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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차.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5. 2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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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차.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19:1-10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 중단 없는 사역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선교여행 중 2차와 3차에는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2차를 마감하자마자 바로 3차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1823절에 의하면, 2차 여행을 마친 바울은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바울은 바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으로 떠나갑니다. 왜 바울은 안디옥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을까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상 이때쯤에 안디옥교회에 사정이 생겼을 것으로 봅니다. 알다시피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주의 제자들을 선교사로 훈련시키고 파송하는 교회였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유익보다 복음의 전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안디옥교회는 선교의 모델로서 기독교역사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런 안디옥교회를 촛불에 비유합니다.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 촛불이야말로 안디옥교회가 역사상에서 감당했던 사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이름만 남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안디옥교회를 그런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세우신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바울이 2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즈음엔 안디옥교회는 더 이상 선교여행을 도울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교회가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더 이상 바울에 대한 환대도 없고 3차 여행에 대한 지원이나 파송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디옥교회에 오자마자 오래 마물지 못하고 바로 자신이 앞서 뿌린 복음의 현장으로 다시 달려갑니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모든 제자라고 말한 부분에 감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보통 사람들인 우리는 귀찮아서라도 대충 몇 사람 만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실함은 모든 제자들에게 미칩니다. 우리의 게으름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놓고 회개하고 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이런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에게 휴식은 사치였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쉼 없이 달음박질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는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만나는 이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일이 밀리고 힘들어도 바빠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정작 죽을 사람도 아니면서 죽는다고 엄살을 부립니다. 이런 엄살은 철저히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엄살하는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엄살 부리는 자에게 관용을 보이지 않습니다. 엄살은 생색내는 일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기에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보인 위선입니다. 바리새인은 항상 허세를 부리고 겉으로 위장하고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은 이런 위선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잘난 체 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에 꼴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은 자신이 속에 품은 것들을 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의 에 따라 어떤 사람인가를 유추합니다. 이런 유추는 과학적이거나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틀린 것도 아닙니다. 일자 무식꾼도 사기꾼의 꼴을 알아보고 바람둥이의 꼴을 눈치 챕니다. 그래서 좀 질이 나쁜 사람들의 꼴은 꼴이라 하지 않고 꼬라지라고 비하합니다. 우리는 거듭난 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도 거듭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의 꼴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일꾼의 꼴을 하고 다닙니다. 바울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의 꼴도 바뀐 것입니다. 탐욕과 거짓과 자기 의로 똘똘 뭉쳤던 과거의 바울의 얼굴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바울의 꼴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꼴이 바뀌니 얼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나는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이 얼굴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엄살 부리지 않습니다. 며칠을 굶고 허기에 지쳐 쓰러지는 순간에도 이런 얼굴은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잃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모든 꼴이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2. 정통과 비정통의 분기점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신학적으로 뿐 아니라 기독교회의 교파가 나누어지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통 개혁주의와 오순절 계통의 교파가 나누어지는 분기점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한 마디 말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2절에 있는 바울의 질문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다소 엉뚱한 이 질문 하나로 정통과 비 정통이 나누어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겠습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파에서는 이 바울의 말을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시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믿을 때에믿은 후에는 전혀 다른 시제가 됩니다. 앞의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말함이고 뒤의 것은 일단 믿음의 일과 성령세례의 일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알다시피 역사상에서 오순절은 새로운 성령세례 이론을 들고 나타나 반세기만에 기독교내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한 신종교파입니다. 이들은 일단 기존 신자들의 미지근한 신앙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장로교 신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좀 미지근합니다. 오순절 사람들이 보기엔 장로교분들이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것 같기도 한 겁니다. 신앙생활이 뭔가 화끈하고 확실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또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 신자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평소에 교회 일에 관심도 없고 등한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열심을 내고 충성 봉사를 합니다. 언제나 말씀을 듣고도 시큰둥하던 사람이 무언가에 데인 사람처럼 뜨겁게 반응합니다. 기도를 시켰더니 웬만한 사역자보다 더 은혜롭게 기도를 하고 방언의 은사도 받고 그렇게 팍팍하던 사람이 아주 부드럽게 변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오순절 사람들은 아, 믿음을 받은 것과 변화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의 세례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고도 미지근하게 사는 까닭은 불같은 성령세례를 통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성령의 역사와 변화를 위한 성령의 역사가 따로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이론이 이른바 이중세례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성령세례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기존의 성령론을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정통파는 믿음과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동일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 믿음이 주어진 것이 성령세례이고 이 세례는 한 번 주어지면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는 영구적인 것으로 믿습니다. 이걸 바꾸기 위해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성경의 구절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찾아 낸 본문이 바로 바울이 말한 이 구절입니다. 오순절은 이 문구에 있는 시제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어떻게요?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 믿을 때에믿은 후에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자들의 무한 책임이 얼마나 큰 가를 알아야 합니다. 문구 하나 해석이 뭐 그리 대수로울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은 차이 하나로 교파가 나뉘고 교단이 갈라서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자구 이단이 발생하고 교파가 분리되는 대부분의 원인은 이렇게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학이 중요하고 신학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정통 신학을 버리고 뭔가 새로운 이론을 찾아 나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기존 신학이론을 정당화하고 우상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존의 질서를 존중하는 전제를 두고 성경 안에서 개혁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정통 신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시도를 하는 것이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얼마나 역사적 정통의 개혁주의 신학을 위험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개혁은 성경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성경을 벗어난 개혁을 바른 개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대한민국을 개혁한답시고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고 무너뜨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땅에 좋은 신학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3. 성령세례에 대한 바른 이해 

 

 

 

 

오순절 사람들이 뭐라고 주장하고 믿든지 간에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를 주장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이미 성령이 내주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내주했다는 것은 곧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완전한 요소가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완전하게행하십니다. 한 번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무슨 새로운 능력을 받기 위해 다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완전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뭔가 부족하여서 다시 무엇을 보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결과를 빚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과 성령의 내주를 동일시하며 성령 세례를 단회적 사건으로 말합니다. 믿음 다로 성령 세례 따로, 즉 이중 세례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믿을 때성령을 받았느냐의 시제가 같습니다. 원문이 그렇게 말합니다.


 

 

 

4.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로부터 질문을 받은 어떤 제자들이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바울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이 대답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됩니다. 이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이고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령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는 분명히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1)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세례는 같은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가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가 다르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자신의 것은 물세레이지만 예수님의 것은 불세례라고 비교합니다. 그렇다면 물세례와 불세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는 메시아, 즉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영화로 치면 일종의 예고편에 해당하고 강연으로 치면 주인공을 소개하는 사회자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명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철저히 자기는 숨기고 주인공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진짜 능력이 많으신 분이 온다고 소개합니다. 자기는 뒤에 오시는 분에 비하면 그분의 신을 들고 쫓아다니기에도 감당치 못할 존재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단지 주님이 오셔서 기름 부으실 구원의 역사를 소개하고 준비하는 데 동원된 선지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베푸는 세례도 물세례에 불과하지만 뒤에 오시는 분의 주시는 세례는 성령과 불로 주신다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왜 비금 바울의 질문을 들은 에베소의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 말은 이 사람들이 성령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아볼로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찍부터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서 성경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지식에서 보면 반쪽짜리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기 전까지 복음의 핵심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구약의 지식에는 밝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고 그 구원의 효력이 이미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 요한으로부터 성령의 존재를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이미 강림하였고,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불같은 세례로 임한다는 사실에는 깜깜이였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사람들은 이미 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지식을 담은 제한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세례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구원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은 자신을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하도록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지식을 허락하십니다. 다만 그 지식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사는 더 큰 구원의 감사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적극적으로 침노하고 더 깊이 침노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더 크게 더 깊이 열리고 더 많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받아먹기 위해 입을 더 크게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나라의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선 입을 크게 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일에는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 이런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즉각 반응합니다. 4절을 보세요. 바울은 지체 없이 그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5절에서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번에는 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보니 바울 사도가 직접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그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 표로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이런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의 사람들에게는 누가 보아도 믿을 수밖에 없는 표징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표징들을 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성령세례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성령세례는 계속됩니다. 다만 지금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 때보다 많은 때입니다.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표징을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영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믿을 사람들에게 표징은 허례허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가절대적인 표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손에 가지지 못한 초대교회의 사람들과 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손에 들고 다니는 우리가 어찌 같은 은혜이겠습니까? 아마 천국에서 초대 교인들을 만나면 위를 굉장히 부러워 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에게 풍성히 주시기 위해 지금도 성령님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불같은 세례를 주십니다.


 

 

 

5. 결어


 

 

 

중요한 것은 불세례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기도충만이요 말씀충만이요 사랑충만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충만하지 못하면 마음이 뜨겁지 못합니다. 늘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를 받고 나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여기서 우리는 성령충만의 반대 현상으로 술이 등장합니다. 식당에 가면 일하시는 아줌마가 가끔 술은 뭘 할거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늘 술에 취해 있으니 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자주 술을 먹는 일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술 먹는 일과 성령 충만의 일을 대비시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술을 먹는 일은 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일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술에서 개어나 성령충만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은 사람 중에 12명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이것은 구언이 다수가 아니라 소수에 해당한다는 진리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더욱이 그 뒷부분인 8-10절을 보세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8절에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석 달 동안 열심히 복음을 강론합니다. 그런데 9절에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을 비방하고, 대신 성령 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바울이 다로 세워 두란노서원을 세워 그들에게 신학수업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의 말씀 중에서 키워드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입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여러분 모두는 자신을 점검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를 무엇으로 판가름하십니까? 그것은 자신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면 즉시 회개하고 성령세례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설교가 지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19103절을 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님의 말씀에 맛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의 맛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아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물세례가 필요 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기에 여러분이 지금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언제든지 상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령세례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충만을 위해 열심히 분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없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강림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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