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simul) 죄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이다.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서만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서 주어진 선물인 믿음으로서 얻게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은 은혜로 인하여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죄인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영화로움에 이르지 못하여서 날마다 죄악과 어두움과 싸우는 여전히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곤고한 자로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라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서 고백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관점에서 죄인인가?
우리는 실존적 관점에서 죄인이다.
우리의 실존적 상태는 죄인이다.
죄악에 헤매이며 진리를 벗어나서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목을 뻣뻣하게 하고 의인이라고 할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주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의 자랑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아직 죄인들이다.
법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나 우리의 실존 전체가 영화롭게 되어서 지금 영원한 안식 가운데 있는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회심 체험을 하였고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이제 의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살아가는 자들을 죄인이라고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면서 “땅의 사람들”이라고 폄하하며 그들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학대한다면 그의 신앙은 거짓되다.
주후 1세기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상적부터 받은 율법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당대에 이방인들을 “땅의 사람들이라고 천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율법을 범하였고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가르쳐야 할 자들이 율법이 지향하는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어두움이다.
그들은 얄팍하게 율법의 외적 문구를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피상적으로 율법의 자구를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줄 생각하는자들을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그렇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주의였다.
피상적인 종교적 열광주의자들..
바리새인들..
그 당대 유대교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기 전까지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바리새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정죄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자신의 의로움으로 이웃을 정죄할 수 있을 정도로 의로운자들은 아무도 없다.
무지한 자들이 자신의 죄악을 모르기에 그렇게 의로운 것이다.
그것은 거짓되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이웃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판관이 되어서 이웃을 심판하고 있다.
그가 속한 출신지가 어디라는 이유로 그의 인격을 매도하기도하고
그의 학연과 지연과 여러 사회적 관계망이 허접하다고 하여서 그의 인격을 살해한다.
이렇게 이웃을 스스로 심판관이 되어서 심판하고 단죄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본다.
우리는 성별과 나이와 출신지로 인하여서 이웃을 차별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채워주는 자와 그렇지 않는자로 이웃을 갈라서 심판할 수 없다.
대부분의 많은 자들은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기준으로 삼아서 자기편과 다른 편을 갈라버린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심판하는 자이다.
오직 재판장은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어느 누구도 이웃의 재판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웃을 성별과 나이와 세력과 출신 지역을 따라서 판정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매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전히 멀리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되어서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는 원래 의인이었던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모두 죄인이다.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해야 한다.
더욱 이웃을 향하여서 성별과 나이와 세력과 출신지를 따라서 심판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한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많이 필요하다.
오직 사랑으로 이웃을 대할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이 많이 필요하다.
결코 우리는 이웃을 정죄할 수 없다.
우리도 동일한 죄인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완성에 이르지 못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된 죄인들이다.
이 죄인의 멍에는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리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 위에 십자가 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 만이 우리의 자랑이고 기쁨이고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이웃을 향하여서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겸손이 필수적이다.
모든 것이 그의 은혜 안에서 지나가는 과정일 뿐인데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리요?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크신 은총을 알진대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리요?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날마다 이웃을 미워하고 싶어지는 부패성으로부터 날마다 우리를 건져 주시는 주 곧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지라..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WlQ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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