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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에 아이를 낳은 아브라함, 그렇다면 노아는?

손재익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6. 4. 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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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에 아이를 낳은 아브라함, 그렇다면 노아는?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오해 - 100세에 아이를 낳은 아브라함에게만 관심을

 

창세기 21:5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100세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내용이 성경 어디에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경우는 많지 않아도,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는 사실은 잘 압니다. 강단에서 자주 설교되는 내용이고, 교회학교를 통해서 많이 들어오던 내용입니다. 100세라는 노령에 자녀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데”(18:11) “어떻게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가?” 라는 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5:32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 지 아십니까? 창세기 5:32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노아는 500세가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자세히 보면 노아는 500세가 된 이후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100세의 5배입니다.

 

이 본문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족보의 끄뜨머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이 본문을 잘 읽지 않습니다. 이러한 본문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100세에 자녀를 낳은 아브라함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500세가 된 이후에 자녀를 낳은 노아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듣지 못합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노아를 비교할 때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더 놀라울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175(25:7)를 살다가 죽었는데 100세에 낳았고, 노아는 950세를 살다가 죽었는데(9:29) 500세에 낳았으니 비율을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이 더 늦은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도 만만치 않게 늦은 나이에 자녀를 처음으로 낳았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이렇게 늦은 나이에 자녀를 낳게 된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사람들과 다르게 소개되는 노아

 

노아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6:9에서부터 시작됩니다만, 노아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 5장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노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소개됩니다. 크게 3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은 “A가 몇 세에 B를 낳고, B를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유형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경우 노아가 몇 세에 자녀를 낳았다는 말만 있고,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와야 할 자녀를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고, 그가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창세기 5장이 족보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창세기 6:9을 보시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라고 해서 6장에서도 노아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창세기 9:28-29에 가서야 “(28)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살았고 (29)그의 나이가 950세가 되어 죽었더라라고 해서 5장에서 반복되는 그 유형을 마무리 하면서 족보를 마치고 있으니, 창세기 5:32만 보면 동일한 유형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동일한 유형인데, 그 유형 속에 6장부터 9장까지의 긴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5:32과 창세기 9:28-29 사이에 어떤 내용이 추가된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노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500세라는 고령이 된 이후에 비로소 아이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늦게 자녀를 낳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고(5:3),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5:6),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9),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12),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15),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18),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21),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25),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28). 이들은 아무리 늦어도 187세에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에 비하면 굉장히 늦은 나이이긴 하지만 당시의 수명이 900세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닙니다. 그런데 노아는 무려 500세가 돼서야 자녀를 낳았습니다. 500세라는 나이는 당시에도 매우 늦은 나이입니다.

 

셋째,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은 1명의 자녀만 소개되는 반면 노아는 3명의 자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도 1명이 아닌 여러 아이를 낳았습니다.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더라라는 패턴이 반복되므로 모두 다 1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1명의 자녀만 소개하는데, 오직 노아에 대해서는 3명의 아들이 언급됩니다.

 

500세 이후에 자녀를 낳은 노아

 

위의 3가지 중요한 특징 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노아가 500세라는 고령에 비로소 자녀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특징 중에서도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 전체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몇 세에 누구를 낳았고라고만 되어 있는데, 노아에 대해서는 “.... 500세가 된 후에 ......”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이 말 속에는 독특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이 말에는 노아는 50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자녀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노아는 500세까지는 자녀가 없었더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500세가 된 후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창세기 5:32노아는 50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자녀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늦은 출산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해 볼 내용

 

그러면 이제 노아가 500세라는 매우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출산을 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아 당시에 오랜 기간 동안 출산이 없었던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해석은 이 문제를 단순히 불임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지 못하던 사람으로 하여금 자녀를 주셨다라는 수준의 기복신앙적 관점에서는 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노아처럼 살면 자녀를 못 낳는다라거나, “노아처럼 살면 늦게라도 자녀를 낳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합니까? 창세기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초반부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무너져 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세기 4:25에서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씨, 다른 여자의 후손을 보내셨으니 바로 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은 셋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창세기 5장의 족보를 기록케 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4:25에서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주신 하나님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에노스를 주셨고, 또한 창세기 5장에서는 셋, 에노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게난’(9), ‘마할랄렐’(12), ‘야렛’(15), ‘에녹’(18), ‘므두셀라’(21), ‘라멕’(25), ‘노아’(29)까지 이어짐으로서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지지 않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창세기 5장의 마지막에 언급된 노아에게 499세가 될 때까지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499세 즈음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과연 나의 시대에 이제 그 약속이 다시 멈춰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벨에서 중단되었다가 다시 셋을 통해 회복된 약속이 이제는 나의 시대에 멈춘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근심을 품었을 법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노아 뿐만 아닙니다. 노아의 아버지도 가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나이 499세일 때에 그의 아버지 라멕도 살아있었습니다.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았고(28)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지낸 뒤 777세에 죽었으니, 라멕은 노아의 나이 595세까지 살았기 때문입니다(홍수가 일어나기 5년 전까지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 역시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라멕에게는 노아 외에 다른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5:30에 보면 라멕은 노아를 낳은 뒤에도 595년을 지내면서 자녀들을 더 낳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멕에게 있어서 노아는 남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5:29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라멕은 노아를 낳으면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노아라고 붙였으니 그 뜻은 개역개정판 난외주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안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노아를 통해서 무언가 셋의 후손들을 안위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라멕의 뜻과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계보가 노아를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데 499년이 되어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노아는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라멕도 낙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노아가 이렇게 되는 중에 오히려 뱀의 후손인 가인의 후손은 번성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후손이 이어지고 있고, 악기와 기구를 만들고 시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4:16-24). 노아는 불임인데 오히려 그들은 번성합니다. 그들이 불임이어야 하는데 노아가 불임이요, 그들이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노아가 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그렇게 가인의 후손들이 번성해져 갈 때에 몇몇 셋의 계열 중에는 일탈을 벌이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바로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과 결혼을 해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6:2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셋의 후손을 말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셋의 후손들이, 여자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을 해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가인의 후손들의 외적인 화려함 때문에 그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그들은 노아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노아만큼은 죄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를 의인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표현은 창세기 5:24에 나오는 하나님이 하늘로 데려가신 에녹과 동일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한 게 아니라 노아도 그러했고 노아에 대해서는 에녹보다 더 칭찬을 합니다. “.....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하늘로 데려가시지는 못할망정 어려움은 주시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노아에게 슬픔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노아는 부흥하지 않고 번성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만 오히려 번성하고 있습니다. ‘안위함이라는 이름의 노아에게는 아무런 안위가 없고 오히려 가인의 후손만이 부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노아는 가인의 후손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시대(6:5)를 살아가면서도 오히려 죄와 외로이 싸웠습니다. 가인의 후손의 번성과 셋의 후손들의 일탈을 보면서 죄와 싸우는 고군분투를 치루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던 셋의 후손들이 점점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외로이 싸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노아는 정작 단 한 명의 아이도 없는 가운데 고통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문명의 발전을 이루게 해 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소망을 줄만한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의 교회를 부흥케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안위함인데,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안위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던 하나님은, 정작 단 한 명의 아이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는 자들이 부흥하였습니다.

 

늦은 출산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신 것 & 노아에게 요구된 것

 

지금까지 말씀드린 관점에서 본문 창세기 5:32을 봅시다. 노아는 500세가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499세까지도 소망이 없던 노아에게 한 줄기 서광(瑞光)이 비칩니다. , , 야벳 한 명씩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499세까지 한 명도 없던 노아에게 500세 이후부터 3명의 아들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노아는 500세가 된 후에야 비로소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아니 왜 하나님은 이렇게 늦게 비로소 자녀를 주셨습니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무엇이며, 노아에게 요구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더디 이루시는 가운데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가운데에도 경건을 지키는 셋의 후손들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냄에 있어서 너무나 적합하게도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니, 참으로 인내하는 성도였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창세기 5:24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설명하는 반면, 창세기 6:9-10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니 결국 그를 통해서도 여자의 후손이 오도록 하셨고 그래서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설명합니다.

 

노아는 499년을 보내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당대에 완전한 자라 인정을 받을 만큼 인내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떠나는 가운데에서 그는 단 한 명의 자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그 옛날 아담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만을 기억하며 인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노아로 하여금 500년 동안 인내하게 하셨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주시지 않고 인내케 하셨습니다. 그저 노아라는 이름 속에 희망을 담아 주셨을 뿐입니다.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창세기 6:5에 나와 있는 대로 당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지만, 노아는 그 죄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약속이 절대로 취소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아에게 요구된 것은 바로 인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인내 가운데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노아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한 경건한 의인의 삶. 이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 갔습니다. 본문인 창세기 5:32의 짧은 구절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지금 제가 구체적으로 설명드린 것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도의 인내 중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우리가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될 구절입니다.

 

 

 

http://www.ctime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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