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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강에서 본 가나안(5)

장창수선교사(러시아)

by 김경호 진실 2015. 4. 8. 15:49

본문

결론: 이 세상은 교회와 성도에게 무엇인가?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출애굽 1세대가 아니라 출애굽 2세대였다. 이들 중 일부는 출애굽 할 때 20세 이하였다(14:22-38). 이들은 출애굽 사건과 광야 삶을 이미 경험했고 그리고 광야에서 출생하고 자란 광야 세대와 함께 가나안 정복전에도 참여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한다면 이들 중 상당수가 가나안 정복 후에 기업을 얻어 살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도 모두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가나안에서 출생하고 자란 가나안 세대만 남았다. 새로운 세대는 구속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들인 출애굽 사건과 광야 훈련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다. 이 사건들에 대해 부모로부터 말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2:8-15). 이들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계속 전개될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해야 했다.

이 점에서 구약의 가나안 세대는 신약 시대 초대 교회 신자들과 같고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신앙 삶을 사는 신자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 모두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거나 체험한 적이 없다. 가나안 세대의 신앙 방식은 오늘 우리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며 교훈이 된다(15:4, 고전10:6, 11). 구속사적 면에서 구약의 가나안 세대와 오늘 우리 사이 유사한 면이 있다. 우리들과 같이 가나안 세대도 장소의 이전(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으로 나타난 신분의 변화(노예에서 자유시민으로)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지도 않은 체 가나안에서 신앙 삶을 살았다.

가나안 세대나 우리들은 성경의 구속사적인 사건들을 지식(知識)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세대나 우리들이나 모두 육()이 아닌 영()으로 위의 구속사적사건들을 체험해야 한다. 이 체험이 왜 중요한가? 이 이외 오늘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유, 의미와 목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성(理性)이 아닌 믿음으로 성경에 기록된 과거 사건들을 묵상함으로 늘 되새김질해야 한다. 가나안 세대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삶 그리고 가나안 정복과 정착이라는 사건들에 대해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삶과 공생애,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재림 그리고 재림이라는 사건들에 대해 신학적인 의미들과 함께 날마다 묵상해야 한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8)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2:2-3) 이것이 바로 성도가 매일 먹어야 할 영적 음식이다(4:4).

이런 묵상을 통해 가나안 세대는 영적으로 세 가지 체험을 했다. 이것은 가나안이 삼중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삼중적 신앙 삶 자세가 가나안 세대인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시시때때로 시각을 달리하며 가나안 땅을 애굽처럼, 광야처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곳으로 보며 살아야 했다.


가나안은 애굽과 같은 곳이다.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가나안은 애굽과 다르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애굽인들처럼 가나안 땅에서 정착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외면적으로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 차이가 전혀 없었다. 이 왕국들은 모두 땅의 나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인과는 전혀 다르게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했다.

애굽은 농업을 위주로 한 정착 사회였다. 범람하는 나일강 덕분에 애굽인들은 어렵지 않게 농사를 이루며 찬란한 고대 문명을 세웠다. 그 당시 애굽은 낙원이었다(13:10). 애굽에선 왕족과 귀족들이 대지주들로서 지배 세력이었다. 이들은 농토와 같은 보이는 유형물의 소유에 의존해 힘과 권세를 얻고 이로써 백성을 지배했다. 이 점에서 애굽의 정착 사회는 공간과 물질에 지배되는 인간 사회였다.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위해 애굽 사회는 농업에 관련된 신()들을 숭배했다. 우상숭배는 애굽의 바로 왕정(王政)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수단과 방법이었다. 그리고 애굽은 인간이 주인으로 이성(理性)에 의해 지배되는 정착 사회였고 그 정점에 인간 바로가 있어 절대 왕정을 세웠다. 이 점에서 애굽의 정착 사회는 인본주의적이었다. 애굽에는 신분상 차별이 있었고 자유와 평등 개념은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애굽 사회는 오늘날 인류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이런 애굽에서 선민 이스라엘을 해방시켰다. 애굽 삶의 굴레에서 이스라엘을 벗어나도록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 무조건적 은총의 결과였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에서 애굽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이었다.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 사고 방식도 달라져야 했다. 겉은 다르지 않지만 속은 완전히 달라야 했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출생과도 같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 규례를 명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12:2)

유월절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역사를 맞을 것이다.이들은 애굽에서 출생했고 자랐으며 노예였지만 그곳에서 살았다. 출생부터 이스라엘은 철저히 애굽인이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인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에서 살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원은 바로 유월절 사건에 있었다. 새로운 출생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윤리로 무장할 것을 요구했다.

예전 애굽에서 인간 바로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지만 가나안에선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 여호와에게만 순종해야 했다. 애굽에선 바로의 말이 절대적이었다면 가나안에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애굽에선 자연이나 인간이 신()이었다면 가나안에선 창조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었다. 가나안에선 종교나 신앙 삶도 애굽에서와 완전히 달라야 했다.

정착 사회인 애굽에선 인간이 주인이므로 이성(理性)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가나안에선 하나님이 참 주인으로 그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따라 살아야 했다. 이성에 따르면 성공과 형통과 행복 그리고 부요함이 좋은 것이고 그 반대는 나쁜 것이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어떤 일이든지 섭리한다.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가나안에서 쓸데 없는 가르침이었다. 구원 이후 이스라엘의 사고 방법과 삶 자세에도 대변혁이 일어났다.

애굽에선 자유의지가 없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나안에선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야 하는 자유인이 되었다. 애굽에서 주인인 애굽인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가나안에선 자기 의지로 스스로 율법을 행하며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했다. 여기에 또 다른 차이가 있었다. 애굽에선 노예로서 아무리 수고하고 고생해도 모두 주인인 애굽인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보상(報償)도 없었다. 그러나 가나안에선 율법을 지키며 자의지적으로 행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상급(賞給)을 받을 것이다(고전15:58). 이스라엘의 삶 목적과 내용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경고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16)

가나안에서 애굽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권면과 경고였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는 마치 개와 돼지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주워먹는 추잡한 행위와 같을 것이었다(벧후2:22).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부를 것이다(28:68). 이를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애굽 사이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남을 알고 애굽을 버리고 피하는 삶을 가나안에서 실천해야 했다.

애굽은 땅에 속한 인간의 나라였다면 가나안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가나안 세대에게 애굽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애굽과 같다. 이 세상도 땅에 속한 인간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출생부터 이 세상의 시민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우리들도 가나안 세대처럼 영적 변화를 체험해야 한다. 영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에서 우리들도 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잘 이해한 사도 바울도 구원 얻은 신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이 존재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계속 이렇게 설명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3: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0)

사도 바울은 총체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2:12-14)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1-5) 이렇게 이 세상은 애굽과 같아 성도들이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곳이다.


가나안은 광야와 같은 곳이다.

애굽을 떠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쳐야 했다. 출애굽 사건 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12 정탐꾼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더더욱 그랬다(14). 이에 노한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를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살게 하면서 이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했고 출애굽 2세대를 훈련시킨 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로 했다.

광야에 사는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잘 돌보았다. 모세는 이에 대해 말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8:4-6)

국역 성경에서 징계로 표현된 원어는 본래 훈련이란 의미를 갖는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출애굽 사건과 광야 삶 사이 긴밀한 관계 때문이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신분의 급격한 변화를 그리고 광야 삶은 그 변화에 맞는 삶을 사는 훈련을 각각 뜻했다. 이 훈련은 향후 가나안에서의 정착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이 훈련의 목표는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모세가 더 설명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2-3)

결국 광야 삶은 두 가지 목적을 띤 훈련과 연단이었다. 첫째 그 마음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여부를 알고자 함이었다. 둘째 사람이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이 두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늘 낮추었다. 그 방법은 어려움과 고난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했고 그리고 곧 그 어려움을 풀어주었다. 하나님의 양동(兩動) 작전이 바로 훈련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편이면서 동시에 대적이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알기 원했고 동시에 선민 이스라엘은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음을 가르치고자 했다.

애굽은 농업에 기반을 둔 정착 사회였다. 그러나 죽음의 땅 광야에선 이스라엘이 비정착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야 했다. 애굽에선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광야에선 인간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했다. 애굽인들은 자신의 노력과 땅에 의존하며 살았지만 광야에선 하늘과 신()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다.

이렇게 광야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인본주의적인 삶과 사고의 방식을 버리도록 돕는 아주 훌륭한 훈련 장소였다. 이성과 능력으로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에게 굴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안내해 주는 인간의 이성은 정착 사회에서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말씀을 믿고 어떤 악조건 아래서도 율법을 지킴으로 출애굽의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여야 했다. 이런 믿음과 신뢰는 마치 광활한 바다나 막막한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무력화된다. 이성의 지도보다 믿음이란 나침반이 가르치는 방향을 따라 사는 방법 밖에 없다.

유감스럽지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지 않았다. 번번히 이들은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다. 하나님 자신이 세운 계획을 위해서였다(32:11-14, 20:9).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 이스라엘도 애굽인들처럼 정착 사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가나안 세대는 광야 훈련을 받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가나안에 살면서 광야에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정착 사회에서 살면서도 비정착 사회에 사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세대에게 모순(矛盾)된 삶의 방법이 발견되었다.

이 삶의 방법은 이스라엘의 조상 때부터 있어 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8-10)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이미 정착해 사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았다. 이들에게는 이를 가능케 할 정도로 충분한 부와 재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착 삶을 피하고 비정착 삶을 택했다. 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이 경영하고 지을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정착민은 부()를 창출해 주는 공간(空間)에 의존하며 산다. 그러나 유목민 같은 비정착민은 공간이 아닌 시간(時間)에 의존하며 산다. 항상 이동하기 편하게 살아야 한다. 이동 시기를 놓치면 그만 풀을 찾지 못해 목축은 물론 결국 사람 목숨까지도 다 잃게 된다. 그러나 가진 것들이 너무나 많으면 이동하기가 너무나 힘들다(12:1-2). 비정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줄 안다.

징기스칸은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정복했지만 정복지에서도 항상 천막 생활을 했다. 그의 아들들도 정복지의 황궁이 아니라 황궁 밖에 친 천막에 살도록 그는 권했다. 정착민의 삶과 사고에 젖어 안주하게 되면 제국 운영이 힘들어지고 결국 망할 것을 그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권면을 무시했고 그 결과 원나라는 다시 중국의 한족에 의해 망했다.

비슷한 일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것을 모세도 미리 알았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8:11-14)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31:29)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정착 사회를 이루며 살게 되어도 비정착민 같이 살아야 했다(35:1-10).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늘 명심하고 스스로 훈련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즉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가나안에서 스스로 받아야 했다.

하나님도 이를 돕기 위해 가나안에서도 양동(兩動) 작전을 펼 것이다(11:10-17). 그 목적은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 여부를 알기 위함이며 정착 사회에서도 사람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곳이다.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800여 년간 살았다. 사사(士師) 시대부터 사울의 왕정(王政) 시대까지 400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남북 왕조가 각각 멸망하기까지 400년 동안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았다. 족장의 언약(言約)은 문자적으로 역사상 성취되었다.

가나안 땅에서 세워진 다윗 왕국은 구약의 구속사를 최정상에 올려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이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 단 두 세대 동안 이 지상에서 최고도로 번성했다. 그 후 다윗 왕국은 쇠퇴의 길을 갔다. 그러나 구약의 다윗 왕국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다윗 왕국은 창세기 1-2장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창세기 3장 이후 구속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통치를 모두 문자적으로 실현시켰다. 이 때문에 다윗 왕국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구속사의 최절정 자체였다. 창세기 1-2장의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 대리자를 통해 실현될 것이다(1:26).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문화 영역에서 성취될 것이다(1:28). 타락 이전 종교와 문화가 전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군들의 수가 이 땅에 증가하여 편만해지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는 저절로 이 땅에 실현될 것이다.

이것은 다윗 왕국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철저한 법치(法治)가 실현되었다. 이 때도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였다. 다윗 왕국의 백성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은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확장을 의미했다.

창세기 1-2장까지 설명된 하나님의 통치(또는 나라)는 창조(創造: creation)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타락 사건을 기록한 창세기 3장 이후부터 하나님의 통치는 구속(救贖: redemption)에 근거할 것이다. 구속이 없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윗 왕국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출애굽 사건이라는 구속사적인 사건의 최종적인 목적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것이었다. 이 면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앞으로 올 메시아에 의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떤 것임을 두 눈으로 보고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로써 신약 시대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인 하나님의 목적에서 재확인된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15:17-18)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19:3-6)

종래 기독교는 출애굽 사건의 주목적이 가나안이라는 복락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점에서 가나안 정착은 천국 입성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세워 이방 나라를 구속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 땅을 기점으로 그 영역을 이방 나라로까지 확장시켜 나갈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 시킨 후 광야 40년 동안 훈련시킨 이유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준수한다면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 가운데 뛰어난 민족과 나라가 될 것이다(4:5-8). 이로써 이스라엘은 만민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신임을 알릴 것이다. 서서히 이방인들이 선민으로 편입되며 하나님 나라는 점점 더 이 세상에 확장될 것이다(87).

가나안 땅이 갖는 이런 신학적인 의미는 신약 시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구원 받고 난 이후 성도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목적으로 신앙 삶을 살지 않는다. 구원의 은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확장시킬 소명과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기독교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한 관점 즉 세계관과 인생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소극적이며 비관적인 관점에서부터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것으로…… 이런 관점은 성도로 하여금 종전과 달리 이 세상에 대해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도울 것이다. 즉 현실참여적인 신앙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이것은 창조 신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정당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할 목적으로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었고 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인간에게 통치를 위임했다(1:26). 비록 타락 사건으로 이 목적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메시아를 약속함으로(3:15) 그 목적 달성을 다시 천명했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회는 구원의 양면인 무엇으로부터 해방무엇을 향한 해방, 이 둘(from for 또는 toward)을 모두 고려한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전자(from)만 강조됨으로 기독교 교회는 지금까지 현실도피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그러나 후자(for, toward)도 동일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해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종말론(終末論)에 의하면 이 세상은 불로 심판 받아 멸망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세워지고 확장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임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달란트를 받는다(25). 충성스럽게 받은 분양을 배가시키느냐 여부가 상급의 정도를 결정할 것이다.

결론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하나님은 늘 족장에게 준 언약을 기억했고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받았다(2:24, 6:5). 가나안에 사는 이스라엘은 이를 잊지 말아야 했다(5:15, 7:19,8:2, 18, 9:7, 15:15, 24:18, 22, 25:17, 1:3).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32:7)

하나님과 함께 왕국 언약(삼하7)을 맺은 후 다윗은 감격스런 나머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삼하 7:23-24)그의 가문 후손이 그런 영광스런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계승할 것이라는 계시에 그는 감격하며 그 근거로 과거 출애굽 사건을 그도 언급했다.

서서히 종말(終末)을 맞게 될 남방 유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를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44:2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46:9)

예레미야 선지자도 남방 유다의 말기 영적 상태에 대해 통탄해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2:6)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7:25-26)

그는 유다의 멸망도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에게 불순종한 결과일 것을 예언했다. 주께서 징조와 기사와 강한 손과 드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이 들어가서 이를 차지하였거늘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주의 도에 행치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하신 일을 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나이다 (32:21-23) 에스겔도 같은 내용의 계시를 남겼다(20).

다니엘 선지자도 기도 중 조국의 멸망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9:1-16).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9:12-15) 호세아도 같은 계시를 남겼다(11:1-2, 13:4-6). 그리고 포로 귀환 후에도 이스라엘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야 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4:4)

이스라엘이 항상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나님은 매년 삼대 절기(節期)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23:17). 이에 대한 약속은 다음과 같다.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34:24)

이 절기들은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초막절)이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앞으로 올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맥추절과 칠칠절은 그 후 50일 뒤에 있을 성령 강림을 그리고 수장절과 초막절은 그의 재림으로 인해 완성될 구원을 각각 예언했다. 이런 절기들을 지키며 이스라엘은 앞으로 메시아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될 자신들의 구원을 믿고 소망하며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삼대 절기는 이스라엘에게 항상 종말론(終末論)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유월절은 년초(年初), 오순절은 년중(年中)에 그리고 초막절은 년말(年末)에 행해졌다. 일년을 단위로 이스라엘은 매년 절기를 준수함으로 이스라엘의 구속사의 출발과 발전 그리고 그 종말(終末)을 간접적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반면 이 절기들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이스라엘이 더욱 믿고 소망하도록 도왔다. 이스라엘은 절기를 지킴으로 어린양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유월절이 가져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순절과 초막절을 통해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매년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 지켜지는 절기들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를 기억하도록 도왔고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에서의 삶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했다.

기억하라!는 구약의 가르침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들은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에 발생했다. 이 사건들 덕분에 신약 시대 교회와 성도들이 출생했고 이 땅에 계속 존재하게 되었다. 신약 시대의 구원(救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잊으면 절대로 안 된다.

이렇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가나안 땅과 오늘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서로 다르지 않다. 가나안이 세상으로 대체시켜도 의미와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다. 신약 성도에게 이 세상도 구약의 가나안처럼 삼중 모습을 띤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약 성도에게도 삼중적인 삶 자세가 나타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분명히 정착 사회의 일원으로 산다. 이 때문에 성도에게도 이성의 지도(地圖: map)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성은 완전 조건은 아니다. 이 세상은 때때로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세계1, 2차 대전 그리고 21세기에 두 번이나 발생한 세계적인 금융 사태와 위기 같은 사건들이 발생할 때 인간의 이성은 늘 무력하다. 이 때 이성의 지도보다 믿음의 나침반(羅針盤: compass)이 더 유용하고 필요하다.

그리고 신자는 이 세상에서 정착 사회의 풍요와 부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때때로 경제적,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허락한다. 그러나 이로써 하나님이 교회와 신자들을 시험함을(8:12-18)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때문에 광야의 비정착 사회에 사는 것과 같은 자세로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성도들에게 종국적인 천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한 대로(15:19) 이 세상은 성도에게 광야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영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광야와 같아 곳곳에 위험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도 시시때때로 시각과 관점을 달리하며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피하며 살아야 할 애굽으로, 자기부정이라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할 광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켜 나가야 할 가나안 땅으로…… 이 훈련 면에서 신구약 사이 차이는 전혀 없다. 신구약 성도 모두 이 세상 것들을 누리면서도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참여하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발은 이 세상에 디디고 있지만 머리를 들고 눈은 하늘을 늘 향해야 한다. 신구약 시대 진실하고 성숙한 성도들은 이렇게 이 세상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삼중적인 세계관과 그에서 나오는 삼중적인 자세만이 신앙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요즘 한국 교회는 예전과 달리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겠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필요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동족 사회의 모든 일에 참여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애굽과 광야라는 사실을 잊은 결과 자기부정(自己否定: self-denial)이라는 훈련에 게을렀고 그 결과 미성숙과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동족 사회로부터 온갖 비난과 비판을 듣고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이유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개혁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모두 균형 잡힌 성경적인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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