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고전 15:3-10. 은혜로만...

은혜

by 김경호 진실 2017. 4. 24. 09:28

본문

고전 15:3-10. 은혜로만...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1. 역사를 보는 관점을 사관(史觀) 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 즉 완벽한 사관은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이야기, 예를 들면 세종대왕 같은 분의 이야기도 좋은 점, 나쁜 점등이 혹은 잘한 것은 무엇이고, 잘못한 것은 무엇인지가 분분하게 나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세종대왕이 좋은 왕이고, 저런 관점에서는 무능한 왕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조선실록 같은 객관적인 기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의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는 많은 관점들이 있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는 왕들의 이야기도 있다. 통치기간이 짧아 말할 것이 없는 왕도 있고, 전쟁에서 패함으로 나라를 잃은 왕들의 이야기는 별로 회자되지 않는다. 역사는 그래서 승자들의 기록이고, 세상은 1등만 기억하게 된다.

 

이런 역사의 관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관점에서는 왕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승리의 왕이었지만, 세상의 관점에서는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은 로마의 범죄자였다. 그는 자기 동족들에게 로마를 대항하는 선동을 일으킨 죄로 로마사람들에게 고소당했고, 그리고 죄가 없다는 당시 총독 빌라도의 1차적인 판결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고난을 당하신 분이다. 세상의 역사적 관점으로는 기록될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당연히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이 땅에 왕으로 오셨고, 그 왕위를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세우셨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이야기한다(요한복음7:39).

 

2. 믿음은 역사를 이해하는 원리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 우리는 많은 해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런 해석의 바탕에는 믿음이 깔려있게 마련이다. 믿음이라는 관점, 즉 하나님게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구속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왕이심에 틀림없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바탕이 믿음이딘다. 그것도 세상의 역사를 기록한 왕과는 다른 그의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립보서2:6-8)신 왕이시다. 그래서 몇 십 년의 통치 기록을 갖고 있는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우리에게 왕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신 3년 동안의 예수님께 대한 기록이 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믿음을 요구하게 된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삶의 방식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삶을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3. 바울은 예수님의 삶을 해석함으로 교회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린도전서15:9)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스테반 집사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죽을 때 죽여도 좋다는 쪽으로 표를 던진 사람이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던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장본인이 바로 바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스스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 바울에게 예수님은, 살아나신 예수님은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온 사건을 바울은 스스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고린도전서15:8)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가신 장면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그것도 대제사장에게 가서 /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사도행전9:1-2)는 바울에게 찾아가셨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자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사도행전9:5)는 응답을 받는다. 그리고 바울은 새롭게 예수님의 사건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믿음이 예수님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십자가형을 당한 로마의 죄인이고, 그것도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인 예수에 대한 해석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명기21:23)라는 말씀처럼 저주받은 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저주는 내가 받을 것이었고,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는 해석이 생긴 것이다.

 

4. 이런 해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변함없이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십자가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십자가의 사건이 비록 로마의 법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사건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그 사건의 전모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15:10)라고 말한다.

자기 같은 죄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로 감히 사도로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자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하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핍박했고, 박해했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자신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쓰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오늘, 또 하나의 역사적인 날을 보내면서 믿음의 관점으로 오늘 보았으면 한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295&msection=2&ssection=5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