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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이기느니라

김명도박사 설교

by 김경호 진실 2009. 7. 25. 18:39

본문

일시: 2008년 7월 20일
장소: 튤립 교육 선교회
본문: 롬 8:31-39
제목: 넉넉히 이기느니라
설교: 김명도 목사
길이: 40분
녹음: C-60

서론:
로마서 8장은 로마서중에서 로마서 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르쳐줍니다.
우리 성도는 가끔 낙심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당하는 경험입니다. 우리 앞에 갔던 믿음의 선진들도 모두 낙심될 때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엘리야도 로뎀나무 밑에서 낙심되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고 (왕상 19:4).  모세도 광야에서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민 11:15). 인생자체가 그렇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낙심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믿음으로 이겨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예수를 믿지만 아직 육신까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갈 동안은 항상 나의 육신의 생각과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또 늘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 롬 8:31-39 까지 말씀을 근거로 “넉넉히 이기느리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 가지로 대지를 나누어서 전하겠습니다.

  I.  넉넉히 이기는 근거
II.  넉넉히 이기는 방법  
III. 넉넉히 이기는 자의 복

I.   넉넉히 이기는 근거
   오늘의 신학 풍토에는 성도는 조금도 환난을 당하지 않고 무병장수하며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은 Kenneth Copeland(케네쓰 코플랜드) 나 Charles Cabbs(찰스 캡스) 혹은

 Napoleon Hill (나폴레옹 힐)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도가 가난하고 병드는 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야단칩니다.  Peter Glover 라는 사람은 영국 사람인데 처음에는 이들 미국의 목사들이 영국 London에서 전도 집회를 할 때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줄로 알고 열심히 집회에 참석하였으나 나중에 이들의 가르침이 거짓을 인 것을 알고 Day one Publication 이라는 출판사를 통해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이름이 "Signs and Wonders Movement Exposed" (이적과 기적 운동 폭로) 라는 paperback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얼마나 이들이 비성경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우롱하는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이 책은 지금도 Amazon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어려움이 옵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겠으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요한복음 16:33에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두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 또는 육신이 연약한 가운데서 주님을 따르며 섬겼습니다. 욥의 사적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믿음이 없는 백성들 때문에 고생했으며 다윗도 못된 아들 압살롬 때문에 고생했고, 엘리야도 못된 이세벨 왕후와 아합왕의 핍박으로 인하여 고생했고 신약의 바울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물들은 신앙의 힘으로 그 어려운 역경을 모두 이겨낸 분들입니다. 이들이 모두 달나라에서 온 초인간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들은 역경을 슬기롭게 믿음으로 이겨낸 분들입니다.  넉넉히 이긴 사람들입니다.

성도의 생애에 고난이 없으면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온실의 화초를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힘이 없습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면 금방 죽습니다.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컸기 때문에 고생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자라난 화초를 보십시오. 웬만한 비바람이 불어와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일부러 고생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닥아 오는 고통을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통이 오면 신앙을 연단하는 방편으로 알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린애를 기르는 것도 화초처럼 길러서는 이 세상을 극복하며 살아갈만한 인물로 양육하기 어렵습니다. 온갖 고생을 경험한 사람만이 인생을 살아갈 지혜가 있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바로 하게 됩니다.

고통은 불신자나 신자 모두에게 찾아오는데 차이는 불신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기 심지어 “자포자기” 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수도 있지만 믿는 성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찾는 지혜를 얻는 기회로 삼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 삶을 살피시며 그의 뜻을 펴 나가십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란 말에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기르시는 하나님,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것으로 끝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자기의 주권에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연신교(이신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처음에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그 다음에는 손을 놓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스스로 운행하도록 하셨다“는 그런 무책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넉넉히 이기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항상 눈동자처럼  살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결코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어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무엇인들 우리를 위해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로마서 8:32절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 13:5에는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고 언약의 백성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를” 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서는 단수인 “se" 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심이 분명합니다. 그 만큼 우리 성도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 ”과연“ 이라는 말로 번역된 말은 원문에서는 <ou mh> 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by no means” 라고 해석되는 말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란 강한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또한 이 성경구절에서 <너를> 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모두 <너> 라는 말이 <절대로> 란 동사보다 앞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너”라는 말을 강조함이 분명합니다. 원문에서는 <ou mh se anw oud ou mh se egkatalipw> 입니다.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결코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란 의미입니다.  

이 내용을 바울은 로마인서 8:31에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라고 했는데 우리말로는 <조건 절>처럼 보여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한다면” 이라고 들릴지 몰라도 원문에서는 <ean> 이란 "종속접속사 (subordinate conjunction) 가 아니고 <ei> 라는 접속사 입니다. <ei> 이라는 말은 가정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해석하자면 "Now that God is with us who is against us?" 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란 의미가 원어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능동적 순종” 과 “수동적 순종”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의를 이루시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활 승천하시어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보좌에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는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넉넉히 이김을 주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II. 넉넉히 이김을 얻는 방법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넉넉히 이길 수 있는가요?  사도행전 16장에는 지진을 만난 빌립보 간수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바울은 공포에 질린 그 간수에게 말합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의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행 16:31).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는 줄로 착각합니다. 교회를 잘 봉사하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당을 짓거나, 한 주일에 연보를 천불씩 드려야 하거나, 교인을 몇 명 인도해야 한다거나 이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은 이방종교나 아니면 천주교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해서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비교종교학에서는 <자율적 종교> 라고 합니다. 천주교는 성경과  전혀 다른 <칭의의 개념> 을 가르칩니다. 그들의 <구원관> 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선을 행해야 한다” 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은 <독력구원 monergism> 이 아니라 <협력 구원, synergism>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되어 진다>  라는 성경적 구원관을 일축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미사에 참여하면 모든 죄가 용서 된다고도 가르칩니다.  사람이 공로를 세우는데 자기 구원에 필요한 이상의 공로를 세우면 이를 여공 (餘功) 영어로는 “supererogation” 이라고 하여 교회에 예치해 두었다가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의 구원에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에베소서 2:8 에는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말하고, 갈라디아 2:16에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고 말합니다.  우리의 의나 공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옷> 과 같다고 했지만 원어의 의미는 <더러운 천 조각> 과 같다고 이사야 64:6에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가 이룩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방법도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분의 힘으로만 가능해 집니다. 요한일서 4:4에 “우리 안에 있는 이는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큼이라”라고 했는데 우리 안에 역사 하는 성령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이 말은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이면 내가 머리에 그 형상을 그려보면서 기도하면 반드시 받게 된다“는 그런 이단 신앙을 말함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내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내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공중의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생 개인 개인을 상대하시며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빌 4:13 말씀을 오해하여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말을 아무것이나 내가 원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이 있지만 그 성경구절의 말은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는 말입니다. 내 힘으로 되어 지는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오” 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34절 후반절에 “하늘에 오르사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 이십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35절에 우리가 아무리 “핍박과 곤고와 환난을 당한다해도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바닷물이 흉흉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신 시편 46편의 말씀에 아멘 으로 화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시편기자가 왜 “바다”를 거론했을까요?
유대인들은 바다를 “애물단지” 로 생각하고 제일 싫어합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땅의 작은 강들은 땅을 비옥하게 하지만 바다는 범람하면 땅을 황폐화하기 때문에 무서운 존재로 바다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유대의 <랍비 문헌, Rabbinic Literature>들의 글에는 <잔잔한 시냇물>, <사슴이 찾는 시내물>, <요단강> 등을 기록하지만 "바다가 복을 준다" 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바다는 항상 위협을 주는 불청객으로 기피합니다.  

사나운 폭풍이 요동치는 바닷가에 큰 바위 한 개가 있고 그 바위 아래 빈 틈이 있는데  폭풍이 미치지 못하는 그 바위틈에 갈매기 한 쌍이 앉아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립니다. 얼마나 평화스럽게 보입니까?  그들은 폭풍의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안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의 폭풍이 입 벌리고 달려와도 내 영혼은 늘 평안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넉넉히 이김을 주시기 때문 입니디.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던가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란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욥기 5:18-20에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에게 담대하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천지창조도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던 천사는 형벌을 받아 사탄이 되었다고 이사야 14장에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은  땅에 편만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한 곳에 모여 바벨탑을 쌓고 하늘까지 올라가려 했던 무리들을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흩으셨습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했던 욥은 말년에 더 큰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상에 있습니다. 이  땅에 나그네로 지날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며 주님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베도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11절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라고 가르쳐 줍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려서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법학을 공부했고 아버지의 권고로 후에는 신학을 공부한 후 제네바에 가서 목회하면서 하도 몸을 무리해서 몸에 27가지 병을 얻어 고생하면서도 목회하고 강의하고 글 쓰는 어려움은 고사하고  출생한 딸이 생후 며칠 만에 죽고, 아내마저 죽는 가슴 아픈 일을 당하면서도 주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SOLI DEO GLORIA 사상으로 하나님의 주권만 의지하고 살았던 위대한 신앙가를 봅니다.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III. 넉넉히 이기는 자의 복
   넉넉히 이기는 자가 받는 복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의 복이나 자식들이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복은 그런 차원이 낮은데 있지 아니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이 지구 땅덩어리가 불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길 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이 땅에서의 세상적 성공과 물질의 복만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물질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 사업에 이바지 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런 것 보다 다른 방면으로 복을 주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역사하기도 합니다. 모두 일률적인 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자 필요한대로 채워주십니다.

<참다운 복> 은 “하나님을 아는 복” 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복은 영원합니다.  그 복은  아무리 지구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른 신앙은 영원합니다. 이단 신앙은 불과 함께 타 없어질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10-15절 까지 말씀을 눈여겨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종류가 많습니다. 불에 타는 신앙이 있습니다. 바른 신앙만이 나중에 불에 타지 않습니다. 다른 신앙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과 바른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거짓 복음에 속고 있으면서도 당장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전도서
8:13에는 악인이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곤고함을 받고 심지어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아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라“ 라고 말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로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바른 신앙을 지키다가 핍박을 받습니까? 억울하게 곤고함을 당합니까?  원치 않는 질병으로 얼마나 고생합니까? 그러나 가장 복된 소식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앞서 38절에서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장래, 능력, 높음, 그리고  깊음‘ 등을 거론한 것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영생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지금 아무리 우리가 고생해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절대성> 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 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단어들 중에 들어가지 않는 방해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세상에 절대로 없다는 말입니다.

결론:
우리는 세상에서  빛의 아들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미음을 받고 핍박을 받고, 곤고함과 온갖 환난을 받으며 눈물로  살아갑니다.  바른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받는 핍박을 상상해 본 일이 있습니까?  바른 신앙을 지키지 않고 되는대로 적당히 세상의 비위를 맟추어가며 세상 물결 따라 신앙생활하면 핍박 받을 일도 고난을 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 진리 안에 살려고 하기 때문에 악의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말씀대로 악인은 풀처럼 베임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죽임을 다하는 어린 양처럼 여김을 받으며 살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나에게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며 살아갑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주님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썻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날 그 영광의 날,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는 그 영광의 날, 승리의 개가를 부를 때까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해도 우리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처럼 굳건한 믿음으로 순간 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넉넉히 이기도록 주께서 크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녁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 넉넉히 이기느니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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