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8년 8월 17일 11시 장소: 튤립 교육 선교회 본문: 히 2:1-4 제목: 큰 구원을 둥한히 하면 설교: 김명도 목사 길이: 40분 녹음: C-60 cassette 서론: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을 위해 쓴 것이다. 한번 예수를 믿다가 나중에 뒤로 물러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권면하는 내용인데 그것은 히브리서 1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는 천사보다 우월한 분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고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인데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신 그 복음이 진리라는 것과 그 복음을 통해서 얻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진노하신 하나님의 형벌이 반드시 임하는데 그 형벌이란 영원한 형벌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히브리 2:1-4 말씀을 통해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세 가지로 대지를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I 구원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 II 구원의 복음을 등한히 하는 결과 III 구원의 복음에 순종하라 I 구원의 복음을 들어라 본문 히 2:1에는 처음에 “그러므로” 로 시작한다. 성경에서 <그러므로> 란 말이 나오면 반드시 앞과 뒤를 연관 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항상 그 앞의 이야기의 논리에 따라서 뒤에 나오는 논리를 펴 나가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이 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태만하다가 사회에 나가면 전문분야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낭패를 당하고 결국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을 때 학문을 열심히 배워야한다“는 이론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그러므로” 라고 한 것은 그 앞에 나오는 히브리서 1장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1장이 무엇을 말합니까? 제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하여 형벌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이름은 모르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구약의 모세보다도 우월하고, 천사보다 우월하고, 구약의 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힘주어서 말합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로서 구원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전제로 하고 제2장 1-4 절에서는 “그러므로” 라고 연결하면서 논리를 펴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구원의 완전한 완성 (Final Consummation) 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재림은 세상을 심판하는 목적도 있지만 구원을 완성하려는 것이 그의 첫째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택함 받은 백성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셨지만 지금은 아직도 우리의 육신은 거듭나지 못하여 늘 죄에 약하고 시험을 받는 것이 사실이고 뿐만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가 아직도 불 못에 던져지지 않고 건재하여 불신자를 사로잡고 있으며 믿는 자녀도 유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으로 불신자와 사이비신자들이 사단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고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때이며 이때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구원의 멧세지인 복음을 들으라” 고 권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또한 3장8절과 13절 에서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강팍하게 됨을 면하라” 라고 말합니다. 구원이란 내일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 일을 보장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밤에 잠든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기에 복음을 듣는 일은 시급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에 착념하지 않고 건성으로 듣기 쉽습니다. 엄숙한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한편 귀로 듣고 한편 귀로 흘러 내보내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에 바로 착념하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1절 하반절에 “혹 흘려 내려갈까 염려하노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말씀을 도적질해 갑니다. 우리 마음을 도적질 맞으면 안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도적질 맞아 어느 것이 진리인지 모르며 길을 잃고 방황합니까? 세상에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 이듯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가 두 개일 수 없습니다. 진리가 귀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진리가 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 친히 말씀하신 예수님이라면 그가 말씀하신 복음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말씀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 염려 걱정에 앞서 말씀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흘려보내지 말라” 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메시지인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평생 살아가는 인생의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105 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이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듭니다.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비 진리, 도덕과 부도덕,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는 시금석이 바로 주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사랑하면서 외워야 합니다. 사람이 성경을 외우기만 한다고 해서 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속사람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말과 행동이 성경에 부합합니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런 진실한 종들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옛날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던 16세기 Scotland 나 Holland 에서는 목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도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기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니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 못하여 이단에 빠지고 대인관계에서 죄를 대범하게 짓게 되고 가정이 파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말씀하기를 말씀을 듣고 “흘려 내보내지 말라” 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식이 들어 있는 복음을 외면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도 우리의 장래도 우리의 계획도 모두 잃게 됩니다. 생의 의미마저 잃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을 가끔 보는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믿는다고는 하지만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인 복음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죄악된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 착념한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직장도 그러합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인 복음과 성령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II 구원의 복음을 등한히 하면 그러므로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보응이 따르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옛날 일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던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형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과 대항하여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벌하여 추방했습니다. 이사야 14장 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옹위하던 천사가 어떻게 사탄으로 타락했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Nebraska 의 어느 상원 의원은 하나님을 상대로 지방법원에 고솟장을 제출했고 판사는 이를 접수했다고 합니다. 그 소장의 내용은 “하나님이 성경에 여러 가지 재앙을 말하기 때문에 실제로 지구에 기근, 홍수, 전쟁 등의 고통이 임하니 법원은 하나님에게 명령하여 이런 일을 즉각 중지하도록 명령하라” 는 내용입니다. 이 싸움은 볼만합니다. 누가 이기는 지 두고 볼 일입니다. 오늘 이처럼 무모하게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들이 미국에 얼마나 많습니까? 패역한 세대는 이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은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반드시 벌하십니다. 시편 95:7-11절에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모두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 3장 8절에서 히브리 기자는 구약 시편 95편 4-11절을 인용하면서 그들처럼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멸망을 당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가끔 생각할 때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할 텐데”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정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실수가 없는 완전한 분이시므로 가정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인간이 계획하고 도모하는 일들은 모두 죄 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견주어 무슨 일을 가정하는 일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자기의 주권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눈으로 볼 때는 가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 지는 것이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는 길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질병으로 오래 고생하는 분들이 있고, 교통사고로 어려움을 당하는 분, 가정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질병이나 세상 고통에서 면역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의 하락 하에 되어 지는 일이기에 묵묵히 순종하며 오로지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장 잘 믿는 신실한 종교개혁가 칼빈 선생이 몸에 27가지 병을 가지고 살다 간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설명됩니다. 놀라운 것은 칼빈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불평 없이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서 늘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 "SOLI DEO GLORIA" 를 외쳤다는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칼빈이 몸에 병이 많은 것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은 탓이라“ 고 하며 비난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살아 있는데도 “칼빈이 죽었다” 라는 유언비어를 편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아담의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은 할 수 없이 죄의 본성이 항상 들어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난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며 Genever Academy에서 강의하고 설교하고 글 쓰면서 55세의 생을 마감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사탄의 사주를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실한 주의 종들을 비난합니까?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목숨마저도 내 놓아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오?” 라고 말하는데 “피한다” 는 말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완성하신 놀라운 이 구원의 복음을 한귀로 듣고 흘려 내보내며 착념치 아니하면 그 결과 닥아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등한히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니 반드시 심판을 받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 온다고 악한 일을 하기에 담대하지만 반드시 심판은 면할 길이 없다고 전도서 8장12절과 13절에 말합니다. 이 구원이 어떤 구원입니까? 다른 종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복스런 구원입니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는 다른 종교는 “자율적인 종교” 이고 기독교는 “타율적 종교” 라는 점입니다. 다른 종교는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 그 공로의 댓가로 무엇을 받는 보상의 종교입니다. 공을 세우면 그 공의 효과로 병도 낫고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내세의 복도 받는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공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만큼 심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구원 받을 자를 창세전에 택해 주시어 내 죄를 대신 짊어주신 예수를 의지하는 것만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복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타율적 종교”의 특징입니다. 에베소서 2:8에 보면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니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엡2:1). 죽었던 우리를 살리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고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히브리서 기자는 “큰 구원” 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큰 구원을 다른 종교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큰 구원을 등한히 하고 외면하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귀에 좋은 말만 듣기 좋아하지만 심성이 부패한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귓만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하는 근성이 있지만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들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필요한 말씀 즉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들어서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구원의 멧세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나침반 없이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과 같습니다.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면 어찌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 있나요?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의 잣대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갈 동안 말씀을 모르면 어느 길이 진리이고 어느 길이 비 진리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단도 구별 못하고 이단을 따라가다가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에게 구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대로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사람이 만든 교리가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18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멸망이 있다“ 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번 해 본 말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진리이고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 지고야 맙니다. III 구원의 복음에 순종하라 돌아옵시다. 구원의 복되신 소식을 듣고 구원의 복음으로 돌아옵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어떤 것인가요? 본문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주께서 전해주시고 주께 들은 제자들이 우리에게 전한 것이고 나아가서 이 말씀이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를 주시어 이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다고 4절에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표적과 이적이 나타난 기록을 봅니다. 이런 표적과 이적은 이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구원의 복음” 임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이적과 기사가 영원토록 계속하는 것은 아니고 복음 사역 초기에 백성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이므로 이를 믿도록 하고 이를 기록하여 정경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였습니다. 이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성령과 함께 역사하면서 복음 사역 초기에 얼마동안 복음의 진리를 증거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며 주님으로부터 제자들이 들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야웨 하나님”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틀림이 없는 정확하고 무오한 말씀이며 영원토록 불변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전하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아 전하고 제자들이 나가 전할 때에 하나님이 이적과 기적을 동반하게 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틀림없이 입증하고 증거한 진리의 복된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 큰 구원의 말씀으로 돌아옵시다. 말씀을 사모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연구하고, 외우고 그 말씀대로 이 험난한 인생길을 살아갑시다. 그 말씀은 여러분의 등불이 되어 풍랑이 이는 인생 항로를 비쳐 줄 것입니다. 결론 오늘 히 2:1-4을 통해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흘리지 말고 말씀에 착념합시다. 이 복음은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큼 큰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전하시고 제자들이 나가서 예수님에게 받은 바를 힘있게 전하고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하나님이 친히 이적과 기적으로 인치시며 입증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등한히 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이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누어 주신 것으로서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끝- |
영을 분별하자 (0) | 2009.07.26 |
---|---|
넉넉히 이기느니라 (0) | 2009.07.25 |
어떻게 기도할까? (0) | 2009.07.24 |
한해를 돌아보며 (시 90:10-17) (0) | 2009.07.19 |
새해의 결심 (벧전 5:10-11) 신년 설교 (0) | 2009.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