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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할까?

김명도박사 설교

by 김경호 진실 2009. 7. 24. 23:08

본문


일시: 2008년 8월 3일 11시
장소: 튤립 교육 선교회
본문: 마태복음 6:5-13
제목: 어떻게 기도할까?
설교: 김명도 목사
길이: 50분간
녹음: C-60 cassette

서론:  오늘 분문 말씀은  우리 주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원을 아뢰는 생명줄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기도하는 태도나 기도의 내용 등이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까?  오늘은 본문 마태복음 6:5-13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기도할까?”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세 가지로 대지를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 기도의 필요성
II. 기도의 태도
III.기도의 내용

I. 기도의 필요성
기도가 왜 필요한가요? 어떤 분은 위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도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고 명령 합니다 (살전 5:17). 성도는 중생하는 순간 주님과 신비적인 유기체로 연합됩니다. 주님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거듭난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피 흘려주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도는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어서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생명력을 공급받듯, 성도는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그 힘으로 살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면 주님과 늘 교제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교제의 방편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 부르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의 성호를 찬양하며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에게 아뢰게 됩니다. 성경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기저기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고 명령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어린애가 학용품이 떨어졌다면 부모는 어린애가 말을 안해도 알고 있고 새로운 좋은 학용품을 사 주지요. 그러나 어린애가 “학용품을 다 썼는데 새것 사주세요” 라고 졸라대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성도의 생활은 기도의 연속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우리의 영성이 매 말라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게 됩니다. 기도가 없으면 생활생활이 나태해 지고 죄를 짓고도 아파할 줄을 모르고 태연스럽게 살아갑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더욱이 오늘처럼 어지러운 때에는 이전보다 더욱 기도가 필요합니다.


II. 기도의 태도
   기도하는 태도가 다양합니다. 어떻게 기도할 것입니까?
   첫째, 본문에는 남에게 보이고저 함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면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한 내용을 잘 알고 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큰 목소리로 동리 어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일조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라고 떠들어 대는 것입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자신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기도하는 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겸허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수식어를 사용하며 큰 소리로 웅변조로 마치 설교 하듯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보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자리에 맞는 기도에 국한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라면 주일 예배만 염두에 두고 기도할 것이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복습하는 기도는 피해야 합니다.  성도의 장례식이면 유가족을 염두에 두고 유가족이 고인의 믿음을 본받아 남은여생을 자녀 손을 돌보며 살도록 기도할 것이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자리라면 새로운 가정의 신앙을 중심으로 평생을 믿음으로 살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둘째, 본문에 보면 “중언부언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헬라 로마 사회 (Greco-Roman world) 는 도처에 “영지주의” 가
풍미하고 있었고 이런 사상은 오늘 마치 <통일교>나 <레마선교회> 가 교회에 침투하듯, 당시 교회마다 영지주의의 침투로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신비체험을 숭상했고, 의식중심, 금욕주의등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관상기도로 “만트라” (mantra)를 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트라” (mantra) 란 “주문(呪文)입니다.

“만트라” 의 가장 좋은 예를 오늘 "Harekrishna" 를 계속 반복하는 힌두교 추종자들에게서 봅니다.

 짧은 한 구절을 계속해서 반복하는데 소위 “호흡기도"(breath prayer) 라고 하여  호흡할 때 숨을 내쉬면서 간단한 성경구절이나 아니면 다른 기도의 구절을 한꺼번에 뱉아 내는 식의 기도를 말합니다.

이런 형식의 기도가 기원 1세기에도 영지주의 신봉자들 중에 유행했고, 이런 호흡기도의  <mantra 운동> 은 기원 5세기에 수도사들에게서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의 풍습이며 기독교의 기도형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미국이나 한국을 뒤 덮고 있는 소위 <contemplative formation> (관상기도) 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방의 풍습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대로 기독교에 도입하고 있는데 이는 죄입니다.

1960년대 중반에 미국에 들어온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모두 이런 호흡 기도를 즐겨 사용하며 외계의 영 (spirit guide) 와 접선합니다. Shirley MacLaine 이나 Douglas Keys, Thomas Merton, Matthew Fox, 등이 이런 기도를 적극 추천하고 다닙니다.  

오늘의 문제는 한때 정통적이었던 목사나 부흥사, 신학교 강사들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 오므로 계시록 20장의 말씀대로 잠시 풀려난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대거 성경을 떠나 다른 신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디모데전서 4:1에서 이런 일이 있게 될 것을 미리 예언했는데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접기도” 를 하면서 “나를 따라 하시오” 라고 하고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내 죄를 용서 하소서 내가 주님을 영접 합니다” 라고 피전도인에게 따라서 기도하게 하고는 “당신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렇게 기도 한 마디 따라 했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개입이 없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목사들 중에서 이렇게 “전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도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Richard Foster(리처드 포스터) 의 말대로 손바닥을 위로 벌렸다 아래로 벌렸다 하면 기도해야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힌두교나 불교와 기독교를 통합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을 소멸하려는 비성경적인 신앙형태입니다.

  셋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이 십니다. 천사들이나 마리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천사에게 기도하고 성자에게 기도합니다.

 여기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자“ 란 천주교를 믿는 사람중에서
특별히 공로를 많이 세웠거나 순교한 사람을 말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들도 경배의 대상입니다. 천주교는 세 가지 형태의 예배가 있습니다. “라트레이아” 는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예배이고, “둘리아” 란 천사들, 성자들“ 에게 드리는 예배이고, ”후퍼둘이아“ 는 마리아에게만 드리는 예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것이며 다른 피조물을 경배하거나 거기에 절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 가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에나 열심히만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 아세라의 선지 도합 850명과 대결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방신을 믿는 850명의 선지들은 송곳으로 몸을 찔러 피를 흘리면서 제단의 주위를 맴돌며 열심히 아주 열심히 기도했으나 하늘에서 불은 제단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한 번 기도하니 곧 불이 하늘에거 내려와서 제단의 제물을 태웠습니다. 이유는 엘리야가 기도한 대상은 참 하나님이었고 아세라 와 바알의 선지 850명이 기도한 대상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인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란 어떤 나무로 만들거나 금속으로 만든
형상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숭상하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상당히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듯 합니다.

  넷째, 영상기도 (visualization) 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동양의 신비종교를 기독교에 도입한 이질적인 기도형태입니다. 한국의 모 대형교회 목사님은 가르치기를 “기도하여 응답 받고 싶은 내용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신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성도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가르치는데 이런 가르침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머리 속에 무엇을 그려 보며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는 가르침으로 사람이 만들어 낸 사람의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면 그것은 ”사기“ 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결과가 됩니다.  성도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이든 기도하면 모두 응답 받는다> 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만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을 가지고 역사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여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신다는 로마인서 8:26말씀을 눈여겨 읽어야 합니다.  그 좋은 예를 성경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읽어봅니다. 바울은 육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약한 시력인지 혹은 유대인의 끊임없는 핍박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없이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세 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그대로 응답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여 얻으리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 말은 <주님의 뜻대로 구할 때 주어진다> 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빌립보 4장 12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그 성경구절을 잘 읽어보십시오.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그 성경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부하면 부한 대로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살며 부하던 가난하던 하나님이 우리게 은혜를 더하시어 살아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재정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주실 터이니 건축부터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구약교수였던 Mose Silva 박사는 몇 년 전에 “Has the Church Misread the Scripture?" 라는 책을 썼습니다.  목사님들이 얼마나 성경을 왜곡하는지 이 책을 읽어 보시기바랍니다.

그래도 일반 성도는 성경을 모르고 신학을 모르니 그냥 속아 넙어 가거나 아주 교리에는 무관심하여 목사님의 재미있는 ”예화“ 에만 관심을 갖는 실정이니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이상한 신비주의를 따라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는 목사보다 똑똑하지 못하면 속을 수밖에 없고 ”속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독약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똑똑해 져야 합니다.  오늘 여기 앉아 예배드리는 우리 튤립 선교회 회원 여러분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속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역사적 신앙고백서들을 통달하면 요즘 범남하는 사이비 목사들에게 속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베르기 신앙고백서> <케임부릿지 선언> 혹은 <아다나시우스 신경> 같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를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남을 속이는 자의 죄는 하나님에게 더욱 진노의 대상이 되지만 속아 넘어가는 것도 죄입니다.

  다섯 째,  내 뜻을 강요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야웨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며 또한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이루어지 지지 않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당시 금지된 영어를 공부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총살장에 끌려가서 총살당할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살려 주시면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어린 꼬마가 기도했었는데 그 기도가 30년이 다 되어서야 이루어 진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 무서운 죽음에서 나를 건저내시고 오늘까지 어려운 역경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통해서 오늘까지 인도하시어 작은 그릇이지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모두 주님이 주권으로 역사는 증거이며 기도하고 조급하게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때로는 늦게 응답하는 일도 있으니 잠잠히 기다리는 여유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칼빈 선생을 우리가 여러번 들어서 잘 알고 있지요만 그는 편지를 쓸 때나 설교할 때 나 책을 쓸 때나 항상 즐겨 쓰는 라틴어 문구가 있었는데 D.V 라는 두 글자입니다. 이 말은 Latin 어로 <Deo Volente>라는 말의 약자로 “하나님에게 원함이 된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작정해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할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도우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지요.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기도의 패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이여, 이것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정상적인 바른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이것이 필요한데 이것을 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주시지 않으면 저는 앞으로 주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라는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눌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섯 째,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  살전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은 늘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요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새들이 일어나서 찬송가를 부를 때 나도 일어나서 말씀을 읽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난밤도 지켜주시고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밥상을 물리고 가족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 중 하루를 마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에게 범죄한 모든 죄악을 용서 하소서, 우리의 삶이 늘 기도로 하나님에게 교통하는 생활이 되게 하소서. 이 밤도 편한 잠을 잘 수 있는 은혜를 더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자녀를 키우면서도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일곱째, 기도할 때는 항상 네 가지 요소를 기억하십시오. 그 네 가지 요소 란 “ACTS"
인데 A 는 Adoration 즉 경배입니다. C 는 Confession 즉 죄의 고백을 말하고, T 는
Thanksgiving 즉 감사를 말하고 S 는 Supplication 간구를 말합니다.  기도할 떄는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합니다” 한다든지 “하나님이여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주님에게 돌립니다” 한다든지 주님의 성호를 경배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를 고백하는 내용 Confession of sin 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는 항상 죄를 자백해야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 맨 끝말이 “내 죄를 용서 하소서” 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마칩니다.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 오늘 하루도 살아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등 감사가 넘치는데 그 감사를 주님에게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구하는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간구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 이어든 허락 하옵소서” 라고 항상 주님의 주권을 높이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이 네 가지는 기도할 때 항상 잊지 말고 포함할 기도의 필수 요건들입니다. 마치 음악의 3대요소가 melody, harmony, rhythm 과 같은 것입니다.

끝으로 여덟 번째, 기도는 항상 <현재형> 으로 드립시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도를 시켜보거나 어느 집회에 가서 보면 목사님들까지도 “기도 드렸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기도 했습니다” “기도 드렸습나이다” 라고 기도를 <과거형>으로 마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과거형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기도의 패턴은 항상 <현재형> (Present Tense)입니다. 즉, “기도 합니다” “기도 드리옵니다” “기도 드립니다” 등으로 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는 형태입니다. 요한복음 17:9에 나타난 주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내가 비 옵는 것은” 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 말은 원문 헬라어에서 “에로타오” 란 말인데 이는 간구한다는 동사의 “현재형“입니다. 앞으로 기도할 때는 반드시 ”현재형“ 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III.기도의 내용
   기도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 사람마다 필요가 다르니 내용이 다릅니다. 어떤 분은 병약하여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떤 분은 사업에 실패하여 재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어떤 분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사람마다 기도하는 내용이 필요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이건 기도의 패턴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항상 그렇게 그런 틀에 박힌 모양으로 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범 패턴“입니다.  언제 무슨 기도를 하든지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pattern 대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9절이하에 기록된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도록 합시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자세히 읽어보시면 기도의 패턴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성호를 경배하는 내용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말씀을 음미해 보세요. 앞서도 말씀드렸듯
ACTS 가 기도의 4대 요소인데 우선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고 그 이름을 송축하는 내용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고 그 성호를 찬송하고 경배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부터 아뢰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선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음의 기도 부분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도 할 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입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내 생각과 내 주장을 앞세울 수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이 성경과는 위배되지만 급한 사정이니 이번만 예외로 해 달라” 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 다음부터 세 구절은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며” 란 내용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며 입고 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일용한 양식“ 이라는 말은 음식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망라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어찌 빵 뿐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손을 끊으면 인간은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여 계시지만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조물주인 하나님에게 의존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성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에게 겸허하게 간구합니다. 사도신경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란 말 가운데는 하나님의 우주만물 그리고 인간의 창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관장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역사 하시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말은 다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 줌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란 내용인데 이 말은 사죄의 은총을 비는 내용이지만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 하는 일이 많아서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 구절을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란 의미로 해석합니다만 그것은 그릇된 해석입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한 것이 공로가 되어 그 댓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 해 달라는 것은 극히 비성경적인 해석입니다.  남의 죄를 용서한 것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참된 뜻은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들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내 이웃을 용서할 마음을 주시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란 말은 우리에게 시험이 전혀 오지 않도록 할 수는 없지만 시험이 올 때에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악에서” 란 말에서 “악" 이라는 말은 원문에서 ”포네로스“ 이니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의 계교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만 의지하고 살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오늘과 같이 말씀이 어지러운 때에 이 기도는 참으로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줍니다. 오늘 얼마나 시험에 들기 쉬우며 얼마나 사탄의 계교에 빠지기 쉽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사탄의 사주를 받는 자들과 싸워야 하고 기정에서도 사탄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원수가 집안에 있다’ 고 말씀 하셨고,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었다“ 고 베드로전서 4장에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 하십니다. 오늘 대형교회들이 파탄되고 가정이 파탄되는 모습을 눈여겨 보십시오. 반드시 뒤에는 ”악" 즉 사탄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깨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라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높이는 말인데 우리의 왕으로 만물를 지배하시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는 하나님에게 구하여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토록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앞에서 충실한 종으로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살겠다는 성도의 헌신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같은 주기도문을 가르치는 누가복음 11장 말씀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 말씀을 성경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많은 분들은 마가복음 16장 9절 이하의 부분이 어느 사본에는 누락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 구절도 성경의 일부인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분명히 성경의 일부입니다.

결론
기도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명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셨고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에게 잘 못 구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에 따라 자기의 뜻대로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어떤 때 우리가 잘못 구하면 응답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롬8장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씀 합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이 아비가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아버지가 없듯, 우리 영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늘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주십니다. 기도엔 항상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하고 죄를 고백하고, 은혜에 감사하고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으며
항상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동양종교를 가미시킨 <관상기도> 나 <신비주의적 이교도적 기도> 는 피해야 합니다.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인데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다는 말은 야고보서 4:4절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으니 세속화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아 7:16절 이하에서 “ 이 백성은 나에게 기도하지 말라 그들이 기도해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요?  아스라엘 백성이 이방신의 미신을 따라 “하늘의 황후에게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세속신앙에 물든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산 제사를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어도 의인 열명이 없었던 소돔 고모라 죄악의 도성은 멸망했습니다. 우리도 죄를 지으면 멸망합니다. 기도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열왕기하 20:2 절 이하에 보면, 히스가야 왕이 죽게 되어 기도하니 15년간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브닌나에게 핍박을 받던 한나가 기도하니 자식이 없던 한나가 사무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출애급기 14:21에 보면, 모세가 기도하니 홍해가 둘로 갈라져서 육지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말씀으로 인하여 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기도하니 옥문이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 이하에는 바울과 실라가 밤새 찬송 부르고 기도했더니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다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기도는 중요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매달라 집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두절되고 인생 살아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 교회마다 문제가 많고 목사들이 비행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가정이 여기저기에서 파괴되는 것은 사탄의 작전인데 기도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문제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한국을 위해서, 북한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그리하여 북한 2000만 동포들의 인권이 회복되어 저들도 마음대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기도합시다. 미국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다르리도록 기도합시다. 내 가정을 위해서 기도 합시다. 병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기도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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