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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과부의 존재; 외식의 결과 (마가복음 12장 38절-13장 2절)

손재익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8. 19. 09:09

본문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 2014831일 오전예배 설교문>

 

 

(마가복음 강해 54)

가난한 과부의 존재; 외식의 결과 (마가복음 1238-132)

 

() 설교본문낭독: 신명기 157-11; 마가복음 1238-132; 사도행전 432-35

병행본문: 23:1-24:2; 20:45-21:6

() 설교: (마가복음 강해 54) 가난한 과부의 존재; 외식의 결과

() 설교 후 찬송: 제네바 시편찬송 72

 

서론

 

2주 전에 우리가 외식(外飾, ostentation)에 대해서 배웠는데요, 외식이란 겉만 보기 좋게 꾸며내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말하면 겉치레입니다. 속은 텅 비었는데 겉만 번지르하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속과 겉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속은 없으면서도 겉만 번지르르 한 것입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를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겉만 보고 속을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이 속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보니 겉만 보고 속을 착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과일이 있습니다. 겉을 보니 색깔도 아주 이쁘고 탐스럽고 맛있게 보입니다. 그래서 구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깎아서 속을 보니 썩어 있습니다. 겉만 보고 속을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의 아름다움 때문에 속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외식은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앙 혹은 경건과 관련하여 외식은 속에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잘못된 겉만을 보여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신앙이 없는 데도 신앙이 좋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앙이 이미 좋다고 간주되어서 그 사람에게 적절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상태를 정확하게 드러내어서 적절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가 큰 예배당과 많은 숫자의 성도가 있을 때에 그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의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씀도 성례도 권징도 없는 교회, 심지어 복음이 없는 교회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겉만 보고 교회가 별로 내실도 없는데 마치 대단한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비슷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중, 마가복음 1238-40절에 나와 있는 서기관들의 모습은 겉보기에 좋아 보입니다. 겉만 보면 분명 그들은 경건해 보입니다. 좋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서기관으로서 마땅히 입어야 할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게 기도하는 경건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에 서기관들은 경건해 보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매우 좋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41-44의 말씀을 보면 그들의 모습은 겉만 그럴 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41-44절에 나오는 어떤 면이 그들의 겉만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설교본문낭독시간에 읽은 몇 군데의 말씀을 통하여 서기관들의 외식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 서기관의 외식과 그 결과로서의 가난한 과부

 

서기관들의 외식과 과부의 가난함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서기관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만 혹은 외형만 볼 때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겉만 보면 분명 그들은 경건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전형적으로 외식하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지난 2주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실제로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옷으로 경건한 척 할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긴 옷의 핵심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직분을 과시하고 스스로 만족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40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이렇게 서기관들의 외형적인 모습이 사실상 외식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과연 서기관들의 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먼저 41에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헌금함 앞에 앉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41절에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라고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은 매우 의도적으로 거기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4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과부가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가 얼마입니까? 42에서 두 렙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두 렙돈은 노동자가 하루 동안 일해서 받는 품삯인 데나리온1/64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우리 식으로 환산하면, 넉넉잡아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고 하면, 10만원의 1/64이면 많이 잡아야 1,500원입니다. 44절에서 말씀하는 생활비라는 것이 한 달을 말하는지, 아니면 하루를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만약 한달 이라면 정말 심각한 것이요, 하루라고 해도 그녀의 형편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생활비 두 렙돈이 하루를 위한 것이었는지, 한 달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 일해서 버는 돈의 64분의 1이라는 적은 돈으로 생활해야만 하는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안에 묶여 있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이 가득한 이스라엘에 가난한 과부가 있었고, 그 과부의 가난한 정도는 하루 품삯의 1/64밖에 안되는 금액으로 하루 하루를 겨우 겨우 연명해야 하는 정도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헌금함 앞에서 앉으셨고, 가난한 과부의 형편을 말씀하심으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하는 서기관들의 외식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서기관들의 당위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인 신명기 157-11의 내용대로라면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해당 구절을 찾아 봅시다.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희 꾸어주라........(11)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치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마가복음 12장은 구약시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인 이스라엘에 사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명기 15장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서기관들은 신명기 15장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서기관들이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머무는 땅, 즉 예루살렘 안에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있을 것이라는 구약의 율법을 기억하여 자신의 성읍 안에 있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했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손을 펴서 그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쳐야 했습니다. 자신들은 서기관들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생산활동을 하는 자들이 아니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성읍 안에 사는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내는 헌금을 통하여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고아와 과부의 가난함을 살펴야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가난한 상태로 머물게 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과부는 있을 지언정 가난한 과부는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가난할 수는 있어도 생활이 곤란할 지경이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루 품삯의 1/64밖에 안되는 금액으로 삶을 연명하는 사람이 없도록 했어야 했습니다.

 

서기관들의 외식의 결과

 

그런데 서기관들은 가난한 과부를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집어 삼켰습니다(12:40). 비록 서기관들은 그러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백성들이라도 그녀를 도와야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존재하지 않게 해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외식하였습니다. 백성들도 외식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작 두 렙돈을 생활비로 삼아 살아야 하는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마가복음 1241-44절에 나오는 이 가난한 과부의 존재는 서기관들의 외식함으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에서도 볼 수 있음

 

 

41절에서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으신 것, 42절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지켜 보신 것, 그리고 44절에서 그 가난한 과부가 한 헌금에 대하여 생활비 전부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 서기관들의 외식을 꾸짖기 위해 하신 것입니다. 40절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킨 서기관들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지켜보셨고, 그 헌금을 생활비 전부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과부라는 것도 아셨고 가난하다는 것도 아셨으며 그녀가 했던 헌금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다른 부자의 헌금 액수는 밝히지 않고 그냥 단순히 많이 넣었다 라고만 말하면서,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에 대해서는 두 렙돈임을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서기관의 외식의 결과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고을 중에서도 특별히 화려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성읍 안에 그 많은 부자들 사이에 이토록 가난한 과부가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본문의 구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음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다는 사실은 본문의 구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12:38-40, 41-44)은 지난 두 주 동안(817, 24)에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두 본문의 주인공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기관(12:38-40)과 가난한 과부(12:41-44)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대조하면서 부와 가난을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식과 그 외식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대조하십니다. 그리고는 서기관들을 꾸짖으십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과 잔치상에서 높임을 받으려 하는 모습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가난해져 버린 과부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의 물질적 탐욕을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권력과 지위와 부를 사랑하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서기관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서 43절에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참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가 몇 주전에 살펴보았던 바로 앞 1228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서기관 중 한 사람의 질문에 대해 답하심으로써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 모두가 크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바른 하나님 사랑이 아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서기관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참된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이었음을 다시금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가난한 과부를 돌아보라는 율법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두 렙돈으로 생활하는 아주 가난한 과부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그 당시에 서기관들이 백성들을 말씀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였고, 서기관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과부의 가산을 빼앗는 착취를 일삼는 결과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바

 

이렇게 오늘 본문은 참된 이웃 사랑이 사라져버린 이스라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린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옛이스라엘의 최후와 새이스라엘인 교회의 모습

 

외식하는 옛이스라엘의 최후

 

이러한 장면은 이스라엘의 수치입니다. 부자들 곁에 심각하게 가난한 과부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인 이스라엘이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외식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이러한 영적 형편을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의 최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마가복음 131-2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최후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전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옛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 말은 곧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는 경건이 사라진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의 창설과 교회공동체가 가난한 자를 돌보는 방식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될 것을 예언하신 예수님, 실제로 자신의 예언에 따라 성전을 허무십니다. 먼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성전을 무너뜨리십니다. 그 성전은 곧 자기 육체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AD 70년에 헤롯 성전이 무너집니다.

이렇게 옛 이스라엘을 허무신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옛 언약 공동체를 대신 할 새 언약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옛 이스라엘의 잘못을 다시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옛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옛 이스라엘과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 사도행전 432-35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함께 찾아봅시다. 34에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유의깊게 보아야 하는데요, 개역한글 번역에서는 이 말을 그 중에 핍절(乏絶)한 사람이 없으니라고 해서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적인 가난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두 렙돈으로 생활해야만 했던 가난한 과부처럼 심각할 정도의 가난에 처한 사람은 교회 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절대적인 가난에 빠진 사람이 없었습니까? 교회 안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4-35“(34)....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 공동체인 구약의 이스라엘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쓸 것을 공급해 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는 과부를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자기의 것을 자발적으로 내어 주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신약교회에 임하신 성령님께서는 각 사람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자기의 넉넉한 부분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난한 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는 핍절(乏絶)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옛 이스라엘의 패역함에 반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초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자발적인 내어놓음을 통하여 가난한 자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 적용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서기관들의 외식의 결과를 보았습니다. 외식의 결과는 거짓 경건이었습니다. 외식의 결과는 가난한 과부를 존재하게 하였습니다. 화려한 성전 그 이면에 두 렙돈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겨우 연명하는 가난한 과부의 존재는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외식하지 말아야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새언약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한 지체들인 우리는 외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신앙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어려운 자를 돌아보지 않고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외식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건축물을 자랑하지만 정작 교회 안에 가난하여 궁핍한 자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야고보서 126-27에서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요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외식하는 오늘날의 교회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외형적인 건축물에는 수백억원의 돈을 들이면서 정작 교회 안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한 구제에는 그리 많은 돈을 들이지 않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어 복지관을 운영하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동복지센터 등을 만들어서 거창한 사업을 하는 것처럼 자랑하고 여러 복지단체에 기부도 하지만, 정작 대내적으로 교회 안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자들 가운데 구제가 필요한 성도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 자체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도 모르니 서로의 경제적 형편과 어려움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공동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상은 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냥 한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교회의 바른 모습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바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말 그대로 공동체입니다. 함께 생활하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서로의 영적인 형편 뿐만 아니라 서로의 육체적 형편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휙 돌아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식사를 나누고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서로의 형편을 돌아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혹여나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지체에게 어려움이 없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재정에 있어서

 

또한 우리가 각자 낸 헌금을 통하여 성도를 돌아보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있다면 교회의 재정이 그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각 성도들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헌금을 하되 많이 가진 자는 많이 하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가진 자가 낸 많은 헌금을 통하여 교회 안의 가난한 자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 안의 구제의 원리입니다.

 

헌금을 얼마를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십의 일조를 해야 하느냐? 십일조는 폐지되었다. 그러니 헌금이 중요하지 않다.” 하는 문제로 왈가왈부(曰可曰否) 혹은 왈가불가(曰可不可)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소위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분들이 그러한 문제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십의 일조냐 십의 이조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내어놓음과 교회의 필요와 교회 안의 가난한 자와 교회 밖의 궁핍한 자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핵심은 오늘 읽은 본문인 신명기 158절과 사도행전 435절의 말씀에서 말하는 필요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필요에 따라 많아 질수도 적어 질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획일적으로 십의 일, 십의 이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러한 획일적인 규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게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그 성령님께서 주장하시는 양심을 따라 많이 가진 자는 십의 일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금액을 내어 놓을 수 있고, 적게 가진 자는 십의 일이 아니라 그보다 더 적은 금액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소개문과 교인생활수칙에는 헌금의 원칙은 십일조이지만 가정과 개인의 형편에 따라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신앙의 양심에 따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밝혀두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교인 교육을 할 때에 그 부분을 말씀드립니다만, 예를 들어 어떤 가정에서 한 달 수입이 200만원입니다. 그런데 4인 가족이 한 달 동안 생활하는데 드는 비용이 190만원입니다. 아무리 아껴도 그 이상을 아낄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최저 생계비(最低生計費, minimum cost of living)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정은 아무리 많이 해도 10만원 밖에 헌금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냐 아니냐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가정은 한 달 수입이 1000만원입니다. 그 사람은 100만원이 아니라 더 큰 금액을 헌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의 예로 든 사람은 10만원을 헌금하고도 남는 돈이 하나도 없지만, 뒤의 사람은 100만원을 헌금하고도 900만원으로 충분히 여유로울 수 있으니, 그런 경우에는 단순히 십일조만을 해야 한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많이 가진 자는 자신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돈 밖에 벌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 내어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교회의 헌금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많이 가진 자가 낸 헌금, 그리고 적게 가진 자가 낸 헌금. 그렇게 모여진 교회의 수입은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허락하신 선물(gift)로서의 직분인 집사’(執事)(deacon)를 통하여 관리가 됩니다. 그리고 집사는 그렇게 모여진 재정으로 말씀사역자의 생활비, 교회경상비 등에 사용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는지를 살펴서 그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한길교회 생활수칙에 나와 있음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우리교회의 생활수칙에 잘 나와 있습니다. 보시면 교회질서 10번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시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성도는 실직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생계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개인적으로 그 형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만 아니라 한 지역교회의 지체인 성도로서 교회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2:45; 4:32-3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62)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경적 근거가 바로 오늘 읽은 본문 중 하나인 사도행전 432-37절입니다.

이 문제를 위해서 교회에는 집사와 집사회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집사라는 직분을 교회에 허락하셔서 교회 안에 어려운 지체를 돌아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6:1-3). 집사는 명예직도 아니요 적절한 호칭이 없어서 즉 ‘~~혹은 ‘~~형제(자매)’라는 말을 대신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는 교회 다닌지 2-3년 되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계급은 더더욱 아닙니다. 집사는 교회의 직분으로서 교회 안에서 성도의 경제적 형편을 살펴 가난한 자를 위한 자비의 사역을 하도록 맡겨진 직분입니다(벨기에 신앙고백서 제30;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 중 집사). 집사는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집사는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 모여진 교회의 재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따라(6:3) 사용해야 합니다. 이 때 그 사용내역은 말씀봉사자의 생활비(고전 9:4-14; 딤전 5:17-18), 선교(4:15-19), 다른 교회를 돕는 일(11:27-30; 15:26; 고전 16:1-4), 그 외 교회 경상비를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구제(4:32-37)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에 핍절(乏絶)한 성도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의 책임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교회 안에 핍절한 성도가 없도록 하는 일의 궁극적인 책임은 집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에게 있다(4:34)는 것입니다. ‘집사는 다만 성도들이 낸 헌금을 집행할 뿐입니다. 그 모든 일의 책임은 사실 상 성도 전체에게 있습니다. 성도들이 헌금하지 않으면 집사직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가난한 과부의 존재가 단순히 서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 전체의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 핍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 모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많이 내는 것이 자랑이 아님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는 자본주의의 단점들이 아주 심각하게 잘 드러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부와 가난의 격차가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절대로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크나 큰 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는 심각한 가난에 처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부요함은 우리의 이웃의 몫을 빼앗은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지만, 진정한 교회에서는 많은 헌금이 자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이웃에 대하여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1511 말씀처럼 땅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공동체든 그 안에는 가난한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러한 가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새로운 성전인 교회를 세우셨으니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세워진 교회 안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도들은 자신의 형편을 따라 적절하게 헌금해야 하고, 그렇게 헌금한 재정은 집사를 통하여 잘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 언약공동체인 교회 안에 핍절한 자가 없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온 교회의 수치입니다. 과부나 고아는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난한 상태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과부, 가난한 고아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넉넉하게 하고 서로를 부요하게 하는 주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과 그리고 우리 주변에 함께 하는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의 복음이 가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분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영광과 부귀와 존귀를 버리시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난하게 되신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고후8:9)를 본받아 나의 부요한 것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쁨과 자원함으로 내어 놓음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설교 질문

1. 마가복음 1238-44절의 상황은 신명기 157-11절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으신 것,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지켜 보신 것, 그 가난한 과부가 한 헌금에 대하여 생활비 전부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국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까?

3. 우리가 몇 주전에 살펴보았던 마가복음 1228절 이하의 내용에 비추어 오늘 본문의 상황을 말해봅시다.

4. 부자들 곁에 심각하게 가난한 과부가 있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5.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 절대적인 가난에 빠진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6.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교회 안의 어려운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까? 정리해 봅시다.

7.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린이 질문

1. 신명기 157-11절의 말씀을 볼 때에, 마가복음 1238-44절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앉아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그 헌금에 대해서 생활비 전부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국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까?

3.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 절대적인 가난에 빠진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4.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교회 안의 어려운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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