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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주차(말2).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11. 5. 10:53

본문

44주차(2).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


 

 

본문(1:2~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1.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백성들은 우리를 사랑하셨다구요? 언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를 사랑한다고 하자 자식이 대뜸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냐며 대드는 꼴입니다. 사랑하면 잘 먹고 잘 살도록 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랑이란, 히브리어로 아하브인데 이것을 헬라어 성경에서 아가페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의 의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느냐 하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참조하겠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7:6-8)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10:15)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1“3)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목숨을 거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다 못해 못 배겨하시는 분으로 느껴지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거의 사랑에 미치신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관계없습니다. 한 번 자식은 영원한 자식입니다. 자식이 제아무리 잘못을 해도 부모는 자식을 용서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눈감지 못해도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모른 척하고 눈감고 용서해 버립니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을 품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해도 겉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미고 시리도록 아픈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자식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부부간의 사랑처럼 서로 더 많이 알아가는 사랑입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모든 신앙의 출벌이라고 말했는데 매우 옳은 말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둘이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전에는 혼자 하던 일을 부부는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신부로서 모든 삶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면 돈도 주고 집도 사 주고 땅도 주고 직장도 주고 권력과 명예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형적인 기준이 백성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이었습니다. 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의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은 한 마디로 원망과 불평입니다. 지금까지 속으로 이런 것들을 담고 있었는데 마침 하나님이 먼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니까 이때다 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한 번 쯤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하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하나님께 본격적으로 따져 보자는 태도입니다. 불만이 많은 아내는 늘 남편을 향해 이렇게 따집니다. ‘내가 시집오고 난 이후부터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게 뭐냐? 다이아를 사 주었느냐, 사파이어를 사 주었느냐, 좋은 데를 구경이라도 시켜 주었느냐?’ 하고 몰아 부칩니다. 이런 아내를 둔 남편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다투며 성 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21:19)고 하였고, ‘현숙한 여인의 값이 진주보다 더 귀한 것’(31:10)이라 했습니다. ‘현숙한이란 히브리어로 하일인데 이는 믿음이 강하고 심지가 곧으며 재능이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남자들의 로망입니다. 이렇게 현숙한 여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23)고 했습니다. 그런 여인이야말로 모든 여인 중에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습니다(29).


 

 

사랑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더욱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시는 복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환상적인 콤비가 되어 함께 숨 쉬고 함께 일하고 함께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을 따로 떼어놓고 삽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식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것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맞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 사랑의 수준과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알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은 늘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알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식어져 버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과 사랑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과의 사랑을 하기 위해 신을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고 섬깁니다.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랑을 미워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말씀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진이나 조각품을 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을 기억하고 암송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의 순간에 결코 혼자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기도합니다. 나의결정과 선택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나를 도우십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하시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와가 그랬듯이 눈에 보기에 좋아야 사랑을 느낍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일수록 순간적으로 뜨겁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만큼 위험한 사랑입니다. 어떤 이는 죽어도 좋으니 제대로 뜨겁게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치 독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고 독사를 손으로 집으려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지옥불의 뜨거움을 우습게 하는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사랑은 없습니다.

- 인간이 말하는 모든 사랑은 일시적이고 유한하며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무한하고 전능하고 불변하고 순결하신 사랑이십니다. 이른바 홀로 사랑입니다.

- 다음으로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른바 먼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은 요한14:10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또 사랑은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인을 구하기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시었습니다. - 또 사랑은 화목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시었습니다.

- 또 사랑은 나눔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른바 서로 사랑입니다. 요일 411절을 이어 읽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인간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수백 수천가지 이상 거론하고 나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확실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의무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선택적 조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3.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무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 중 하나는 선택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매우 불공정합니다.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렇게 편애를 하신다고 오해를 할 만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관점이 열리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관점, 즉 인간적인 관점, 이성적인 관점에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는 말씀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사랑하십니다. 이 자녀들은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하심과 택하심을 따라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국한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엔 반드시 반대편의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자녀가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추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내 양이 아니기에 내 음성을 듣지 못한다’(10:16-17)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6:2)

악인은 모태에서 멀어짐이라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58:3)

여호와는 영이 유여할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2: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15: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2-13)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5-6)


 

 

야곱과 에서는 형제였습니다. 그것도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문 2- 3절에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에서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탐욕스러운 인간이고 야곱은 사기꾼입니다. 둘 다 그 자체로는 전혀 사랑을 받을만한 위인들이 못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를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에서를 버리기로 한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를 들어 곡식을 키질할 때 키질하는 목적은 쭉정이를 나려버리고 알곡을 얻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키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의 관심은 알곡을 얼마나 얻었느냐에 있지 쭉정이를 얼마나 버렸느냐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알곡을 가지려 하고 알곡으로 밥을 만들어 먹으려 합니다. 쭉정이를 가지고 밥을 해 먹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겠지요


정리하면,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목적은 아무 조건 없이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알곡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잘 생기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을 받아 아무 조건 없이 단지 사랑하기 위해 입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극히 특별한 경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택할 가치가 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으로 무조건적으로 택하셨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사랑할만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사람은 부족하다고 해서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에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유다와 에돔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4. 에돔과 유다의 차이


 

 

알다시피 야곱의 후손은 유다의 백성이 되었고 에서의 후손은 에돔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했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하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하시고 또 사람들이 그들을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다고 예고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에서의 자손이나 야곱의 자손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에서가 야곱보다는 훌륭한 점이 더 많습니다. 에서는 자기에게 사기를 치고 야번도주한 동생 야곱을 20년 만에 만나 용서를 해 주었습니다. 또 국가적으로도 에돔보다 유다가 먼저 망했지만 에돔이 먼저 회복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포로귀환을 했을 때 에돔은 이미 재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에돔은 세상을 사랑하는 민족이 되었고 유다는 아무리 못나고 어리석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역사상에서 에돔은 유다를 늘 괴롭혔습니다. 에돔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유다백성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뽐내며 유다를 무시하고 미워했습니다. 같은 혈족이면서 에돔은 유다를 미워한 나머지 적국이 쳐들어올 때 유다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적국에게 유다로 진군하는 길을 안내하는 간첩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같은 사람들입니다.


 

 

말라기 당시에 에돔은 다시 힘을 합쳐 사분오열된 유다를 넘어 세력을 떨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에돔의 악행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높이까지 차 오른 것입니다. 에돔을 버리기로 하신 하나님의 작정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에돔은 말라기 이후 역사상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세상적으로 제아무리 부유함을 자랑하고 권세를 누리며 기세가 등등하다 해도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우리는 유다와 에돔의 극명한 차이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나라는 한 번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은 쓰러지는 것 같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바벨론도 사라졌고, 페르시아와 헬라제국과 로마제국도 쓰러졌습니다. 근세사에서 네덜란드와 스페인과 대영제국도 한 때는 강국의 지위를 누렸지만 지금은 무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기업과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고난 가운데 거해도,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처할지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납니다. 성령만 임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힘차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돔과 유다의 차이이고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의 차이입니다.


 

 

5. 유다의 책무


 

 

유다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물론 택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예전의 나쁜 버릇이나 습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개선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으로 믿음의 선물을 받기 전에는 원래 하나님의 원수요 전혀 사랑받을만한 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저울에 달아보고 그 값을 매기자면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값이 매겨질 것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무시무시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수없이 자행합니다. 구원을 받고서도 완전히 성화되지 못하여 온갖 탐욕과 분노와 미움과 시기 질투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실상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죄를 쳐다보면 죄만 보입니다. 인간은 바라보는 것에 집착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수준만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탐욕을 속에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탐욕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분노의 벽을 깨트리고 그곳에서 걸어 나와야 합니다. 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서야 합니다. 탐욕과 분노의 세상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와야 그것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누구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미움의 마음들을 십자가 위로 던져 버리세요. 미움이라는 쓸모없는 그릇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세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마음, 더 큰 소망, 더 큰 사랑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의 백성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크게 가슴을 열고 모든 사랑으로 용서하는 능력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우물 안에 갇혀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좁은 틀 안에 가두고 사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유다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어디에서든지 갇혀 살지 않으시는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 밭이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지고 혀가 달라지고 얼굴 표정이 달라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지금 무한한 우주의 그릇에 담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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