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탐심은 죽어야 비로소 사라진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이 비유가 신자들의 신앙 상태를 설명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비유의 목적이 아니다.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질문은 좋은 밭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다.
러시아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의 삶을 이해할 목적으로 텃밭을 사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아내 선교사가 식물 돌보는 일을 워낙 좋아한다. 그녀를 돕기 위해서라도 할 수 없이 텃밭에서 땅을 뒤엎어야 한다. 그러나 유익도 많았다. 농사(農事)를 이해할수록 성경 진리가 더 잘 이해되었다.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좋은 밭에 대한 이해도 생겼다.
농부는 수확물에 따라 밭을 달리하며 씨를 뿌린다. 이 때문에 모든 땅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무는 너무나 기름 진 땅에선 잎사귀만 무성하고 뿌리가 부실하다. 같은 배추라도 따뜻한 곳보다는 좀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종류도 있다. 놀랍게도 포도 나무는 물이 잘 빠지는 낮으막한 언덕 같은 곳에 심어지며 물을 품으려는 흙보다는 배수를 잘 돕는 잔돌들이 많은 곳에서 단 포도를 맺는다. 이렇게 농부는 수확물의 종류에 따라 밭을 선택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농부로 곧잘 비유된다(사27:3, 렘2:21, 요15:1절). 하나님도 자신이 원하는 씨의 종류에 따라 흙의 성격을 보고 밭을 선택한다. 광활하게 널려있는 대지(大地)가 모두 밭이 될 수 없다. 농사(農事)에 관련된 사실이 곧바로 신학적인 의미를 설명하도록 성경에서 차용된다. 이렇게 자연 계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농부가 밭을 골랐다고 밭에서 수확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농부의 수고가 따라야 한다. 우선 밭을 개간하여야 한다(사5:2, 눅13:8절). 밭의 돌들과 잡초를 제거한다. 이런 과정에서 단단한 흙을 부셔야 한다. 뿌려진 씨앗은 단단한 흙에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흙 밑에 공기와 수분이 충분히 잘 통하도록 흙을 엎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농부는 흙 밑에 숨어있는 잡초의 뿌리들도 뽑아낸다. 이렇게 쟁기질과 삽질은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한다.
농부의 손이 가지 않으면 자연 상태의 밭은 절대로 옥토(沃土)로 변할 수 없다. 처음 쟁기질 하는 밭의 흙은 너무나 단단하고 그 동안 자란 잡초들이 땅 속 깊이 자라잡고 있다. 흙을 완전히 뒤집어 놓지 않으면 길가 밭처럼 못쓸 땅으로 영원히 남는다. 농부가 매년 쟁기질이나 삽질을 해야만 밭은 옥토로 계속 남아 씨앗을 품고 잘 자라게 한다. 가을 수확이 끝나면 농부는 곧바로 땅을 뒤엎는다. 땅이 숨을 쉬고 물을 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다음 해 봄 농사까지 흙은 부드러워진다.
비유에서 말하듯이 말씀의 씨앗은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다. 그렇다면 농부인 하나님의 돌봄이 없이 사람 마음에 복음의 말씀인 씨앗은 절대로 심어질 수 없다. 이 이전 하나님은 마음 밭에 쟁기질을 해야 한다. 교만이라는 돌과 욕심인 잡초를 마음 밭에서 먼저 제거해야 한다(호10:12절).
이 때문에 갑자기 뜻하지 않은 고난이나 불행이 그에게 닥친다. 이에 대해 이사야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사28:24-25절)
이미 앞에서 유다 왕국을 멸망시킬 하나님의 심판(22절)이 예언되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의 멸망만 목적하지 않는다. 새롭게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목적을 감춘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전략이다. 유다를 멸망시키는 심판은 참으로 혹독할 것이다. 이 심판을 통해서만 선민의 완악한 마음은 부드럽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시대의 남은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감추고 있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 후손도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다. 그 마음에 돌들과 잡초들이 무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가 심어질 수 없다. 인류는 출생 순간부터 전혀 밭갈이가 없었던 길가 밭과 같다. 자연 상태에서 옥토가 없듯이 보편적인 인류 가운데 스스로 구원을 받을 만큼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는 뚯이다.
매년 봄 밭의 흙을 갈아 엎을 때마다 목격되는 사실이 있다. 잡초의 뿌리가 땅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농부는 쟁기질을 깊이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제거되지 않는다(창3:17-19절). 경험상 잡초를 모두 제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농부는 잘 안다. 잡초가 나타날 때마다 뽑을 수 밖에 없다.
잡초의 뿌리처럼 탐심의 뿌리도 인간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뿌리는 수양(修養)이나 윤리적 삶 또는 개종(改宗)과 그 후에 따를 성화(聖化) 노력만으로도 모두 제거되지 않는다. 성화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탐심의 뿌리는 언제든지 그 머리를 내밀려 한다. 목회 성공 후 많은 목회자들이 타락하는 이유가 여기 설명된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스승을 따라야 한다(마16:24절). 자기부정은 신앙 삶에서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사실이 또 있다. 하늘에서 비가 한번 내리면 그 다음 날 잡초가 또 다시 나타난다. 농부가 밭에서 끊임없이 일하는 이유이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신앙 삶에 진력(盡力)할 때 탐심과 교만이 거의 사라진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앙 삶에서 열매가 찬란하게 나타날 때 또 다시 탐심과 교만이 그 머리를 내민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주님의 이름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다. 역설적으로 신앙 삶이 성공적일수록 실패의 가능성도 그 만큼 더 커진다. 목회 성공자들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과 목회에서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그 좋은 예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은 그를 사단이라 부르며 호되게 책망했다. 그의 놀라운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일보다 인간의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마16:16-23절).
혹자는 신앙심이 뜨거울수록 교회와 신자들은 이웃에게 더 위험한 존재로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세 유럽 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을 행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이천만 명 정도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지(聖地)를 회복시키겠다는 미명 아래 유럽 교회는 수많은 무슬림들을 살상했다.
그러므로 성화 삶에서 자기부정은 아주 중요하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 영화(榮華)에 달하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이 십자가를 내려 놓으면 안 된다. 탐심과 교만의 뿌리는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안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메라고 권면한다(마11:29절). 일할 때 멍에가 더더욱 필요하다. 멍에는 자행자지(自行自止)하려는 잘못된 의지를 제어해 주면서 동시에 멍에를 멘 자의 몸을 보호해 준다. 신자나 목회자가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할 때도 마찬 가지이다. 주님의 멍에는 말씀대로 행하도록 잘못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제어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잘못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보호한다. 목회에 성공할수록 더더욱 주님의 멍에는 필요하다. 이를 싫어한다면 남은 구원하되 자신을 파멸시키는 불행과 비극을 당할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자기부정이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임을 증언한다. 구원 이후에도 마음 속이 감추어진 탐심의 뿌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파멸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며 스스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끝까지 순례자의 삶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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