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믿음 중 무엇이 신앙과 목회의 방법인가?
세상법과 상식을 쉽게 무시한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킨 원인들 중 하나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믿음이 상식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상식을 아예 무시한다. 민주주의는 교회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목회하는 독재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목회자가 주관하는 자(고후1:24절)나 주장하는 자(벧전5:3절)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상식과 믿음 사이 관계를 대립적 이분법으로 이해한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나온다. 교회 헌금을 횡령한 목회자는 분명히 세상 법과 상식을 어긴 범죄자이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목회자의 죄란 세상 법이 아닌 교회 법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범죄한 목회자가 자기 사회에서 외교관만 누리는 치외법권적 존재가 된다. 참 어처구니 없다.
교회법으로 분명히 치리해야 하며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세상의 실정법으로 그 죄를 또한 물어야 한다. 목회자는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할 공인(公人)이다. 그가 지은 죄를 더 중하게 벌해야 한다. 이를 피한다면 목회자가 교회를 울타리 삼아 저지르는 범죄는 나날이 커질 것이다. 교회가 죄를 지은 목회자의 도피성이 될 것이다. 사회의 비웃음을 받기 마련이다.
상식과 믿음 사이 관계는 무엇인가? 상식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 각각 속한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이 세상과 나라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달성되기까지 보존되고 유지되도록 돕기 위해 주인인 하나님이 베푸는 보편적 은총이다(시145:9, 마5:45절). 상식은 이 목적에 크게 이바지한다. 이 덕분에 아담의 타락 이후 부패한 인류 사회에도 아주 높은 수준의 덕(德)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은총은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인류의 일부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은총이다. 믿음은 이 목적에 크게 이바지 한다. 결국 상식은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방법이라면 믿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게 하는 방법이다. 과연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가?
동일한 하나님이 이 두 은총의 주인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서로 반대될 수 없다. 이처럼 상식과 믿음도 대립될 수 없다. 이 두 은총들은 서로를 돕는다. 세상 나라의 안정과 질서(일반 은총 영역)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특별 은총 영역)를 세우고 확장시키도록 돕는다(딤전2:2-4절).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 은총 덕분에 인류 사회는 더욱 찬란하게 발전한다. 복음이 들어간 나라와 민족의 사회는 계몽되며 전 분야가 찬란하게 발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은총만을 언급하며 일반 은총 영역을 무시한다면 그 결과는 불행하다. 인류 사회에 무속 신앙과 미신이 만연하며 암흑기가 온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이 이를 잘 증언한다.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상식과 믿음에서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상식을 무시한다면 어떤 기준에 의해 세상의 소금과 빛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세상의 상식으로 본다면 목회자와 신자가 성공한 만큼 그 대가를 받고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것이 용납된다. 그러나 목회자와 신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만 아닌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에도 속한다. 이들은 세상 법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상식이 허락한다고 모두 누릴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법인 믿음에 따라 신자들은 절제와 자제 그리고 자기부정을 해야 한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납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금을 내라고 베드로에게 일렀다(마17:27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 법을 지켰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세상 나라를 멸하는 것이란 오해를 예수님은 피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이 세상에 실현되기 전까지 즉 재림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세상 법과 상식을 존중해야 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왕과의 전투에서 대승했다. 이를 인정한 소돔과 고모라 왕들은 노획물을 다 갖고 사람들만 돌려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사정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욕심을 버리고 사람과 노획물을 모두 다 돌려주었다(창14:22-24절).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유보시키는 자기부정(self-denial)을 보였다. 그는 상식 이상의 윤리를 보였다.
하만 때문에 유대 민족이 전멸 당할 수 있는 위기를 맞았다. 하나님의 은총덕분에 상황이 역전되며 하만, 그 가족들과 친족들이 거꾸로 유대인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 때 왕은 그들을 멸하고 재산도 모두 차지하라고 유대인들에게 윤허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만 멸하고 엄청난 재산에는 전혀 손 대지 않았다(에8:11, 9:16절). 물욕(物慾)에 의한 살육이 아닌 정의로운 행위였음을 이들은 증명해야 했다.
아브라함이나 유대인들은 상식 이상의 수준 높은 윤리를 행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지만 자신을 부정하고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보여야 할 윤리적 삶을 가르쳤다.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목회자들이 목회 성공을 빌미로 이 세상에서 대기업의 CEO처럼 대우 받으며 살려 한다. 이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세상은 종교인들이 남달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상식 이상의 윤리를 보여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당연히 세상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을 보여야 한다. 예수님이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신자들이 이 세상의 것을 모두 누리면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다.
이들은 상식 이하의 처신을 한다. 이 때문에 사회가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신자와 목회자는 영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유보시킬 수 있는 자유를 사도 바울처럼 소유해야 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8-19절)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세상 상식을 쉽게 무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데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잘 설명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열방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도 행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희 중에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무하게 네게 내릴지라”(겔5:5-9절)
물론 한국 사회는 유대인 사회가 아니기에 예언된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 그 대신 한국 교회는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고난 당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사는 사회의 포로처럼 오랜 동안 멸시와 천대를 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를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도 계속 말씀대로 신앙 삶을 살 것인가를 시험할 것이다.
이로써 신실한 신앙인들이 가려진다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리라! 이런 시대의 남은 자들은 앞으로 열릴 새 시대를 위해 말씀의 씨를 뿌리고 뿌려진 씨가 자라도록 물 주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이 일에 나중 반드시 큰 영광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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