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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저 멀리서 그저 욥을 바라보는 분이 아니다>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6. 1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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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저 멀리서 그저 욥을 바라보는 분이 아니다>

성경의 책들은 모두 다 전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부분들은 저자의 의도와 연결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욥기의 경우에 더욱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욥기는 그 이야기 자체가 메시지이다. 때문에 각각의 부분은 전체로부터 구별되어선 안 된다. 전체적인 의미 또한 딱딱한 원리나 좁은 신학적 명제로 인해 축소되어서도 안 된다.

1.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다

욥기를 볼 때 하나님은 등장 인물들의 주장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와 속성으로 자유롭게 상황을 전개시키며 역사의 행진을 주도하신다. 하나님은 욥기에 나와 있는 문제들의 한계를 초월하시며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신다.
고소하는 자의 두 번째 등장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스스로 선택, 결정하신다. 결코 고소하는 자의 앙심에 가득 찬 반론 때문에 욥을 고소하는 자에게 위임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고소하는 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 이 말씀은 고소하는 자의 한계를 명확하게 그어놓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의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되어진 것이다. 고소하는 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서만 자기의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소하는 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지배를 받는다. 오히려 욥기의 결론 부분에서는 고소하는 자라는 존재는 완전히 무시된다(욥 42:7-17). 여기에서도 주권을 가지신 분은 고소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이 증명된다. 본문에서도 고소하는 자는 하나님과 욥과의 관계를 깨뜨리기 위한 훼방꾼으로 등장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욥의 아내까지 앞장세울 수 있었다 할지라도 욥에게는 무의미한 도전이었다(욥 2:9-10).
“내 종 욥을 유의해 보았느냐”(욥 1:8; 2:3)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욥의 신실함에 대한 확실한 인증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고 확신에 찬 음성으로 증거함과 같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인 욥을 향해, 후자는 인간인 요한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각각 그 상대를 바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신뢰가 가득 담겨 있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확신은 없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5)고 참소했던 고소하는 자의 간계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불충스럽게도 고소하는 자는 그가 하나님께 한 말을 욥의 부인을 통해 욥에게도 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것은 참람한 욕설이다. 어찌 감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욥을 향하여 고소하는 자는 그처럼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고소하는 자의 한계이다. 욥으로 하여금 죄악된 행동을 유도하려는 최후의 발악은 허공에 사라지는 외침에 불과하고 말았다.
고소하는 자의 단발마적인 외침에 대해 의인 욥의 반응은 분명하고 확고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호칭하신 욥을 확신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소하는 자는 어리석음 그 자체였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욥 2:10).
이 말의 뜻은 이렇다. “그대는 그대답지 못하구나. 그대는 이제껏 그대가 멀리하던 어리석은 자들 축에 끼려고 하는 구나.” 욥의 이 부드러운 음성은 욥의 아내 뒤에 서 있는 고소하는 자에게 말한 간접 화법이었다. 그리고 고소하는 자는 더 이상 욥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욥기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 하나님은 스스로 ‘욥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셨다

욥기는 원죄 이후, 비록 하나님의 용인 아래 발생했지만, 고소하는 자가 직접 인간을 시험하는 첫 번째 사건을 두 번씩이나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고소하는 자는 욥 앞에서 두 번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것은 원복음(창 3:15)이후 더 이상 고소하는 자가 인간을 넘어뜨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속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네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 3:15)는 말씀처럼 에덴 동산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과 고소하는 자는 피차 호감을 가지기보다는 서로가 원수로 지내게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사람은 고소하는 자의 그 어떤 책략이나 유혹에도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음을 욥기는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욥이 고난의 학교에서 행복을 배운 하나의 본보기라고 지적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
이로써 욥기는 이미 결론을 내린 셈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자의적 주권 행사에 대하여 그 어떤 존재도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욥기 기자는 침묵의 웅변으로 대변하고 있다. 욥기 기자는 그 사실을 예시하듯이 욥의 세 친구를 등장시킨 후에도 모두를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에는 두 가지의 성질이 담겨 있다. 욥의 침묵은 아직도 분명치 않은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태도의 침묵이었다. 반면에 세 친구들의 침묵은 욥이 당하고 있는 심한 곤고함에 대한 ‘말없음 표’와 같은 침묵이었다. 더 이상 그들이 할 말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욥이 당하고 있는 현실을 대변할 수 없었고 욥의 형편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 위로의 말은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다.
그러나 욥기는 무언의 침묵 가운데 새로운 사건이 전개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 번 시련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련 가운데서도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다”(욥 1:22; 2:10)고 함으로써 욥의 입술이 곧 폭발할 때가 되었음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세 친구들의 침묵은 혹시도 있었을지 모르는 욥의 숨겨진 죄에 대한 의심으로 바뀐다. 그리고 욥의 침묵은 세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의’(義)를 주장하고자 하는 침묵으로 바뀌게 된다. 이미 욥의 고난 문제에 대해 끝내버린 욥기 기자의 침묵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닌 상대방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침묵은 침묵으로 끝났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욥기 기자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욥이 당하는 고난의 성질에 대하여 욥의 입술을 통해 끝맺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그러나 욥의 고난은, 비록 다른 차원의 것이기는 하지만, 바벨론에서 시련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겔 14:14, 20). 그리고 고난받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훌륭한 귀감으로 돋보였다(약 5:11). 이러한 욥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졌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창 22:12; 31:42, 53)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욥의 하나님”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욥 1:8; 3:3).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이 한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불리어지기를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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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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