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주차. 주의 말씀이 흥왕하더라
본문: 행19:11-20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 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멋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 지라.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1. 성령 충만한 삶
지난주에 우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은혜라면 성령충만은 구원받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 은혜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성령충만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에 대해 경계해야할 잘못된 인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을 양적인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00이라는 충족수가 있는데 충만의 개념을 100의 양을 다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면 성령충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개념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성도의 능력있는 삶을 말하기 때문에 능력이 많으면 성령이 충만한 상태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물론 양적인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혹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충만은 성도의 신앙과 삶에 미치는 강력한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표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큰 능력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성령충만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시지 않으시고도 얼마든지 이 우주를 들었다 놨다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특별한 힘과 권능을 주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 하고 쇼를 하라고 부추기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꼭 우리 손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추방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 혼자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순종이 가장 큰 믿음의 표시입니다. 순종이 가장 위대하고 모범적인 예배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감사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겸손도 없습니다. 순종과 감사와 겸손이 경건의 요체입니다. 경건이 가장 거룩한 삶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라고, 거룩해지라고 성령충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교만해집니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거룩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성령충만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자아충만이 되고 자아가 충만하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인격과 불순종하는 인격은 완전히 다른 인격입니다. 인격이 다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이 아니라면 그는 마귀의 형상을 닮은 인격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권능이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면 성령충만하고 그렇지 못하면 성령충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권능의 사용은 내가 능력이 많고 적음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입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은 지팡이마저 능력있는 도구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고 없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전혀 성령충만하지 못한 악인을 통해서도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자신의 주권에 따라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늘 같은 본문 이야기를 접하면 이렇게 각색합니다.
‘그것 봐라, 사도 바울이 얼마나 성령충만하면(얼마나 강하고 뜨거운 불세례를 받았으면) 저렇게 큰 능력을 발휘하느냐!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저런 불같은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서 능력 있는 주의 제자가 되자’
이렇게 생각하면 자꾸 주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사람의 능력으로 돌려놓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개혁주의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인간은 순종하는 위치에 머물러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주도적인 위치가 되거나 협력하는 위치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가장 성령충만한 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갑자기 주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주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두 해 동안 열성을 다해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이런 모범을 통해 주의 말씀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19장 9절의 ‘날마다 강론하다’는 말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는 주의 말씀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의 말씀교육은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수준 높은 제자훈련의 축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말씀충만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왜 바울이 능력을 나타내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은 느닷없이 사도 바울이 행한 이적들을 소개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말씀교육을 하는 도중입니다. 뭔가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먹는 시기에는 굳이 이적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복음의 역사적 특징입니다. 이적은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잘 듣지 않는 곳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바울이 행한 이적의 목적은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집단에 대한 표적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증거하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 에베소에서 이런 표적이 필요합니까? 그 해답은 9절에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불순종하고 복음을 비방했습니다. 이 언급은 바울의 말씀 사역이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죄악된 상태의 문제입니다. 죄인들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굳은 마음’은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이 ‘완악했다’(harden, obstinate)는 뜻과 같습니다. 마음이 자갈밭 같아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뿌리가 내리지 못하고 햇빛에 타고 끝내 말라 죽습니다. 복음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에베소의 회당에 나오는 대다수 사람들이 마음이 강팍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들도 지독하게 바울을 반대하고 복음을 거부했지만 에베소의 사람들은 그 강도가 더 거세었습니다. 혹자는 그 이유에 대해 에베소의 영적인 상태를 거론합니다. 당시 에베소의 별명이 ‘아데미왕국’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거대한 신전이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선전 창기들과 제사장들 우상 장사꾼들. 그리고 우상숭배의 문화들 즉, 주술과 마술, 점과 미신들이 한데 어우러진 그야말로 우상종합박물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에베소는 정릉 지역과 많이 닮았습니다. 북한산일대의 사찰만 100개가 넘고, 그곳 종사자 수만 2천명에 달하고 유달리 불교신자와 무속인들이 흥행하는 곳이 정릉지역입니다. 산 주변을 산책할 때마다 곳곳에서 굿을 하고 중들의 뜻도 모를 염불소리가 귀를 울리게 합니다. 저도 우연히 마주친 그런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복음을 전해보았지만 모조리 실패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힘을 합쳐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렇게 마음이 굳은 에베소의 사람들을 향해 석 달 동안 인내하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사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이제 복음을 거부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 강력한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보여줄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골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통해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12절을 보니 심지어 바울이 몸에 지닌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능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권능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3. 악귀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악귀들이 하는 일들의 일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정리해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귀는 악령(evil spirits) 즉 악한 귀신인데 원문에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굳이 몇 마리냐 하는 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1) 먼저 악귀는 주로 악귀 들린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들어갔다가 혼쭐이 난 귀신들의 전설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에 의해 사람에게서 쫓겨난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가 바다로 몰사한 과거의 전력은 귀신 사회에서 널리 회자된 슬픈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귀신사회에서는 다시는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들어가지 말라는 교훈이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2)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악귀가 들어갑니까? 12절에 보니 병든 사람이 나옵니다. 물론 질병에 걸렸다고 곡 그것이 악귀의 소행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몸이 아프고 약해지면 마음도 따라 나약해집니다. 악귀는 바로 이런 허약한 상태를 먹잇감으로 고릅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우울증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억지웃음이라도 웃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자꾸 자기를 학대하는 심리적 질병입니다. 우울증 자체가 귀신의 역사가 아니라 귀신은 바로 이런 질병을 기회로 침투하여 한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자꾸 이런 사람의 속에서 속삭입니다. 꼭대기로 올라가라고 부추깁니다. 올라가면 뛰어내리라고 부추깁니다. 결국 자살로 이끕니다. 이것은 반대로 사람이 건강해지면 악귀가 눌러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12절에 보면 병이 고쳐지자 함께 악귀가 추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왜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입증해 주는 대목입니다.
3) 다음으로 악귀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십시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짓거리만 하고 있습니다. 악귀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잘 되게 하고 발전시키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는 일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일입니다. 기껏 한다는 일이 몇 가지 재주를 뽐내어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일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는 일을 보세요.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 장난을 칩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장난삼아 말한 예수님의 이름에도 놀라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러자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이것을 보고 재미를 느낍니다. 요새 말로 다른 사람도 아닌 목사 아들들인데 꼬맹이들을 말합니다. 뭣도 모르고 이 꼬마들이 장난질하다가 악귀에게 혼쭐이 납니다. 16절에 보니 얼마나 혼쭐이 났으면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을 칩니다. 악귀가 속으로 ‘아무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무서워해도 꼬마들 쯤이야‘하고 역정을 내었나 봅니다. 악귀도 체면 있는데 말입니다(ㅎㅎ).
4. 결과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스꽝스런 일들을 통해서 복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17절을 보세요
1) 바울이 석 달 동안이나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쳤음에도 꿈적하지 않던 에베소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2)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보통 이름이 아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름이라고 같은 권세의 이름이 아닙니다. 왕과 신하의 이름의 권세가 다릅니다.
3) 악귀의 일을 통해 믿음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4) 그리고 이 사람들이 바울 앞으로 나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회개의 역사야말로 구원을 위한 첫 표징이자 열매인 것입니다. 회개 없이 구원이 없습니다.
5) 다음으로 모든 우상숭배자들이 자기가 믿던 서적들을 가지고 와서 불에 태웁니다.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복음이요 복음의 힘은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흥왕하다는 것은 ‘널리 전파된다(spread widely)'는 뜻입니다. 잠시 중국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선교사들이라고 합니다. 미국만 없어도 중국이 세계를 호령할 것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미국을 넘어서지 못하니까 부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미국이 자꾸 중국더러 인권을 개선하라고 할 때마다 정곡이 찔린 것처럼 아파합니다. 그렇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중국은 자신의 치부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철저히 입을 틀어막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 때문에 입을 틀어막기가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위세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상한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인권이나 복지 등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니까 교회가 성가신 존재인 것입니다. 특히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이 눈엣 가시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실제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제일 먼저 단행한 일은 한국인이 세운 대형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북경에 있는 큰 교회들이 모두 해체되고 관계자들은 모두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오히려 중국에 독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그리스도인들을 흩어 놓으면 안 된다는 역사적 진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큰 교회만 무너뜨리면 본보기가 되어 기독교가 세를 얻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후 기독교인의 수는 배로 늘어나 이제는 아예 포기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권능을 적시적소에 행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한계가 없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사역하심에 바로 내가 쓰임을 받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 나고 많이 배우고 능력 있는 은사들을 가지고 있어서 놀라운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이 있으니 열심이 있고, 열심이 있으니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일어나니 사람들이 회심하고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세력이 자꾸 불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나의 재주나 능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저 성령 충만하시고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역사이고 하나님나라의 역사입니다. 이 일에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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