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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6. 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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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욥기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 곧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의적인 결정에 따라 행사된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거룩하신 섭리가 담겨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욥기를 통해 무고한 것으로 판명된 욥의 고난을 통해 고소하는 자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했던 이간질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것으로 고소하는 자의 진술과 간계가 거짓으로 명백하게 판명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고소하는 자가 욥기에 서 있을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소하는 자는 영원한 패배자로 욥기에 남아 있을 뿐이다.
반면에 욥기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이 놀라운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있는 욥과 그 친구들 사이에서 땅에서 발생한 일들에게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삶의 정황에 익숙해진 광경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이 광경은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논란이다. 과연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우리들의 안목을 기준으로 다루어져 왔다는 점에 있어서 욥기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다.

1. 의인의 고난 앞에서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욥은 세 친구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피차 7일간 말없이 서로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후 갑자기 욥은 절망스런 목소리로 자기의 탄생을 저주하고(욥 3:1-10) 하나님께 대한 탄식을 드높이고 있다(욥 3:11-26). 욥의 절망에 필적할 만한 것은 예레미야의 애가밖에 없을 것이다(렘 20:14-18). 욥기는 셈족 특유의 과장법을 이용해 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는다.
여기에서 욥기는 욥의 외침을 약화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욥의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자의 비통함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욥의 탄식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나, 이스라엘의 제의(祭儀)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 얻어지는 위로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이 순간에 욥은 철저하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욥은 공동체나 구속사와는 완전히 격리된 철저한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욥이 자신의 존재를 저주한다는 것은 그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욥 3:2)라는 기록 속에 이미 욥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욥의 이 말의 원문은 “그리고 욥은 대답하여 말했다”로 되어 있다. 비록 욥의 친구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욥은 그들의 시선 속에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욥은 친구들의 마음속을 간파(看破)하고 있었다. 이것은 욥기가 이미 문맥 속에 감추어 둔 친구들의 무언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욥이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것은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 1:13)는 기록에서 이미 알 수 있다. 친구들은 욥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지은 죄를 깨닫게 할 수 있을지 그 방도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친구들의 오랜 침묵에 대하여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욥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친구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보다는 이 극한 상황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욥의 의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욥의 편에 서서 부당하게 임한 욥의 고난을 해명해 주실 것을 요구하며 이제 바야흐로 욥은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기로 한다.
지금까지 욥이 당한 고통은 (욥의 생각으로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 욥이 친구들로부터 의심을 받는 책임은 하나님이 지셔야 했다. 때문에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언가 자신의 결백을 증거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항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실 뿐 아무런 응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이에 욥은 스스로 답변하는 길을 찾기로 하였다(욥 3:2).

2. 의인의 탄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가?

욥의 애가는 비탄 그 자체였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욥의 갈망(욥 3:13)은 그가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로부터 멀어졌을 때 느끼게 된 삶에 대한 허무감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욥의 절규는 육체적인 아픔을 주는 고문보다 더 쓰라린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 고통은 ‘공포의 왕’(욥 18:14)인 죽음 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으로서 의식을 갖지 않는 것에 의해서나 누그러질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욥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무언의 항변을 통해 친구들의 의심에서 해방되고자 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11). 욥의 울부짖음에는 생명을 주신 전능자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만큼 고통의 강도가 크다는 것을 말한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그렇다고 해서 욥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너무도 철저하게 자신에게 감춰지고 거두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 것을 비통해 하고 있다.
욥의 이러한 항변은 세 친구들의 동의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욥은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마땅했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신다. 따라서 욥이 부와 건강과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전부 잃고 깊은 고난 중에 있었으므로 그의 친구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가 심각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었다(욥 2:13).
이 점은 친구들에게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죄와 상관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는 미래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정당성이 언젠가는 입증되리라는 희망에 매달려야 했다.

3. 의인의 고난은 종말론적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의 증인이 되실 뿐이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자신의 정당함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시 13:1-2; 43:1).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신실하지만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일을 바로 잡아 주시기를 소망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열린 법정 장소로 무대를 옮겨 신실한 탄원자의 억울함을 판결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시 135:14).
이러한 사상은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 즉 칭의(稱義)의 유일한 근거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욥기 후반부에 가면 직접 하나님께서 욥을 만나주심으로써 욥은 세 친구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욥 38:1이하). 이로써 욥에 대한 모든 혐의가 벗겨지게 된다. 그리고 욥의 정당성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입증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 교리의 배아(胚芽)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욥의 회복은 의미상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탕으로 이를 증거한다(시 13:5-6; 사 24-27장 등). 여기에서 신실하신 여호와는 언약 백성에게 어떤 장애 앞에서도 자기 백성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사 42:1-7).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에게서도 그와 같은 칭의 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면서 고통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셨다. 십자가는 그분의 삶과 가르침의 끝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대 관원들에 의해 정죄를 당한다. 그러나 부활은 그리스도 예수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입증하고 있다(롬 4:25).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정죄했지만 하나님은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칭의의 증표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성도들 역시 죽음과 부활 속에서 정당성을 입게 되는 근거이다(롬 4:25). 따라서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값없이 주어진다. 칭의는 우리에게 첨가된 것이 아니라 전가된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주어진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다(롬 5:1).
우리의 믿음 그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의인으로서 말없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뿐이며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일을 포기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은 종말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롬 5:1) 동시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롬 8:24-25). 이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때 성취되는 우리 몸의 구속에 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때를 믿음으로 기대한다. 최후 심판의 법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만민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판결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기독론적 사역에 근거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칭의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말미암는다.
누구든 자신이 욥보다 티끌만큼이라도 더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의인으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송영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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