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주차. 더러 좋은 사람들
행18:12-17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으나,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 배경지식
오늘의 배경은 고린도 법정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바당국에 고소를 하여 바울이 법정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갈리오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와 정책 등에 대해 배경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갈리오가 누구입니까?
- 로마제국의 속국인 히스파니아 울테리오(현재 스페인)의 수도 코르투바에 마르쿠스 안내우스 세네카(Seneca)라는 한 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이고 둘째 아들이 루키우스 안네우스 세네카(주전4~주후65)입니다. 아버지를 大 세네카라 부르고 아들을 小 세네카 혹은 그냥 세네카라 부릅니다. 이 아버지는 정치적 야욕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이 갓 걸음마도 채 떼기 전에 로마로 이민을 갑니다. 그곳에서 자식들을 로마식으로 교육을 시킵니다.
- 특히 둘째인 세네카가 영특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칼빈이 1532년에 저술한 <세네카 관용론>의 주인공입니다. 칼빈은 폭군 네로의 폭정에 항거한 세네카의 정신에 대해 인문주의적인 개혁의 입장을 피력합니다. 세네카는 스토아 및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철학과 수리학을 배우고 31년부터 관직에 진출합니다. 그런데 충직한 그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개인적인 일탈에 치우쳐 미친 짓을 일삼던 칼리굴라 황제와 자주 부딪칩니다. 그래서 눈 밖에 나 한직을 떠돕니다. 41년에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행18:2)가 황제가 됩니다. 황제는 세네카를 중용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황제의 조카딸이자 공주인 율리아 리빌라와 간통혐의를 받고 코르시카로 추방을 당합니다. 아마 억울한 누명을 쓴 것 같습니다. 그러다 7년 만에 황후 아그립피나에 의해 세네카는 다시 로마로 귀국하고 그녀의 뒷배를 업고 50년에는 집정관직에 오릅니다. 그리고 54년에 아그립피나 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직에 올리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살합니다. 이후 세네카는 부루스와 함께 권력의 제 2인자가 되고 특히 황후의 간청에 따라 네로의 스승이 되어 약 8년간 네로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네로는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갔습니다. 62년에 부루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세네카는 은퇴를 하고 모든 관직을 물러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특히 친구에게 보내는 총 124통의 서간집은 스토아 철학의 실천윤리를 말하는 것으로 명저로 손꼽히고 이외 철학책으로 ‘노여움에 대해’, ‘행복론’ ‘대화’ 등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네로는 세네카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65년에 세네카는 반역죄로 몰렸고 결국 자살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다음으로, 세네카의 형이자 마르쿠스 세네카의 첫째 아들이 노바투스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오늘 12절에 나오는 26번째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 된 갈리오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큰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당시 실세였던 루시어스 주니어 갈리오에게 양자로 보냅니다. 이후로 노바투스의 이름이 갈리오로 바뀌어 졌습니다. 갈리오는 매우 상냥하고 온순하며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동생 세네카는 그런 형을 존경한 나머지 형을 위해 ‘de vita Beata'라는 책을 써서 헌정했고 여기서 형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몸이 허약했다는 것입니다. 갈리오는 아가야 지방의 기후로 인해 폐출혈이라는 질병에 걸려 총독으로 부임한 지 2년 만에 물러나 이집트로 가서 휴양을 합니다. 이때가 아마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러 있던 51~52년 사이로 봅니다. 휴양을 마친 그는 54년에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원로원 의원이 되지만 동생 세네카와 함께 반역죄로 몰려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둘째, 로마제국의 통치정책이 무엇입니까?
- 알다시피 로마제국은 로마라는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영토를 확장하고 점령지를 속국 또는 식민지역으로 삼아 통치하던 제국주의의 나라였습니다. 당연히 식민지의 통치는 로마 귀족출신이거나 원로원이 인정한 정치인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한 둘도 아니고 여러 식민지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그리스의 여러 우수한 제도나 관습, 문화 등을 수입하여 차용했습니다. 특히 라틴어와 함께 헬라어를 공용했고, 그리스의 철학을 기초로 로마시민을 교육시켰습니다. 그중 로마에 의해 가장 발전된 제도가 바로 민주적인 법 제도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는 자기가 고소를 강했을 때 누구든지 합당하게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 다음으로 로마제국이 신경을 쓴 부분이 뭐냐 하면 종교정책입니다. 그들은 종교문제를 잘못 다루면 통치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체험한 바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만 하드라도 예수님 사건을 잘못 처리한 결과 많은 곤욕과 후유증을 치룬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지 국가 백성들이 섬기는 종교의 내용을 검토해서 로마 행정 당국의 질서와 사회 질서의 상식선에서 크게 혼란을 일으키는 종교가 아니면 거의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유대교도 이런 차원에서 합법적인 종교로 용인되어 로마법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의 법정에 고소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의 고소
자, 이제 12절부터 본문 속으로 여행을 하겠습니다. 연대적으로 갈리오가 아가야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때를 약 52년경으로 봅니다. 갈리오가 고린도에 오게 된 것은 아가야 지방의 총독관저가 고린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약 9~10개월째 거류할 때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약 2년에 걸쳐 수행하는데 그중 2/3를 고린도에서 보냅니다. 11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총 18개월을 체류합니다. 그만큼 타지역에 비해 고린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특히 하나님이 예고한대로 고린도에는 많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 에비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타락한 도시에서 가장 많이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장으로 보면 거의 ‘물 반 고기 반’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신나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고 회심하는 고린도인들이 늘어갑니다. 여기에 유대인 회당장들도 속속 개종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쪽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조용하던 자신들의 텃밭이 바울로 인해 소란해지는 것이 매우 싫었습니다. 가만히 있다간 바울로 인해 유대교가 무너질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니, 이 사람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종교를 퍼트리고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전하는 것은 유대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불법적인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유대인들은 로마의 사람들에게 바울과 유대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 바울을 로마의 법정에 고소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유대인들의 교묘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고소한 내용이 인정되어 바울의 행동이 불법으로 결정날 때에는 로마법에 따라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활동은 불법적인 종교할동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이 때는 기독교와 교회가 제자리를 잡거나 안정적인 위치를 점하지 못할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기독교의 싹이 아예 피지도 못하도록 로마법으로 재물쇠를 채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유대교, 즉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교에서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그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유대교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거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근거 없이 바울을 율법을 어기고 로마사회를 혼란에 빠트린다는 죄목을 씌워 법정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3. 갈리오라는 사람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법정에 섰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고 자기가 직접 나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귀어졌습니다. 총독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갈리오가 유대인들의 고소를 들어보니 너무 황당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끌려온 이 사람이 고린도 시민을 모아 내란을 선동했거나 어지러운 풍속을 전하였거나 범법행위를 하여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덕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켰다든지 로마법상 불법을 행하였다면 자신이 직접 재판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런 내용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14-15절입니다.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으나,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리고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한 마디로 고소를 기각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무죄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한 마디 변호 없이 변호사 선임비도 필요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가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해도 소란 떨지 마세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무섭다고 두려워 떨며 호들갑 피우지 마세요. 이런 일을 아시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미리 9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덤덤한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리오라는 사람의 지혜로운 처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한 지방의 통치자로서 굉장히 법적인 지식과 냉철한 분별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내용이 로마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고로 인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일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오는 행정관으로서 매우 분명한 통치방침을 가진 사람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통치자였습니다. 특히 갈리오가 사용하는 어휘를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갈리오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출중한 사람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바로 15절에 나오는 세 단어, 즉 언어와 명칭, 그리고 율법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로고스와 오노마, 그리고 노모스인데 이런 단어들은 당시 사회에서 매우 고급 단어입니다. 로고스(말씀)이라는 단어는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나 철학자들의 전용어입니다. 일개 지방총독이 인용할 수 없는 아주 격이 높은 어휘라는 것입니다. 세네카의 집안이 얼마나 수준 높은 집안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품격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에 달렸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를 말로 표현합니다. 누가 가장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입니까?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닮은 사람입니다. 말이 성경말씀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가장 하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적어도 개혁교회의 성도라면 교리적인 용어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계시가 무엇인지. 영감이 무엇인지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억울한 사람, 소스데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가끔 주인공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거나 엉뚱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에도 괜히 구경하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말입니다. 예수님 잡으러 왔다가 베드로에 의해 귀가 짤린 말고는 어떻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의 일에 동참하는 일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등장하는 소스데네도 같은 처지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법정에서 바울을 변호하기 위해 같이 왔을 것입니다. 바울이 무죄판결을 받자 화가 덜 풀린 유대인들이 엉뚱하게 이미 바울로 인해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회당장 소스데네에게로 화살을 돌려 분풀이를 가합니다. 이런 소스데네를 기념하기 위해 바울은 고전 1장 1절에서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소스데네가 두들겨 맞을 때 바울이 좀 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을 위해 아낌없이 선심을 쓰던 갈리오가 소스데네의 일에는 상관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갈리오는 법정에서의 일이 끝나자 유대인들끼리의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히 갈리오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세상 가운데서 ‘더러 좋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매우 인격적이고 도덕적입니다. 매우 예의가 바르고 고품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만면에 미소를 띄고 웬만한 일은 참고 넘어가는 아량도 가졌습니다. 과연 배운 사람답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매우 좋은 사람인 것 같으면서 오직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갈리오는 누가 진리를 위해 매를 맞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매우 공평무사하게 훌륭한 판결을 했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 빼고 열심히 삽니다. 더 난감한 일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복음을 영접하기가 어려운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법 없이 사는 사람’으로 호평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높이 숭상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치고 복음을 영접했다는 소식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어령 박사의 회심사건은 21세기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무튼 할렐루야입니다.
5. 무죄판결의 영향
결과적으로 교회사에서 갈리오의 판결은 복음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울에 대한 무죄판결은 로마제국내의 모든 지역에서 하나의 판례가 되어 더 이상 기독교의 복음전파 활동이 범법행위가 아니라는 선례가 된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이때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모든 복음전도활동은 완전히 불법적인 활동이 되어 기독교는 더 이상 온 세상에 전파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차원에서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기야 인간이 이해하는 신이라면 그 신을 어찌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입장에서는 법정에 끌려갈 때 또 박해를 받는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전파를 합법적인 종교활동으로 만드시기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생명구원을 위해 쉼 없이 일하십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은 우리의 재능과 물질과 모든 당야한 사람의 방식을 통해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지내는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도구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도구의 주권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자 나의 주인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구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쓰여집니다. 만약 당신의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지 못한다면 빨리 회개하십시오. 회개가 곧 축복입니다. 아멘.
| 18주차. 반쪽짜리 지식 (0) | 2015.05.06 |
|---|---|
| 17주차. 바울의 변화와 겸손 (0) | 2015.04.28 |
| 15주차. 말씀에 붙들린 사람 (0) | 2015.04.14 |
| 14주차. “부활로 살라” (0) | 2015.04.09 |
| 13주차. 우상숭배의 땅, 아덴 (0) | 2015.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