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주차.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본문: 행21:37~22:1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하니라.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1. 세상의 본질
세상과 교회는 태생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A. W. 토저가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영이 지배하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
가장 뚜렷한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요8:47)
세상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는 진리의 영을 받아야 들을 수 있고 받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은 교회가 하는 말을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듣기 싫어합니다. 예수님 ‘예’자도 듣기 싫어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커녕 기본적인 이해도 없습니다. 오직 ‘싫은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으므로 교회를 혐오합니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악질적인 심리의 하나입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세상이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대화 자체가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되어야 무엇을 전하든지 주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무조건 싫어하고 귀를 닫고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과 소통을 하고 사랑을 논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까? 북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저들은 대화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무력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조폭들이 그렇습니다. 조폭들이 상대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합니까? 무조건 윽박지르고 위협하고 험한 분위기를 만들어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고 이득을 이끌어내는 자들이 깡패들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세상은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지배를 받는 곳이요, 자신의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으려 하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해 하는 이야기가 가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우월감에 사로잡혀 훈계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가르치려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타인에 대해 배려가 없다고 인식합니다. 입으로는 평화 운운하면서 남의 종교를 폄하하고 단군상을 무너뜨리고 불상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수만 명이 함께 모여 우상들이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광신자 집단이라고 매도합니다.
2. 예수님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사단 마귀에 속한 자라 해도, 참으로 어리석게도 아무런 능력도 없는 거짓 신상들 앞에 나아와 머리를 조아린다 해도, 그것이 단군상이든, 불상이든 마리아상이든, 물리적인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파괴하는 몰지각하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진리의 복음을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전파해야 합니다. 모든 인격과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담아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사랑과 평화를 그들은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또 인내하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까지 전인격적인 복음의 사역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배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만큼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한 번도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 바울은 그들과 싸우지 않았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의 권능으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고한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했고 충돌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로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붕괴시켰다면 십자가의 구속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는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둘째, 우리가 싸우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방해를 받습니다. 싸움이 일어나면 평화가 깨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셋째, 우리는 세상에서 순례자입니다. 순례자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그때 순례자는 자기 길을 가면 됩니다. 맞서 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싸우지 말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어떤 이는 우리는 영적 군사인데 어떻게 피하기만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런 질문자는 자신의 질문 속에 이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 군사들이 아닙니다. 육적 군사들이라면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영적 군사는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다 싸움이 일어나면 그 자리를 일어나 순례의 길을 가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 손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겠다고 이를 갈며 분기탱천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을 전하고 가르치고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묵묵히 참아내고 기도해야 합니다. 핍박이 오면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어쩌다 평화의 대접을 받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
그렇다고 이런 근거 없는 주장을 무조건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은 진리에 관한 것과 삶에 관한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무작정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숭상하는 신들이 진짜 신인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믿고 추앙하는 존재가 과연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2+2=4이듯이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는 다른 답을 가지지 않습니다. 먼저 어떤 삶을 사느냐 하기 전에, 누가 어떻고 저떻고 하기 전에, 제일 먼저 따져 보아야 하는 문제는 내가 지금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먹어야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진짜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죽음뿐입니다. 자라는 식물에게 물이 떨어지면 금세 말라 죽습니다.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은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복음에 대해 귀를 닫고 싫어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도 그런 세상의 생래적인 거부감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온갖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욕과 위협과 폭력과 충돌을 곳곳에서 겪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은 자신의 삶을 시작하고 하나님을 배우고 익혔던 제2의 고향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혐오스러운 대상이 되고 그들의 적이 되어 결박당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번도 그들을 향해 억울하다고 변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경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런 신앙을 습득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견디지 못해 합니다. 여전히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하고 이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자아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나의 영을 사로잡을 때만이 자아가 죽고 성령의 소욕대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자아의 삶은 육신의 삶으로 이끌고 성령은 영적인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매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안에 거할 때 기뻐하시고 충만하시고 모든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육의 소욕을 익는 힘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나 깨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꾸고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투합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세상에 의해 철저히 거부당하고 방해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해자는 육의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은 자꾸 육적인 차원에서 육의 나라를 세우려 합니다. 육의 나라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셋ㅇ은 판이하게 다른 나라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는 나라지만 세상은 사단의 권세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세워지지만 세상은 돈의 힘으로 세워집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지지만 세상은 자기 힘과 능으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원수와 함께 세우는 나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곳에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세상은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은 다 배척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원수라도 끌어안고 용서하며 그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과 합력하여 세우는 나라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추방하는 나라입니다. 이슬람 테러집단처럼 내가 믿는 신을 믿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는 그런 나라입니다. 용서 대신 복수를 하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지금 현재의 삶, 이 땅에서의 삶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구원을 이루어야 하고, 구원받고 성령과 함께 지내지만 육신을 지니고 있으므로 육신의 소욕과 투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고백했듯이 두 가지 소욕과의 갈등 속에 살아야 합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의 싸움을 겪으며 살아야 합니다. 양심대로 살면 언제든지 손해 보아야 합니다. 손해 보면 고생합니다. 고생하기 싫어서 자기 유익을 먼저 구하면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과 헌신과 작기 희생을 하는 곳에 세워집니다. 그런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4. 결- 변증하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위급한 시점에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타이밍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기어이 복음을 저들의 귀에 들려주겠다고 나섭니다. 바로 직전까지 발길질에 돌팔매에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끌려간 바울입니다. 그 순간에도 바울은 천부장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지혜가 번뜩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바울은 천부장이 알아들을 수 있는 헬라 말을 합니다.
그 순간, 천부장의 귀에 바울의 헬라어가 유난히도 분명히 들렸습니다. 이 유대인 땅에 헬라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한국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영어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부장이 순간,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반틸이 말한 하나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입니다. 접촉점은 지혜의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순간에 역사합니다. 바울이 그냥 히브리말로 했다면 천부장은 무심코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때 천부장은 갑자기 한 사람이 기억났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몇 해 전에 소동을 일으킨 한 애굽인 자객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인데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약 3년 전에 한 애굽인 사기꾼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자신이 선지자라고 주장하고서는 상당히 많은 추종자를 감람산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추종자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 명령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때 진격하여 로마 주둔군을 타도하고 예루살렘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 총독이 군대를 보내어 반란자들 몇 사람을 잡아 처형을 하자 그 애굽인은 몰래 도망을 쳤습니다. 그 후 애굽인에게 속은 사람들은 그 사기꾼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혹시 바울이 그 사기꾼이라서 사람들이 저렇게 분개하고 죽이고자 하는 것인 줄 오해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애굽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길리기아의 다소(Tarsus)시의 시민임을 그에게 확실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서 바울은 화가 난 유대인 군중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아직 바울은 천부장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패를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천부장에게 힌트는 주었습니다. 자신의 출생지를 소개할 때 ‘소읍이 아닌 다소시’로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작지 않은 도시의 시민‘이라는 뜻인데 영특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도시 출시이라면 로마시민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아차렸을 터이지만 지금 천부장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의 요청을 수락하자 바울은 층계의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이때 천부장은 군사들로 하여금 군중이 층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방비를 강화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성전 바깥뜰에 서 있는 군중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그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히브리 방언이란 아람어를 가리킵니다. 아람어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언어였을 뿐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서아시아와 유프라테스 강 주변지역의 모든 주민들의 공통어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지금 군중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거주민도 있었지만 대개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타인 지역과 소아시아에서 온 유대인 순례자들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로 이 지역의 사람들이 복음을 가장 기피하고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형되던 그곳까지 몰려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처형하라고 소동을 벌였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백성일수록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바울이 그들이 알아듣는 말로 입을 열자 일순 조용해집니다. 마치 이 장면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기 전에 마지막 연설을 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서 치유를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 단 한 사람의 이방인만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감사의 예배를 드린 사건을 통해 무지한 사람들의 거역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지금 결박당하여 끌려가는 이 순간에도 입을 열어 복음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바울이 증언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 알아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슴 깊이 새기고 언제든지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증언하는 말씀의 사역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사역자에게 하늘의 큰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출처] 29주차.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 31주차. 당신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0) | 2015.08.06 |
|---|---|
| 30주차. 회심하셨습니까? (0) | 2015.07.29 |
| 28주차. 전적 타락과 군중심리 (0) | 2015.07.15 |
| 27주차. 생명을 얻기 위하여 (0) | 2015.07.09 |
| 26주차.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다 (0) | 2015.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