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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한 성경적 이해

박동근목사(안양)

by 김경호 진실 2017. 1. 2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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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칼빈을 중심으로 살핀 5 번째 계명 - “권위”에 대한 성경적 이해]

2017년 1월 8일 한길교회(안양) 주일 오후 예배

104 문. 제 5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훈계하고 징계할 때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들의 결점까지도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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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 계명으로부터 둘째 돌판의 계명이 이어집니다. 둘째 돌 판은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 계명의 직접적인 대상은 이웃이지만, 궁극적으로 이 계명들은 인간 사랑을 통해 하나님 사랑에 이르는 계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째 돌 판에 핵심을 이렇게 요약해 주신 바 있습니다.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둘째 돌 판의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한 것이요, 둘째 돌 판의 실천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은 단지 순서적으로 둘째 돌 판의 첫 부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이 계명은 둘째 돌 판에 속한 다른 계명들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둘 째 돌 판의 다른 계명들을 순종하게 만드는 띠가 됩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의 순종 없이 다른 인간관계에 속한 계명들의 순종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계명의 의미

이 계명은 상급자들과 하급자들, 곧 공동체에 주신 지위의 질서에 대한 덕성을 상하 관계에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의 덕성을 통해 확립하시려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질서와 지위에 대한 덕성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보살피시는 경륜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경륜이 유지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그가 정하신 상하 등급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르시누스는 이러한 질서와 지위가 시민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상급자들과 하급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급자들은 보통 한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다스리고 보호하는 일을 위해 세워진 공적인 질서 안에 있는 공적 지위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가장 핵심적인 단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겠지요. 다르다면, 다른 관계에서 상하 관계는 공적인 면에서 언급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철
천륜적인 면이 강하겠지요.

그렇다면 하급자란 상급자에 상대적 대상으로 공적 통치를 받고 보호를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부모와 상급자들에 대한 공경을 말할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균형된 생각을 함께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균형을 잃으면 오늘 주어진 계명을 잘못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나 우르시누스가 이 계명을 논할 때 이런 균형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합법적 복종”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르시누스는 “정당한 한계”란 말을 사용하므로 상급자의 통치권을 제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을 함축한 것입니까? 상급자로 표현된 다스리고 보호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은 사람들은 칼빈에 따르면, 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들의 복지를 증진토록 세운 상급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탁하는 식으로 나눠 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다는 말이 맞습니다. 성경은 시민 사회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이런 질서를 세우신 분이며 다스리며 보호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존경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그런데 이러한 상급자로 규정된 사람들의 권위는 자신들의 존재 내에 있는 지위나 권위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과 공동체와 타인들을 위한 선한 목적으로 위탁된 권위요 직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급자로 불리는 자들의 권위는 존재적 권위가 아니라 기능적 권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람에게 주어진 권위는 두 가지 기준에 의해 인정되고 순종되고 존경받습니다. 그 두 가지 기준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지위에 원래 주어진 본연의 목적과 기능을 수행할 때, 그리고 그 지위가 하나님의 율법과 공동체에 주어진 법에 제한을 받을 때 인정되고 순종되고 존경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위탁된 것이지 상급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사적 소유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제한 받지 않는 무한 권력과 주권을 가지시지만, 사람위 지위와 권위는 하나님 아래 하나님의 법과 사회의 법 아래 제한되고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법적 통치라는 말이 중요하고, 정당한 한계란 말이 중요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장로들, 곧 목사들과 장로들처럼 교회에서 가르치며 다스리며 성도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는 직분들을 존경하고 순복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이 다스림과 지도함이 합법적이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 아래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일을 할 때만이 이런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종교개혁과 장로교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권위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 존재했습니다. 교황이란 교권에 대하여 그리고 세속 왕들과 관료들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 운동이 교회사에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함축된 상급자와 하급자란 질서 안에 하나님의 뜻을 살필 때 위에서 언급한 의미와 균형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즉, 합법적으로 선 지위나 권위와 합법적으로 수행되는 일들을 그러한 통치와 보호를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순복하고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위와 권위는 그의 것이 아니며, 지도자들 자신의 권위와 지위가 하나님의 법아래 존재하며 백성들 혹은 성도들의 질서와 복리를 위해 위탁된 것이기에 합법적으로 이 권위를 사용하지 않으면 결코 그 지위와 권위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자들에게 권력 남용이나 직무유기는 가장 본질적인 부덕에 속하고 그 지위와 권위가 정상적으로 운용될 수 없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그러므로 위의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이면서도, 그 명령하심에 어떤 제한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권위와 지위는 “하나님의 법아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때”라는 제한이 붙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직위들의 통치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權限)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권력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것입니다. 권한이란 사람이나 기관이 보유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리나 권력의 범위를 의미합니다. 즉, 여기서 통치나 직위 기능 수행의 범위가 제한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어떤 수행권을 의미합니다. 그 범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법인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권위도 지위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대한 명령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엡 6:1). 이 점은 이미 설정된 원칙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부모가 앉아 있는 높은 자리는 주께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는 주의 영예의 일부를 나눠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율법을 어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부모가 아니고 우리를 참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못하게 하는 외인이라고 인정할 충분할 권리가 있다. 군왕들과 귀족들과 그 밖의 각종 장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들이 윗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위세로 하나님의 숭엄성을 끌어내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장상인 것은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땅히 우리를 높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이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되, 상급자와 하급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며 양 관계가 어떤 관련성 안에서 언급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이 계명은 권위 아래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의 의무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르시누스가 상급자라고 언급한 대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대상들은 부모라는 가정적 개념이 지위와 권위라는 사회적 개념으로 확장하는 식으로 언급됩니다.

먼저, 여기서 상급자로 불리 우는 사람들은 부모, 공공 교육을 담당한 학교 교사, 교회의 목사(복음의 사역자), 장로들, 국가의 높고 낮은 통치자들 등을 의미합니다. 부모에 대한 덕목은 다스리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모든 권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을 포괄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부모의 역할과 의무와 비슷한 목적으로 세우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가 교회와 사회의 권위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a. 아버지의 권세와 통제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 이것이 다른 모든 통치 형태들이 이 부모의 통치 형태에 따라서 형성되고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c. 이 형태의 통치가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요 사람들이 기꺼이 그것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d. 부모를 멸시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가장 악독한 죄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장 극심하게 정죄하시고 벌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명령이야말로 특별한 힘을 지닙니다.

이와 같은 지위와 권위는 하나님께서 질서를 유지하고 그들 아래 두신 자들을 복되게 하고자 세우신 사람들로서 그들이 법과 본연의 목적과 기능 안에서 권위와 역할을 집행할 때 순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권위에 대한 순복을 강조할 때 더욱 강조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위탁된 권위는 권위주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권위자가 가진 권위가 권위주의가 아니라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을 향한 의무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위탁된 권위는 공동체와 공동체의 일원들의 질서와 복리와 안전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경받는 권위는 의무를 다하는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르시누스는 권위자들의 의무와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의 의무를 동등하게 제시합니다. 이 계명을 온전히 순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양자들의 의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왜 부모에게 권위를 부여했습니까?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양육, 훈육, 상해로부터 보호, 교육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교육을 위탁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징계로서 자녀들을 훈육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경을 강요할 수 없는 부모의 입장은 자신들은 사치하며 자녀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방치하고 그들의 안전을 등한히 하여 상해에 노출되게 하는 부모입니다. 그리고 교육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들에게 악한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징계로서 부덕을 교정하지 않는 부모입니다. 부모를 공경의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은 부모에게 이러한 의무가 주어졌고, 이러한 의무가 수행될 때 자녀들은 양육과 안전과 훈육을 받게 되며, 이들은 이와 같은 부모의 역할과 노고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권위는 자녀들 돌보고 보호하고 바르게 훈육하는 권위로서 자녀들의 복리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의무를 다하고 자녀들은 순종하며 감사하며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으며 존경을 구하거나 이런 은택을 입고도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자녀들이 가정을 이룬다면, 그곳에서 이 5계명이 범해지는 것입니다.

통치자들은 어떻게 습니까?

이들은 자신의 권위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합법적인 복종을 요구하며, 다스리므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의 내용은 법이 규정한 대로여야 하며, 공적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의 안전과 복리를 위해서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정법을 따라 선을 장려하고 악을 벌하므로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권위는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주어진 권위입니다. 따라서 권위를 남용하는 일과, 직무를 유기하여 공동체에 해를 입히고, 안전을 위협받게 하고, 그들의 복리를 저해하는 행위를 할 경우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공공의 질서와 안전과 복리를 위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가진 권위를 가지고 억울한 자들과 옳은 일을 행한 사람에게 벌을 가하거나 악한 자를 보호하고 처벌하지 않는 행위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진 권위는 무소불위의 권력, 혹은 사람 자체에게 주어진 본성적 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 법 아래서 운영되도록 한 위탁된 권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권위는 제한받는 권위로 “권한”이란 용어를 쓰는게 맞습니다. 부모의 권력, 교사의 권력, 통치자의 권력, 목사와 장로들의 권력이 아니라, 부모의 권한, 통치자의 권한, 목사와 장로의 권한이란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특별한 목적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과 합법적 규칙들에 의해 제한되어 운용되는 권위로서 권한을 가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공동체가 공적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역사적 고백에 어긋나지 않은 설교와 가르침과 훈육을 할 권한을 가졌지만, 그것에 어긋날 때 그것은 순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치리자로서 성도들을 돌보고 다스리는 직분을 가졌지만,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고 공적이고 역사적인 교리에 어긋나고 교회의 법도와 덕에 어긋난 것에 대해 순복을 요구할 때 그 권위는 정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권위는 권한으로 하나님께 위탁된 것임을 염두에 두고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러한 합법적인 권위가 무시되는 것이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분명 성도들에게는 이런 권위들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런 권위를 무시하고 경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웃어른을 인정하라는 이 교훈에 대해서 타락한 인간성은 강경히 반대한다. 인간성은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생각이 가득해서 아랫 자리에 서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윗 자리 가운데서도 그 본질상 가장 인자하고 남의 시기도 가장 받지 않는 종류를 예로 드신다(부모). 이렇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을 더 쉽게 부드럽게 만들어 복종하는 습성이 생기도록 인도하실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가장 용인하기 쉬운 복종으로 우리를 훈련하셔서 점점 모든 합법적 복종이 습성화하게 하신다.”

무엇보다 우리는 권위자들이 부족한 자들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은 인간들이며 심지어 죄성도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법으로 어거하고 그 안에서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 최고의 안전장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법 행위를 하거나 법 위에 서서 법을 초월한 권력을 남용하려 들 때, 그 불복종은 합법적인 것이나, 그것이 범법 행위가 아니고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들의 부족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향해 존경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섭리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지 못한 그릇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질서에 순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진 자들을 향한 어떤 의무가 주어집니까?

그들은 권위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태도로 순복해야 합니다. 여기서 순복은 합법적인 순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것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합법적인 권위와 권위 행사를 인정하고 그 인정함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로서 순복해야 합니다. 부모와 권위를 가진 자들은 허물과 연약함을 가졌습니다. 물론 여기서 허물과 연약함은 권위가 실추될 정도의 선을 전제한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거나 하나님의 법을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권위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을 강요하는 일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갖는 부족함을 인내로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목사직을 이런 의미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봉사자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한 그릇에게 은사를 베푸셔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는 것은 다른 모든 권위에 있어서도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법을 벗어나지 않은 권위의 연약함은 인내와 관용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의 합당한 의무라고 우르시누스와 칼빈은 가르칩니다.”

참되고 성숙한 성도는 권위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한편 그 권위가 마치 하나님의 법 위에 있는 것처럼 초법적으로 이해하지도 않습니다. 권위를 가진 자나 권위 아래 있는 자나 참된 신앙은 그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식합니다. 참된 권위자들은 그들의 권위가 공동체의 질서와 안전과 복지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알아 자신의 의무에 더욱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법이 정한 한계 내에서 그 권위가 공동체를 유지케 하고 자신들을 향한 봉사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아 그 권위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들은 권위를 존경하고 존중할 줄 압니다. 그리고 진정 바른 공동체는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 권위를 행사하는 자나 권위의 통치와 보호를 받는 자나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권위를 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권위가 남용되거나 유기되는 일이 없고, 바르게 시행되는 권위가 존경받고 사랑받는 교회와 사회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와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복된 사회와 교회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권위가 건전해지고 권위가 무시되지 않는 그런 교회와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권위를 주시고 그 권위를 통해 질서와 안전과 복리를 그 공동체에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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