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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주차.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10. 1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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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주차.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


 

 

본문: 28:16~31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23~28)


 

 

1. 그토록 소원하던 로마


 

 

마침내 바울은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16절에 보니 바울에게는 특별히 감옥이 아니라 셋집에 기거하도록 배려를 합니다. 이른바 가택연금에 해당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 서방사본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 사본은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자 백부장은 그 죄수들을 스트라토페타크(황제의 근위대장)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지키는 병사와 함께 진영 바깥에서 혼자 살도록 허락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죄수이긴 하지만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고 또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은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바울만은 일반 민가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 두 명 이상의 정규 군인이 감시를 하는 상태에서 손목이 가볍게 쇠사슬에 묶여 병사에게 연결된 상태로 지냈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16절에서 또 하나 살펴야 할 것은 여기서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표현이 마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가는 바울의 연금과 함께 사도행전의 주인공을 다시 바울 한 사람에게로 돌리고 자신은 철저히 3인칭 객관적인 역사가의 관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고 누가가 바울을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 구금되었던 바로 이 기간에 쓴 옥중서신에 따르면 누가는 적어도 1년 정도는 바울의 동료들과 로마에 거류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누가가 바울의 이후 행적을 더 많이 보도하지 않고 로마에 있는 셋집에서의 생활까지만 기록하고 그것도 자세한 내용 없이 매우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그것은 누가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함으로써 이미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 누가의 목적은 사도행전을 기술할 때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부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어떻게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역사에 남기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목음이 바울의 손에 들리어 로마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일들은 매우 필요한 이야기를 제외하고선 간략한 소개에 그치는 것입니다.


 

 

2. 복음을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


 

 

바울이 로마에 입성했다는 소문은 금세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선 바울이라는 사람이 유명하다 해도 그리 반가운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유대사회가 떠들썩한 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특히 유대인 지도자 그룹에서는 바울에 대한 거부감이 심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입장에서 바울은 이단입니다. 유대교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퍼트리는 이단의 괴수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정죄 받고 사형집행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들이 오매불망 소망하던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 하고 그가 3일 만에 부활했다고 주장하다 예루살렘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지금 로마에 끌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초청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의 유대인 지도자들부터 초청하여 로마에 오게 된 경위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시도합니다. 그것이 17~20절의 내용입니다.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다른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도 믿어 왔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나도 이스라엘의 소망을 함께 가진 자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하는 등 불법을 저지른 적이 없다. 이것은 로마 당국도 그리 생각한다. 그런데 유대인 동족들이 나를 고소하기에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항소하여 여기에 온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결백성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행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중을 살피며 직접적인 불평을 삼가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합니다. 이런 변증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종교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종교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따라 이제 성취되었음을 널리 알리는 일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도 한 발 물러섭니다. 20-21절이 그 내용입니다. 자신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 대한 어떤 전갈이나 정보를 접하지 못해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른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더 시간을 갖자는 선에서 1차 면담이 끝납니다.


 

 

이제 23절부터 28절까지 2차 면담의 내용이 기술됩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은 충분한 논의를 가지기 위해 하루 일정을 잡고 다시 바울이 유숙하는 집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면담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매우 간략하게 아침부터 저녁가지 바울의 강론이 있었고,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했으며,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했다고 보도합니다.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구약의 역사와 예언, 그리고 이스라엘 종교의 진정하고도 필연적인 완성임을 유대인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1:4)”이시며, 구약 성경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고난과 승리의 소식을 미리 예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했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과 유대인 사이에 매우 날카롭고 열렬한 논쟁과 격렬한 언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누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복음에 대해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살고 복음으로 죽고자 한 하나님의 택한 사자입니다.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온 것입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바울의 복음강론을 누가 이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감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람을 누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비록 집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죄수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조금도 굴하지 않는 바울 사도의 당당하고 꿋꿋한 모습이 그려지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것은 이미 예상한 대로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에다 이 사실을 예견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11:8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29:4, 29:10)


 

 

누가 또한 이런 예상을 충분히 알고 잇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기서 이런 반응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고대로 일어나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끄집어냄으로서 매우 당연한 일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미 누가는 이 예고를 비시디아 안디옥과(13:46) 고린도(18:6) 및 타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준 바가 있습니다. 함께 사6:9-10을 찾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이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우리는 타락한 죄인들이 주님마저 어떻게 거부했는지 이미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1:10-11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이 죄인들이 복음을 대하는 태도요 반응입니다. 이런 죄인들의 불신앙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가슴 아픈 불신앙을 취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음소리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소망이자 위로의 편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면 복음을 수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육신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9:8).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9:13)는 말씀을 통해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9:11)을 내세웁니다. 토기장이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합니다(9:21). 나아가 택하신 자는 믿음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고(10:9, 17), 바로 이런 자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된다(11:5)고 결론을 내립니다.


 

 

예상하다시피 바울의 복음을 듣고 두 파로 나누어집니다.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의 수가 거의 대다수입니다. 교리적으로 이들은 육신으로는 유대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지만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9:6).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시인합니다. 주님이 수전절에 예루살렘의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10:26-27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기독교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이냐 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단이나 혹은 타종교는 모두 구원을 말하면서 인간의 노력을 늘 강조합니다. 물론 이들 중에 너무 인간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협력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 같은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9:15).


 

 

결국 유대인들의 이런 거부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그것이 28절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로마서에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복음의 당위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1:4)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1:17)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11:23-24)


 

 

3.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


 

 

이제 마지막 부분인 30-31절입니다. 바울은 이태를 로마에 연금된 상태로 자기 셋집에서 보냅니다. 학자들 사이에선 이 비용을 누가 부담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는 자기 셋집에라는 헬라어 원문을 자기가 벌어서혹은 자비량하여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대다수는 바울이 비록 손목에 포승줄을 달고 있긴 했지만 장막 만드는 일 등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바울이 자기 돈으로 생활한 이유는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숭고한 정신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으로 복음사역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성도들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바울은 스스로 이 권리를 포기합니다. 고전 9:3-5입니다.

우리가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12-14절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역사적으로 불행히도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시초는 기독교가 합법화 된 이후, 지하 동굴인 카타콤에서 나와 국가에서 지어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국가에서 성직자들에게 월급을 주고 국가에서 교회의 일을 관리하기 시작한 때부터였습니다. 성직자가 일을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월급을 받고 사례금을 받으면서 기독교는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성직자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직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셋집에 오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 영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28절의 암시로 보아 대다수가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30절의 영접했다는 말은 그냥 환영했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이방인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형제자매로 인정했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이제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인 31절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자신을 찾아 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는 것으로 끝을 냅니다. 그런데 어쩐지 결론이 미지근합니다. 이후에 바울 사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로마교회는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 궁금한 것들을 모두 감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최후에 관한 여정들은 다른 기록에 의존하게 됩니다.


 

 

먼저 바울이 왜 1차 투옥 때 최종 판결을 받지 않고 풀려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 역사적으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구금된 2년 기간은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혹자는 잔혹한 네로 황제가 왜 바울 문제를 신속하게 재판하지 않았느냐 하고 의문을 표시합니다. 일설에는 네로는 62년경에 사비나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황후가 된 사비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한 고소고발이 더 이상 없자 황후가 힘을 써서 바울을 풀어주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더 이상 바울에 대한 확증적인 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무혐의로 풀려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바울의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있었다면 가만히 잇을 유대인들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대문이고, 그렇다면 누가가 그 기록을 빠트릴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 아무튼 이 기간에 바울은 옥중서신으로 알려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습니다.

 

 


이후의 역사는 다른 기록을 참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 가장 근접한 기록은 클레멘스 1서인데 5:7에 보면 바울이 서쪽 끝에서 전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다음으로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주후 325년에 쓴 <교회사>에서 바울이 감금에서 풀려나 2차 투옥 때까지 사역을 계속하다가 2차 투옥 때 순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바울은 주후 62년경에 네로 황제의 황후의 도움을 받아 무혐의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소원하던 서바나(스페인)와 여러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때 쓴 편지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입니다. 그러다 64년 로마화제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고, 이 여파로 바울은 재수감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엔 진짜 감옥에 수감되었고, 마지막을 직감한 바울이 이 감옥에서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꼼꼼하기로 유명한 누가가 왜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을 무시하고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미안성의 작품처럼 사도행전을 끝 낸 것일까요? 바울의 마지막까지 동행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의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된 바울과 함께 복음이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고, 이 복음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사회를 넘어 마침내 이방인에게로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 누가의 결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의 관심은 바울이라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그 뒤로 로마 제국 전체로 번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 사람들의 몫입니다. 누가는 바로 내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지금 우리를 향해 그것은 너희들의 몫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결론


 

 

세상의 어떤 장애물도 복음을 묶어두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능력이나 힘으로도 하나님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만이 마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순종하고 충성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바로 이 기간 중에 쓴 옥중서신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서 잘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모습을 갖추고, 대단한 무기를 들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라고 강요치도 않습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충실하게 지키는 일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바울은 연금된 상태에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효용가치를 살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복음은 여러분의 사람과 함께 증거 되고 드러나고 그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 이제 우리에게 사도행전 30장을 기록할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모두가 30장의 주인공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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