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은 새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을 이들에게 다시 주었다(9:1). 홍수 후 새 세상이 마치 새로운 창조 세계인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은 홍수 심판으로 옛 세상을 새롭게 했다. 다시 인류는 하나님을 대신한 통치자 역할을 받았다. 옛 세상에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축복을 새로운 인류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피조물들이 인간을 두려워 할 것이다(9:2). 새 세상은 옛 세상을 이어갔지만 다르기도 했다.

아브람의 소명(召命)에서도 재확인된다. 하나님의 소명(召命)은 아브람이 갈데우 우르로 부터 나와 가나안 땅으로 떠나 갈 것을 명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으로 그는 언약의 약속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12:4-5). 이 때문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 이방인 나라나 사회에서 살면 안 되었다. 아브람의 소명 이전과 이후 사이 차이가 있다. 아브람 전까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는 세상에서 나와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브람부터 가나안이라는 구체적인 땅이 지정되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는 계속 가나안 땅에 머물며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과 이후 하나님의 세계 선교 전략은 달라졌다. 이전 하나님은 세상 전체를 대상하여 자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 하나님은 이 세상 의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여 자신의 구속사를 진행시킬 것이다. 그곳에 먼저 자신의 통치를 실현시킨 후 하나님은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그 통치 영역을 세상 전체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아브라함 전후(前後) 구속사적인 전략도 획기적으로 수정되었다.

그럼 애굽에서 힘 없는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400년 넘게 살아가며 야곱의 후손은 애굽의 경제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를 이용하여 나라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생육하고 번성했다(1:7).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가 다가왔다(7:17).

이 때 요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애굽의 바로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핍박하기 시작했다(1:6-11, 7:18-19). 그는 이스라엘의 번성과 그로 인해 향후 초래될 무서운 결과를 예상하며 두려워 했다(1:8-11). 이스라엘이 강성해짐을 약화(弱化)시킬 목적으로 처음 남아를 무조건 죽이라 명했고 그 다음 비돔과 라암셋이라는 도시 건설을 위해 바로는 이스라엘을 강제로 그곳에 노예로 동원시켰다(1).

바로의 두려움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에 근거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두 도시를 건설함으로 자신의 권세와 영화를 자랑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바로를 위해서도 이스라엘의 노동력은 아주 중요했다. 애굽의 바로가 10대 재앙을 직접 체험했으면서도 마음의 강퍅함으로 이스라엘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서 잘 설명된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전지전능하며 자신의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 여호와가 애굽과 바로의 일 즉 세상의 역사에 개입해야만 했다. 물론 족장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 애굽의 세속사가 하나님의 구속사의 일부가 되었다.

하나님은 바로의 핍박을 이용하여 앞으로 애굽의 대적자가 될 모세를 출생케 하고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게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것들을 이용했다. 40년 후 말과 일에 능한 지도자가 되었다(7:22). 그런 모세가 마침내 자기 동족 히브리인을 돌보고 싶었다(7:23). 어느 날 히브리 인을 함부로 대하는 애굽 인을 몰래 죽였다(2:11-12). 그 다음 날 히브리 인들 끼리 싸우는 것을 본 모세는 이를 중재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애굽 인을 죽인 사건이 오히려 노출되었다(13-14). 피할 수 없음을 안 모세는 왕자(王子)의 신분을 버리고 광야(曠野)로 도망가야 했다. 그렇게 4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광야에서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양들의 목자(牧者)로 살아야 했다(2:15-20).

여기서 애굽에서 40년간 왕자로 산 모세와 광야에서 40년간 목자로 산 모세 사이 주목할만한 사실이 발견된다. 애굽은 농업 사회로 정착 사회였다. 이에 반해 광야는 유목민들이 사는 곳으로 비정착 사회였다. 정착 사회는 인간(人間)이 지배하는 곳으로 인간의 능력과 재주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비정착 사회는 자연(自然)이 지배하는 곳으로 인간의 힘과 능력 그리고 지혜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자(救援者) 노릇을 하려면 모세는 애굽에서 세상의 문화를 배워야 했고 동시에 광야에서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배워야 했다. 두 곳에서 각각 40년간 살았다는 사실은 정착 사회와 유목민 사회가 보여주는 삶과 문화 그리고 종교 면에서 보여지는 차이를 모세가 모두 체험했다는 뜻이다. 애굽과 같은 농업적인 정착 사회의 종교적인 특징이 다신론(多神論)이라면 유목민 사회의 그것은 유일신(唯一神)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훈련을 목적으로 모세를 광야로 보냈다. 모세는 애굽에서 왕자와 지도자로서 말과 일에 능했다(7:22). 자신감이 넘쳐 무엇이든지 자기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자신도 동족 히브리 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야 생활 후 그는 나이 들고 무능력하게 보이는 촌부(村夫) 비슷한 목자로 변했다.

애굽에서 천군만마를 지휘했던 장군의 기상은 어느덧 사라지고 힘없는 노인네가 되었다. 이젠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세상 일이 다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모세가 무능력한 사람처럼 처신한 모습과 자세에서 잘 증명된다(3:10-11, 13, 4:1, 10, 13-17). 하나님의 종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무능력(無能力)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이 때부터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깨닫기 시작하며 종()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할 것이다.

모세를 부르며 하나님은 족장의 언약(言約)을 모세에게 상기시켰다(3:6-10, 15). 그리고 그의 지팡이를 이용하여 초자연적인 기적들(4:1-17)을 행하도록 했다. 그의 소명은 전지전능한 여호와가 그의 족장에게 한 언약(言約)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과 깊게 관계됨을 알게 했다.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언약의 하나님은 인자(仁慈: 헤세드)하고 진실(眞實: 에메트)하여 반드시 이스라엘을 도울 것이란 확신을 모세에게 주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지도자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준비시켜야 했다. 애굽 인에 의한 핍박이 심해지자 비로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에 속한 백성이 아님을 깨달았고 입과 입으로 자신들에게 전해진 족장과 그 언약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당하는 고통과 그 심도가 커질수록 이들은 족장의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에 의존하며 더욱 열심히 도움을 간구했다(2:23-25). 하나님도 족장 언약을 기억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바로에게 보냈다. 애굽의 바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모세에게 응했다. 예전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을 가졌던 모세가 자신의 노예로 고생하는 히브리인의 지도자로 나타난 것에 흥미와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의 부강함과 번영에서 나오는 권세와 영광에 대한 자부심에서 바로는 모세 앞에서 여유를 부렸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다. 첫째 애굽의 신()들이 노예 히브리 인의 하나님 여호와에게 굴복할 수 없었다. 둘째 애굽의 바로가 노예 지도자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 없었다. 셋째 이스라엘의 노동력은 애굽을 위해 경제적으로도 절대로 필요했다. 그리고 넷째 쉽게 이스라엘을 보냄으로 올 이방인들의 조롱과 멸시를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모세와 바로 사이 싸움은 단순히 지도자 사이 자존심 싸움만은 아니었다(5:1-2). 여기에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싸움을 단순히 영적(靈的)인 전쟁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 사실은 신앙의 문제가 이 세상의 현실적인 문제와 절대로 단절되지 않음을 또한 뜻한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인간론(人間論)에 의해서도 이것은 잘 증명된다. 흙이라는 물질(物質)로 만들어진 인간 형태에 하나님은 그 코를 통해 자신의 생기(生氣)를 불어 넣었다(2:7). 그로 인해 물질인 몸 안에 동물적인 차원의 생명(生命)이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마음이라는 인격(人格)이 나타났다. 이로써 인간은 영적(靈的) 존재로서 정신적(精神的), 동물적(動物的) 그리고 물질적(物質的)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영()이 중심(中心)이고 근본(根本)이다. 헬라나 동양 철학(哲學)의 이분법(二分法)이 주장하듯이 영적 존재는 이들 세 존재들과 전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영적 존재인 창조주 하나님이 물질 세계를 창조한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주관한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26). 그러므로 앞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문화(文化) 영역에서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모세와 바로 사이 싸움도 이 사실을 잘 증명한다. 이 점에서 이 둘 사이 싸움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 싸움이었다. 하나님이 주인(主人)인 나라와 문화 그리고 인간이 신()인 나라와 문화 사이 싸움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상속한 민족은 인간 신이 지배하는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벗어나야 했다.

여기서 구약 시대의 구원이 장소의 이전이란 형식으로 나타남이 다시 확인된다. 구약의 구원은 항상 무엇으로부터(from)의 해방과 탈출을 뜻했다. 사도 바울도 구원의 이런 성격을 잘 설명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13-14)

그러나 장소의 의미를 갖는 구약의 구원은 구속사적(求贖史的)이어야 했다. 하나님은 십대 재앙을 통해 애굽을 보편적으로 심판을 행하는 한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또한 일했다. 이 모두 족장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성취에 구속(救贖)의 의미가 가미되었다. 마지막 재앙은 장자 죽음의 재앙이었고 이에서 구원 받는 유일한 방법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믿음으로 유월절 규례를 지킨 이스라엘의 장자는 모두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애굽의 장자는 아래로 노예로부터 왕에게 이르기까지 그리고 목축에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하루 아침에 애굽에서 곡성(哭聲)이 이곳 저곳에서 들렸다. 더 이상 애굽이 파멸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어 바로를 비롯한 애굽 인들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찾아와 애굽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이 요구하자 애굽 인들은 금은 같은 귀중품을 스스로 내주었다(12:31-36).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마침내 해방되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한 덕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장자 죽음이라는 상징적(象徵的)인 의미가 곧 신학적(神學的)인 의미가 되었다. 장자(長者)는 가문(家門)의 대()를 이을 자식이다. 아버지 기력(氣力)의 시작이기 때문이다(21:17).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가문의 멸망을 뜻한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에 의해 애굽이 망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의미했다. 이 심판 후에도 애굽은 여전히 이 지상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이스라엘의 장자는 보존됨으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에서 이스라엘은 구원 받았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은총으로 얻었다.

그럼 이스라엘의 승리 비결은 무엇인가? 믿음이었다. 이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여기 믿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재정리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항상 신실(信實)하다. 이 신실함은 택한 백성에게 보여줄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깊이 관련된다. 그러므로 늘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히 인자하고 성실하다고 기록한다(89:24).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실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한 언약은 반드시 성취(成就)되고 완성(完成)될 것이다. 하나님의 어떠함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늘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보인 믿음은 인간(人間) 측에서 보여주는 신념이나 확신 또는 자기최면 같은 심리적(心理的) 또는 정신적(精神的) 활동이 아니다. 족장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 언약에 대한 전적(全的) 신뢰감이었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은 십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전지전능함과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이스라엘에게 이미 증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믿음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어떤 공로(功勞)가 전혀 없었다. 이 점에서 믿음이란 단어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인자함과 신실함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그 다음 인간이 이를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결과로 나타난 믿음이라고 해석함이 합당하다.

이런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피를 본 죽음의 사자는 그냥 넘어갔다. 피는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이미 죽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사건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유월절과 무교절 규례를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지킬 것을 명했다(12:14-13:17).

출애굽 사건으로 비로소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해 출발했다. 이로써 이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놓는 아주 획기적인 구속사적인 사건이었다. 출애굽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새롭게 출생했고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월절을 명하며 이 절기로 해의 출발점이 되게 하라고 명했다(12:1-11). 이스라엘은 그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14일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에게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해가 시작될 것이다.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으로서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이는 마치 새로운 출생과 같았다. 사도 바울이 구원 받은 신자를 이렇게 소개한 이유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이렇게 이스라엘의 구원(救援)은 전적으로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한 구속의 결과였다.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사실적으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단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성취된 구원을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해야 했다.

구약의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절기들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부 하나님의 예정론(1:4-6)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구속(救贖)의 신학적(神學的)인 의미를 역사(歷史)라는 화판(畵板)에서 생생하게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 둘 사이 차이는 분명하다. 전자는 그림자라면 후자는 원형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 족장 언약의 역사적인 성취는 불완전했다면(10:1) 신약 시대 그 성취는 완전했다(10: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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