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6장 9-10절
[ 본 문 ]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 본문 해설 ]
9절 본문의 전반적인 구조는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라 하신다.
“너희가 듣기는 계속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계속 보아도 알지 못할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 백성들에게 할 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신다.
히브리어 본문은 동사 다음에 부정사를 연결하여서 “계속 듣는다”라는 뜻으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 보다”도 마찬가지이다.
동사 다음에 부정사를 연결하여서 앞의 “계속 듣는다”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듣고 보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지라도 그 말씀을 깨달아 아는 자는 극히 소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선지자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이사야의 예언을 이해하였던 자들은 극히 소수였다.
어느 시대에서든지 진리는 다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그 진리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명할 수 없는 처지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그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와 능력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놀라운 기사를 보아도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각한 죄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증거이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사 9:10)
히브리어 성경은 “마음”과 “눈””과 “귀”를 평행를 이룬다.
이것은 중요하다.
사람의 마음은 곧 그 사람의 귀와 눈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사람의 귀와 눈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직결된다.
사람이 사물을 보지 못하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에 대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각 기관을 통하여서 보고 듣기 때문에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어두우면 비록 감각 기관이 살아 있다고 해도 결코 듣고 보고 깨달아 알아서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그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들의 마음과 눈과 귀가 둔하고 감기고 막히게 되리라 말씀하신다.
이 형태는 히브리어 동사 “히필 형태”로 되어있다. “히필 형태”는 사역 동사이다.
하나님께서 주체자가 되셔서 그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아니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어두운 마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어두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심각한 죄악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면서 그 백성의 어두운 상태를 증거하였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마음을 닫았다.
이 본문 전체는 반어법과 역설법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런 반어법과 역설법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어두움에 대하여 그들로 그렇게 되도록 작정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본문을 수사적으로 볼 때 반어법과 역설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관점에서 볼 때 반어법과 역설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그렇게 타락하시는 것을 작정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죄악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인간의 모든 자유의지와 그 인간의 모든 활동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고 세운다.
우리들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작정 아래 놓여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작정과 충돌하지 아니한다.
우리들의 자유 의지 조차도 신적 작정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되어질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적 작정 가운데 그 범죄한 자의 죄책까지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인류는 자신들의 범죄에 대하여서 하나님께 핑계치 못한다.
만물이 하나님의 신적 작정 안에 놓여있지만 도덕적 피조물의 모든 행위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까지 그들에게 있도록 작정되었다.
그 만큼 인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따라 피조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타락까지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적 작정 아래 있지만 그 인류가 타락한 책임까지 인간 편으로 작정되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타락을 변명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그의 신적 작정 안에서 이사야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의 타락과 배도를 작정하셨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신적 작정 안에는 그들의 타락과 배도와 함께 그들이 짊어지게 될 죄책도 작정하셨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타락에 대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대화하시는 방식은 이러하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해도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런 바램은 효력이 없다. 그것은 인류 안에 드리워진 원죄의 크나큰 뿌리로 인하여서 그들이 스스로는 돌이키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통하여서 모든 인류의 죄악을 폭로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의 대표적 행위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 부패성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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