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 2014년 8월 24일 오전예배 설교문>
(마가복음 강해 53)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가복음 12장 41-44절)
(↓) 설교본문낭독: 마가복음 12장 41-44절
병행본문: 눅21:1-4
(↓) 설교제목: (마가복음 강해 53) 가난한 과부의 헌금
(↑) 설교 후 찬송: 찬송가 50장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서론
오늘 읽은 말씀에 대하여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일반적인 교회가 대하는 태도는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여러분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십니다.”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전반적인 의미는 고려하지 않고 44절만, 그 중에서도 가장 뒷부분에 있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라는 말씀만을 떼어서 강조하여 헌금의 본질과 상관없이 많은 헌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예 이 본문을 읽지도 설교하지도 듣지도 그 의미를 따라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향해서 헌금 혹은 헌상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교회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기를 바라는 극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느냐 하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현상 때문이지요.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상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오히려 본문과 같이 돈과 연관된 말씀은 아예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전하기보다는 그냥 알아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따라 그냥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본문에 담겨 있는 ‘헌금’ 그 너머에 있는 깊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 반대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양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마가복음을 살피고 있는 중이므로 그 순서에 따라 이 본문을 뛰어넘지 않고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이 말하는 바, 그 실질적인 내용은 외면한 채 목사가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거짓 복음을 증거한다면 안되겠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헌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본문이 그러하듯 느닷없이 그런 내용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서기관들의 외식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단순히 생활비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모두 바쳐야 한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Ⅰ. 본문 설명
헌금함 앞에 앉으신 예수님
본문을 보시면 특이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41절에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헌금함을 대하여”(opposite the place where the offerings; NIV)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헌금함 앞에서 헌금함이 있는 방향으로 마주 대하고 앉으셨다”라는 것입니다.
‘헌금함’이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마주 대하고 앉으신 ‘헌금함’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여인의 뜰’(the Court of the Women)이라는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에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모두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는데, 감사와 서원 등의 예물을 바치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고, 13개 헌금함이 각각 그 용도가 달랐습니다. 어떤 것은 성전세를 바치기 위한 헌금함이었고, 어떤 것은 감사의 마음으로 바치는 감사헌금을 위한 헌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고 모양은 나팔처럼 생겨서 위쪽 입구는 넓고 아래쪽은 좁은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양 때문에 ‘나팔궤’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13번째 헌금함은 자유롭게 기부를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헌금하던 함이었습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헌금 외에 자유롭게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헌금함 앞에는 헌금함을 지키는 제사장이 있었는데요, 얼마의 헌금을 하는지 제사장에게 보이고는 동전을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지폐가 없고 동전만 있었기 때문에 나팔 모양의 헌금함에 헌금을 하면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땡그랑’하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굳이 제사장에게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얼마를 헌금했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헌금함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헌금함은 헌금을 많이 하는 부자들에게는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었고, 반대로 헌금을 적게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위축되고 소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헌금함이 있는 자리에 앉으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헌금함 앞에 앉으셨는가?
그런데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갑자기 헌금함을 눈 앞에 두시고 앉으셨습니까? 41절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설명합니다.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예수님은 지나가다가 우연히 헌금함 앞에 앉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지를 보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앞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매우 의도적으로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그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헌금함 앞에서 일어난 일
예수님께서 지켜보시는 중에 여러 사람들이 헌금을 하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기록한 마가는 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오직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만 설명합니다. 한 부류는 ‘여러 부자’입니다(41절). 다른 한 부류는 ‘한 가난한 과부’(widow) 입니다(42절). ‘여러 부자’는 ‘많이’(large amounts) 넣었습니다. 반면에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41b~42).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은 부자들과 비교하여 정말로 적은 돈입니다. 렙돈(lepton)이란 개역개정판 성경 난외주에 나와 있듯이 헬라 동전의 명칭으로서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최소단위의 동전입니다. 마가는 두 렙돈이 로마의 화폐로 치면 ‘한 고드란트’(quadrans)라고 자상하게 설명합니다. 이 두 렙돈은 노동자가 하루 동안 일해서 받는 품삯인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두 렙돈이 얼마 정도 되는지 우리 식으로 환산해 보겠습니다. 넉넉잡아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고 하면, 10만원의 1/64이면 많이 잡아야 1,500원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부는 헌금함에 500원짜리 동전 2개를 넣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두 렙돈은 당시에는 한 줌의 곡식 가루를 사서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얼마나 작은 금액입니까? 이 돈이 얼마나 적은 돈이었던지, 누가복음 12장 59절은 원어 상 렙돈(lepton)이라고 쓰여 있는 말을 그냥 ‘한 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 부자들은 많이 넣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한 과부는 말 그대로 ‘한 푼’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과부의 헌금 액수는 누구의 관심을 끌 만한 정도가 아닙니다.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3절에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과부의 헌금 액수는 누구의 관심을 끌 만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주목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푼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돈에 대하여, 왜 예수님은 갑자기 이런 칭찬을 하셨을까요? 정말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양이 많았을까요? 1,500원짜리 동전을 넣은 과부가 엄청난 액수를 헌금한 수많은 부자들이 헌금한 금액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을 수가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여러 부자와 한 가난한 과부가 비교 불가능합니다. 한 부자와 여러 가난한 자도 비교가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43절과 같이 말씀하셨을까? 그 답이 4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예수님이 지금 정말로 하고 싶으신 말씀은 바로 4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하고 싶으셔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고, 수많은 사람들의 헌금을 보신 뒤에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헌금의 외적인 부분보다 내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헌금함 앞에 앉으신 이유, 많은 사람들의 헌금 중에서 특별히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집중하시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신 이유는 헌금의 액수보다 더 중요한 헌금의 본질이 있음을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분명 부자들의 헌금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과부의 생활비 전부라고 해도 부자에게는 푼돈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헌금한 사람과 적게 헌금한 사람을 두고서 적게 헌금한 사람이 실제로는 더 많이 헌금하였다고 한 것은 헌금의 본질이 금액의 많고 적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질적인 요소, 내적인 요소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부자들이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 위해 ‘많이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들 틈바구니에 한 초라한 여인이 끼어서 지나가면서 가장 화폐단위가 낮은 렙돈 2닙을 넣었던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부자들이 많이 넣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가의 설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는 전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헌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본문 말씀을 기록한 마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시고 오히려 예수님은 과부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칭찬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헌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이 헌금의 본질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헌금의 본질은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생활비를 바쳤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아무리 많이 헌금해도 그것이 자신들의 생활에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생활비란 말 그대로 사람이 생활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비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생활비를 내어 놓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그 가난한 과부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루를 굶어야 합니다. 텅 빈 배를 움켜쥐고 하루 밤을 지새워야 합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아주 귀한 돈을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과부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당장 먹을 것을 살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요, 그 생명을 날마다 유지시켜 주실 분이라는 섭리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의 생활비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감정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생명을 대신하여 그 생계의 모든 수단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의 행동은 단순히 돈을 내는 수준을 넘어 헌상의 원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발현된 행동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한 것이요, 그래서 ‘믿음의 분량’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여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헌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43-44절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액수에 대해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액수 외에 ‘다른 것’을 고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헌금의 액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생활비 전부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양의 헌금을 했는지에 초점을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까? 바로 우리의 고백이 헌금 속에 담겨 있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금전(金錢)이라고 하는 재화(財貨)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그 돈 속에는 우리의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는 순간 신앙고백이 담깁니다.
이 과부가 1,500원을 했는지 10만원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1,500원이 아니라 150원만 드려도 되었습니다. 그것만 드려도 충분한 십일조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한 중에서도 자기의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나는 비록 가난합니다. 그래서 이 돈이 없으면 도무지 생활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드립니다. 이렇게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생활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헌금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아신 예수님,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그 고백을 아시고 과부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헌금함에 얼마를 넣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 부자들은 자기가 많이 헌금한다는 것으로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으로 보고자 하신 것은 과부처럼 그 헌금 속에 담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히 헌금 액수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고 헌금자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헌금 평가는 헌금자의 경제적 조건에 비교한 상대적 평가입니다. 그것은 헌금자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가짐의 정도,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액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마음과 정성의 헌금인가의 문제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지극히 작은 금액의 헌금, 사람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헌금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은 헌금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본문의 위치
특별히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나오는 서기관들의 외식에 관한 이야기의 바로 뒤이어서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의 위치에서 이 본문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헌금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헌금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셨고 이를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 내에 널리 퍼져 있는 위선, 본질에서 벗어나 변질된 경건을 지적하려 하셨습니다. 헌금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헌신과 섬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의 전반적인 삶의 자세를 대표하고 반영하는 것이어야 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헌금이라는 것은 내 삶의 기반과 근거가 하나님께 있으며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탱되는 것이요 따라서 나와 내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삶 전체가 오직 주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Ⅱ. 적용
참된 헌금이란
오늘 본문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참된 헌금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된 헌금이란 금액에 따라 기준이 정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어떤 고백과 믿음을 동참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형편과 개인의 형편을 고려하고, 이 모든 일에 개인의 신앙양심을 따라 하는 것이 중요하되, 무엇보다도 내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금액과 상관없이 항상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요 방편입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며 감사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헌금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고백
그렇기에 헌금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고백입니까?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것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드리는 것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작은 소유마저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나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고백을 헌금이라는 행위에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헌금이라는 행위 속에 이 고백이 없다면 그 헌금은 외식(外飾, ostentation)입니다.
예배와 헌금
우리가 헌금을 할 때에 다른 시간에 하지 않고 예배의 순서 중에 하나의 순서로 포함하여 드리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나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확인하며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예배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예배의 한 순서에서 우리가 매주일 헌금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려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헌금에서는 돈의 액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고백이 중요합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정신을 담아 넣어야 바른 헌금입니다. 내 시간도 주님의 것이고, 내 재물도 주님의 것이고, 내 생명까지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매주일 헌금하라는 정신에 근거하여 우리가 예배할 때에 헌금할 터인데, 그 때 드리는 헌금이 우리 한 주간의 고백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번 한 달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구주십니다” 라는 고백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헌금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 단순히 헌금하라 고 가르치기보다는 그 의미를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헌금이란 이러한 성격을 가진 것이기에, 헌금을 많이 했다고 자랑할 수 없고 헌금을 적게 했다고 의기소침할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기에 많이 하는 것이고, 적게 가졌기에 적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랑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고백을 담아 나와 내가 소속된 교회의 형편을 고려하여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전부를 드린다는 것을 악용하는 경우
그러한 일이 없어야 하겠으나 반대로 이것을 악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어짜피 헌금이란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니 적게 드리거나 아예 안드리면서 마음만 다 드리면 되지”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또 다른 외식(外飾, ostent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갖고 헌금하는지를 사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기 자신만이 압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태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올 수 없는 태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그러한 것을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여러 장치를 고안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 분명하게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기명으로 자신의 양심을 따라 하게 하되, 혹 그러한 양심이 없는 자들에 대하여는 복음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고 회심하게 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데에 중점을 둡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렇게 악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마음과 태도를 갖고 헌금하는 사람에게 바르게 하도록 교정하는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기부가 아님
헌금은 이런 점에서 ‘기부’와 다릅니다. 기부란 나의 것을 나의 여유로운 부분을 어떤 단체에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은 나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생활의 책임이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헌금의 정신은 “모든” 소유, 곧 내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교회라고 하는 종교기관에 내가 얼마를 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신앙고백적 의미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금전이라고 하는 재화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그 돈 속에는 우리의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는 순간 신앙고백이 담깁니다. 돈 자체는 누군가가 대신 나의 이름으로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고백을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헌금이라고 하는 돈은 누가 대신 내어 줄 수 있으나, 그 고백까지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 속에 우리의 고백을 온전히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름만 내는 경우의 예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헌금에 자기 이름을 쓰고, 그렇게 해서 낸 헌금에 대해서 다음 주 주보에 그 이름이 실리지요. 그런데 그 교회에서 주보에 넣을 이름을 기록하다가 평소에 교회에 오지 않는 분의 이름이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궁금했습니다. 분명 사람은 오지 않는데 어떻게 그 분이 헌금했다고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름은 그 부모가 대신 그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교회를 다녔으나, 부모가 자녀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았고 부모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않았기에 결국 자녀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녀가 복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녀의 이름으로 대신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헌금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헌금은 누가 대신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는 대신 내어 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고백이 담기지 않은 헌금은 헌금이 아닙니다. 그것은 헌금도 기부도 아닙니다.
과부의 다음 단계를 언급하지 않는 본문 말씀
앞서 자녀의 이름으로 대신 헌금하는 분이 결국은 헌금을 ‘복’과 연결시킨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복과 연결시킵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느니 “십일조를 제대로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라고 말하는 기복신앙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러한 연결이 전혀 옳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과부가 이렇게 헌금한 후에 어떤 복을 보상 받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그 뒤의 이야기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그날 굶고 기도했는지 갑자기 양식이 생겼는지 성경이 말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헌금 후 물질적으로 복 받은 결과를 간증하는 방식으로 헌금 생활을 독려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소득이 높아질 때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이 잘 풀려야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중에 헌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우선권을 두고 살 수 있다는 것,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다는 것, 궁핍함 속에서도 그분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 받은 강력한 증거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사람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헌금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얼마의 헌금을 하는지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4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어떻게” 하는 지를 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이 아니라 그 과부의 형편과 믿음을 보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형편과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금액의 헌금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 나의 모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새생명이니 나의 모든 생명을 드립니다” 라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소유 역시 나의 것이 아니라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의 일부를 드립니다”라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만유의 주님을 여러분들의 소유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설교 질문
1.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아계실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 예수님은 자신이 앉아계신 동안에 있었던 일을 보시고 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4. 예수님이 헌금함 앞에 앉으신 이유, 많은 사람들의 헌금 중에서 특별히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집중하시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참된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6. 헌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고백을 담습니까?
7. 나의 헌금과 고백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어린이 질문
1.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아계실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 참된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3. 헌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고백을 담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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