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주차(말1). 하나님의 경고
(본문)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1:2-3)
1. 크나투스
선지자 말라기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지음 받은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자신을 노래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온갖 재주를 부리고 치장을 하고 술수와 기만으로 다른 존재를 누르고 억압하고 지배하는 역사를 쌓고 또 쌓았습니다. 그것은 더럽고 추악하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실패와 왜곡된 역사의 책임을 하나님에게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 하고 삿대질하며 항의하는 악행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성경은 어둠의 역사라고 부릅니다. 이 어둠 속에 갇힌 인간은 빛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 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셨고 자비의 하나님이셨고 긍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이 어둠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도탄에 빠져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죄의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짊어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 값을 치루기에도 부족한 존재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죄 값을 지불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감옥에 들어 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 값을 대신할 보석금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보석금을 지불해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선 누군가 절대적이고 무죄하고 의로우신 분이 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무죄하신 분이십니다. 온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주님은 우주만물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신비한 우주만물을 보십시오.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고, 가늠조차 어려우며, 또한 얼마나 신비롭게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그림입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인간을 통해 당신의 지혜와 능력과 자비와 거룩을 나타내시며 영광을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정교함과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이 지으신 천하 만물을 잘 다스리어 주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보존할 것을 원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뜻과 계획을 깡그리 무시하고 주님을 떠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제발 우리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라며 떼를 썼습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들이 어느 날 ‘엄마 아빠, 이제는 나도 다 컸으니까 내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제발 잔소리 좀 그만 하세요‘ 하는 말을 할 때 부모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합니다. 자기 생각에 옳으면 옳은 것이고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것이고 자기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만족을 합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과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이 있다고 하고 이것을 ‘크나투스’(canatus)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에겐 크나투스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자기를 중심으로 무엇이 유익한지, 불리한지를 판가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대를 이어 계승해 온 역사입니다.
2. 말라기 세상
선지자 말라기가 살았던 시대에도 인간의 타락은 여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제사를 무시하고 그저 형식적인 제사로 일관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들까지 타락하여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나름 연유가 있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패망한 후 남쪽에 남아 있던 반쪽짜리 유다도 바벨론의 끈질긴 침공으로 결국 주전 587년에 멸망합니다. 물론 바벨론은 주전 605년부터 침공하여 유다백성들 일부를 포로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주전 535년에 새로운 왕국인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오매불망 소원하던 조국의 품에 안긴 백성들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와 학사 에스라의 지도하에 허물어진 성전을 다시 짓고 율법을 복원하는 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얼마나 큰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었겠습니까? 백성들은 유다의 진정한 독립과 물질적인 축복을 기원하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약 100년이 흘렀습니다. 어느새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에서 열심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뭔가 삶이 달라지고 나라가 부강해 지고 열국의 침략을 받지 않고 살 것이라 기대했는데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유대인들은 인근의 페르시아와 시리아와 남쪽의 애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지배를 받고 조공을 바치고 살아야 했습니다.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의존하면 물질 축복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렇게 격동하는 세계 속에서 이 작은 성전을 지어놓고 예배드리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신앙의 열기가 식어갔습니다. 특히 두 가지가 문제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구별하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그런데 이 시금석이 무너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기에 국방비 등 여러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갑니다. 이게 상당히 무거운 짐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늘 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살기가 좋을 때는 제사를 기쁨으로 드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점점 제사 드리는 일이 귀찮아 지는 것입니다. 말라기 때가 그렇습니다. 매번 제물을 갖다 바치는 일이 무의미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제사는 드리지 않을 수 없어 드리기는 드리되 형식적으로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물도 온전한 것은 유대지방을 통치하는 총독에게 바치고 하나님에게는 눈먼 제물과 다리 저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죽은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결혼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도나도 결혼 언약을 깨고 이방인들과도 결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면서 세계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전부이고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바벨론에 살면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전 세계에서 너무 작은 부분이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은 너무 큰 나라였습니다. 마치 작은 강에서 놀던 사람이 눈앞에 펼쳐진 끝이 없는 대양을 바라보면서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 나롣 페르시아에 무너지고 또 페르시아는 헬라제국에 무너지고 헬라제국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이 세계의 역사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늠 요동치는 물결입니다. 이런 세계의 급변사태를 목격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예루살렘이라는 좁은 세상 안에 묶여 살 것이 아니라 국제화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국제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하고, 이것은 국제결혼을 통하면 해결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결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금기사항이 한 번 깨어지면 둑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막아둔 둑이 무너지면 일시에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이자 언약사상인 이방인과의 결혼이 다시 횡행하였습니다. 우상숭배와 이방인과의 결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다시 같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제단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궁핍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제단을 나와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제사장들이 본분을 망각하자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갔습니다. 말씀을 듣는 백성이 사라졌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백성들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이면 그저 몸만 성전에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식일 규례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이것이 말라기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상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경고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오늘 본문 1장 1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만행과 일탈과 불순종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사자를 보내십니다. 말라기는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협상을 목적으로 하는 파견대사입니다. 이 사람은 상대와 협상하러 대리인 자격으로 파견되었지만 일일이 협상의 내용을 본국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면서 협상을 해야 합니다. 이른바 ‘위임대사’입니다. 지난 번 DMZ 지뢰폭발사건으로 인해 남북한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협상을 했는데 그들은 새로운 안건이 나올 때마다 서로 최고위층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통보하거나 무언가 중요한 일을 신속하게 현장에서 결정해야 할 때의 대표는 일일이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지 않고 단독적으로 협상하고 결정합니다. 이 사람을 ‘전권대사’라 합니다. 자기 책임 하에 모든 일을 결정한 후 보고만 하면 됩니다. 대개 최고권력자로부터 직접 권한을 위임받은 대사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전군대사가 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전권대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사자’에 해당합니다. 오직 ‘나의 사자’만이 산 자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라 해도 이런 권한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등장하는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파견된 전권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불만에 대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모든 질문에 직접 대답하고 처결을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매우 특별한 사례입니다.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직을 수행할 자격이나 능력을 갖춘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말라기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입니다. 이들을 다시 살리기 위해선 먼저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꾸짖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제사 행위와 백성들의 가증스러운 신앙행위에 대해 지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장 1절에서 ‘경고’라고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경고는 심판의 예비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경고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줄 터이니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다시 회복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반드시 올 터이니 그때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지금이라도 다시 바른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들을 지키며 거룩한 삶을 살라고 당부하는 간절한 애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보다 1세기 정도 이른 시기에 살았던 스가랴 선지자도 유다백성들의 이탈을 경고하면서 속히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백성들은 인격적이고 좋은 충고를 외면합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수긍하고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인본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라는 기형아를 낳았습니다. 이들이 끼친 가장 큰 해악은 잘못된 자녀 양육법을 유산으로 남긴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선한 존재로 봅니다. 좋은 위로의 말이나 충고와 조언, 교육과 약간의 훈련을 통해 인간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자녀를 양육하면서 절대 매를 들지 않습니다. 자녀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녀를 징계하고 매를 들어 가르쳐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자아억제를 상실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한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강제로 제한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징계나 체벌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존재를 고상하게 보고 인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무한 자유를 부르짖는다 하여 이들을 다른 말로 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징계 없는 사랑을 가짜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하시고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을 남발하시지 않습니다. 심판을 느닷없이 단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을 하시기 전에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경고하실 때 빨리 깨닫고 돌아서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좋은 말로 하실 때 좋은 얼굴로 순종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종하는 백성을 너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자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나누어 주십니다. 정말 이런 복 좀 받고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관심도 없습니다. 꾸중하고 경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방민족에게 이런 경고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방 민족을 향해 회개하라고 소리친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양만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만 듣고 다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를 듣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잔소리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이 아니면 잔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간섭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4. 오늘의 우리
말라기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는 오늘의 우리 귓전에도 생생하게 들립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도 한 때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정말 헌신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목사님들을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고 오신다는 주님은 여전히 오시질 않으시고 경제적인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 분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벽이 쳐지어 인간관계도 메말라 있습니다. 오직 스마트폰이 나의 취미요, 나의 벗이요,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짝꿍이요 절친입니다. 점점 사람들은 스마트폰 안의 세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온갖 즐길 거리가 다양하고 풍성합니다. 그러니 스마트폰 밖의 세상은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라도 있으면 즐거울 텐데 그것은 일부 재벌들과 부자들만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속의 풍조는 슬며시 교회 안으로 스며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속에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무미건조한 신앙이 팽배해졌습니다. 그 뜨거웠던 새벽기도회와 금요철야기도회의 열기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낮 예배에 참석하는 데 만족하는 주일신자들로 변모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속으로 ‘하나님, 내가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에요. 이 바쁜 현대사회에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대단하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아시겠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몹쓸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병’입니다. 이 병은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는 있으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병입니다. 주일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고 있으나 진심을 다해 듣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말라기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설교 시간에 목사님보다 스마트폰님에게 예배합니다. 특히 90년대 인터넷문화가 나타난 이후부터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예배당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어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한 교인이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른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를 하는지 알고 싶어 스마트폰을 켜고 듣고 있다고 했답니다. 이런 인터넷 문화가 이제 손 안에 들려진 것입니다. 손에 들렸다는 것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야곱의 처인 라헬이 들고 나온 드라빔을 엉덩이 밑에 감춘 것처럼 우상의 문화가 이제 사람들의 가장 가까이까지 침범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사회는 죄악으로 뒤덮여졌습니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만과 분노의 무기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청년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직장이 없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상 소위 말하는 3D 직종에서는 250만 명의 근로자가 부족한 실정이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느새 고급병에 걸려 험하고 추해 보이는 일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들 뿐 아니라 부모들도 자기 자식이 그런 일을 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에는 외국인 근로자 200만 명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을 배척하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대신에 힘든 일을 하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다만 고급병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영원히 머물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에서 영원히 머물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일시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세상 재미에 미쳐 푹 빠져 있으면 주님이 오시어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 함께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만약 내가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해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 아찔한 순간일 것입니다. 주님 경고대로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즐겨하지 않고 세상일을 즐겨한다면 그것이 바로 간음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리엘 성도 여러분 다시 기도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다시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예배 뿐 아니라 모든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고입니다. 아멘.
[출처] 43주차- 하나님의 경고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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