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0:19-25, ‘더욱 그리하자’ | |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 |
1. 우리는 지난주에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패러다임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위키 백과)’이다. 토마스 쿤이라는 사람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패턴, 예시, 표본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paragma)를 이용해서 만든 말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지동설이 맞아도 '천동설이 맞다'는 패러다임을 가진 시대에는 천체의 현상을 천동설을 중심으로 설명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난주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믿음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이나 삶의 정황을 믿음을 바탕으로 설명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주의 이야기를 다시 되새김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를 때는 죄의 영향 안에 있었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삶은 ‘죄’라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고 산다는 것이고,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믿음’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적인 모습을‘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아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삶의 방식과 그리스도인다움을 드러내는 원리로서 믿음이라는 패러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2. 유대인들은 성경(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셋으로 나눈다. 하나는 모세가 쓴 오경으로 유대인들의 모든 삶의 근간이 된다. 두 번째는 예언서인데 유대인들의 예언서에는 우리가 ‘역사서’라고 부르는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를 ‘전기 예언서’라는 이름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예언서라고 부르는 것들을 유대인들은 후기 예언서라고 한다. 그리고 성문서라는 책이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하나님의 예언으로 읽는 이유는 그들에게 ‘예언’이라는 것이 앞의 일을 미리 알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 그 일하심을 삶에서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이해 때문이다. 따라서 예언자를 의미하는 말 가운데는 ‘선견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보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자들이 예언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들이 예언자가 된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그들은 바벨론이나 앗수르의 침략을 이스라엘의 타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로 보고, ‘정의를 하수같이 공의 물같이’흐르게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기도 한다. 이렇게 예언자들이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원리는 역사적인 지혜나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당한 자들이었다.
3. 우리는 히브리서의 시대적 배경을 로마의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는 60년대 정도라고 생각한다. 박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많은 기독교인들, 특별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왔던 사람들은 유대교로 돌아갔을 때의 안전과 풍요를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버리려는 시대에 히브리서를 썼다고 말한다. 그래서 특별히 히브리서는 믿음의 패러다임으로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다. 오늘 말씀도 역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히브리서10:19)’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으로 열렸다는 말이다. 점차적으로 다가오는 박해의 위기 속에서도 이 믿음의 패러다임으로 우리는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마치 과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들의 역사 속에서 보앗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면서 공동체 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변화는 삶의 빡빡함으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위험한 예배를 위해 모험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적어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선행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너무 상식적인 결과 아닌가? 그래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10:24-25)’고 말한다.
4.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간다. 그리고 역사를 만든다. 그래서 믿음의 패러다임을 가진 자들의 삶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 그리고 살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고, 서로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며 살라는 것이다. 특별히 어려움이 많은 이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의 패러다임을 가진 자답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패러다임으로 우리의 삶을 감당하는가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현장 속에서 더욱이 세상이 악해질수록 과거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처럼 혹은 히브리서의 저자처럼 믿음의 패러다임을 갖고‘더욱 그리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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