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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본교회 마가복음 강해 3(막2장13절-3장19절)

조창훈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6. 2. 2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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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본교회 마가복음 강해 3(213-319)

           

           제목: 죄인을 부르사 목자 없는 양들의 세 목자로 세우신 예수님

 

1.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3-17)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큰 무리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 또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당시 매국노이며 악한 자로 평가받는 직업을 가지신 레위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말한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왜 이런 말을 하였는가? 유대인들은 제사드리는 백성이다. 제사 드리는 자가 더러운 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함께 먹다가 접촉이 일어나면 같이 더러운 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시다. 죄인들을 용서하러 오신 분에게는 죄인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칭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들의 구속주요, 속죄주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칭 의인들에게는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이며, 지금 자기를 죄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구속주이심을 말씀하신다.

 

2.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218-36)

 안식일에 예수님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때 제자들이 길을 열면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항의한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율법에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규정은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임의로 만든 규정이었다. 이것을 조상의 유전이라 하며 이것은 지키지 않아도 율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어길 경우 불법적으로 처벌하였다.

 만약 안식일에 이삭을 계속해서 잘라먹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된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들까지 엄격히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법에 있어서 원칙과 예외를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있어서 예외 사항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의 왕이었던 다윗과 또한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먹었다. 이것은 범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범죄로 처벌하지 않으셨다. 이 상황은 예외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메시야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피난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피난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먹었어도 정죄받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능히 안식일에 관련된 조상들이 유전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또한 안식일의 창시자가 인자이심을 말씀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은 그 회당에서 구걸을 하였을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도움을 베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를 고발하려 하였다. 그들에게는 오직 주님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험을 무릅쓰신다.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또한 주님은 저들에게 물으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 성경의 모든 규정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사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시하신 것이다. 율법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을 내밀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그 손이 회복되었다. 회복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원래는 정상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습을 보고, 교회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3. 목자 없는 양 같은 자들을 위해 새 목자들을 세우신 예수님(37-19)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랑이 없고, 양떼들을 이용하기만 하고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종교생활을 하였다. 교회가 아니라, 가게이며, 사업을 하였다. 이에 수많은 양들은 목자가 있으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다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제사장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양을 돌보지 않고 양들을 통하여 자기들의 배만을 채운 게으르고 악한 목자들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신다. 산에 오르셔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여기서 보면 주님이 부르신 자들만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주님이 부르시지 않은 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외적인 부르심(외적 소명)과 내적인 부르심(내적 소명)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는 결코 안된다. 주님은 열두명을 새 지도자로 세우셨다. 그들을 세우신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런데 이 새 지도자들 중에 예수님이 친히 부르신 자들 중에도 역시 교회의 배신자요, 악한 자가 있었다.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지도자들로 부르심 받은 자들 안에도 가라지, 이리와 같은 자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실족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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