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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알면 그리스도가 보인다>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6. 2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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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알면 그리스도가 보인다>

하나님의 지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욥은 이제 전능자 하나님을 향하여 최후 진술을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지혜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한다.
욥의 애가(욥 3장)와 평행을 이루는 본문의 긴 독백(욥 29-31장)에서 욥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최후 진술을 하고 있다. 욥은 마치 배심원 앞에서 최후 판결을 앞두고 마지막 변론을 하듯이 논리를 전개시켜 나간다. 욥은 고난 이전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회상하고(욥 29장) 현재 당하는 어둠의 고통을 호소한 후(욥 30장) 자신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최후 진술을 마친다(욥 31장). 여기에서 욥은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비애감에 젖어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욥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으로 분류되고 있다.

1. 욥은 하나님이 자랑하는 인물이었다(욥 29:1-6)

지난 날로 표현되는 이 때는 하나님께서 욥을 지켜주시던 날이었다(욥 29:2). 행복으로 충만했던 그 날들은 욥이 평안했던 날이라고 회상하던 때를 의미한다(욥 16:12). 이 때는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하나님의 등불 아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다. 하나님은 친히 흑암을 뚫고 욥을 인도하며 도우시며 함께 하셨던 것이다. 욥은 이 날에 다음과 같이 특별한 복을 누리고 있었다.


①하나님의 돌보심(욥 29:2-3) : 하나님은 낮이나 밤이나 그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시다(시 121편). 하나님께서 욥을 돌보신다는 표현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가 등불을 보고 안심하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모으는 암탉과 같이 그 백성을 보호하신다(시 91편). 이는 고난의 시기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여호와의 임재에 대한 언약적 약속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②하나님의 우정(욥 29:4) : 하나님의 우정은 자기 백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감추인 비밀을 그들에게 계시하시는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시 25: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7-18)고 하신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셨다(요 15:14).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요 20:17). 이것은 언약 안에 있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해 준다.


③하나님의 임재(욥 29:5-6) : 욥이 가족들과 함께 풍족함을 누린다는 것은 언약의 조건들이 성취된 상태를 표현한다(신 28:11). 바울 사도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 5:17)고 함으로써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영적 풍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앞서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이다(욥 29:5).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의 본질이다(창 39:2; 출 3:12; 수 1:5, 9; 사 43:2, 5). 이 약속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성취되었다(마 1:23).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왕으로 그의 백성을 친히 통치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마 28:20). 비록 욥의 친구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시42:3; 43:12) 하면서 욥을 조롱한다 할지라도 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만은 놓을 수 없었다.



2. 욥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욥 29:7-17)



엘리바스의 비난(욥 22:5-11)에도 불구하고 욥은 우스 땅의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욥은 우스의 장로였으며 통치 의회의 일원으로 정의의 재판관으로 그 지혜와 능력을 존경받았던 것이다(욥 29:7-10). 이렇게 욥이 존경을 받은 것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도왔기 때문이며(욥 29:12-13) 심지어 감추어져 있는 사건들까지 찾아내어 억울하고 억눌린 자들의 편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었다(욥 29:15-16). 이처럼 욥의 삶은 그가 옷을 삼아 입은 ‘의’와 ‘공의’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었다(욥 29:14). 우스 땅 모든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욥 29:11).


욥은 여기에서 엘리바스의 비난(욥 22:5-11)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오히려 욥은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으며 ‘욥의 하나님’으로 불려지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친구였던 것이다(욥 1:8; 3:3; 29:4).


의와 공의는 성경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의와 공의의 실천은 언약 사상의 근간이다(창 18:19). 의와 공의는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거나 증진시킬 수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이웃 사랑이라는 대 명제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원리이다. 때문에 의와 공의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백성에게 위탁하신 과제였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아버지”(욥 29:16)가 되심을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주님께 신실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고아, 과부들에게 있어 그들의 아버지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사 22:21). 한편 의와 공의는 억압자와 행악자들에게 대한 저항 의식도 포함되어 있다(시 3:7; 58:6; 101:8).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다(잠 19:17). 반대로 가난한 자들을 억누르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함과 같다(잠 14:31).


이런 점에서 “빈궁한 자의 아비”(욥 29:16)라는 이미지는 그들과 친근하고 애정 어린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수호하고 해방시켜주는 것을 상징한다(욥 29:17).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정결한 경건’이라고 칭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난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순종한다면 가난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한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시 15:4-5).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쇠퇴와 사회 구조의 변동으로 발생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가난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아봇의 포도밭 사건은 이방의 절대 군주제가 한 가문의 유업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선지자들은 사회 계층간의 불균형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불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사 5:8; 렘 34:13-17; 암 2:6-8; 5:11-12).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마 5:3-12; 눅 6:20-21).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되고 있는데(시 9:9-10; 사 3:15; 합 3:13-14) 신약의 성도들은 이런 점에서 스스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불리길 원하였다(롬 15:26; 갈 2:10).


예수님의 가난한 자에 대한 가르침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마 19:30-20:11 참고). 이 언약적 성격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한 말씀에서 성취된다(마 25:31-46). 이 말씀의 종말론적 성격은 최후의 심판 때 최고 통치자이자 최고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 의와 공의를 실천한 그의 백성들에게 영광의 상을 주시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다.


3. 욥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인물이었다(29:18-23)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가운데 우스 땅의 의로운 재판장이었던 욥으로서는 그 날이 오래 갈 것으로 기대했다. 이것은 언약에 따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율법 정신에 근거한다(신 28장). 잠언에서는 하나님의 길, 즉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33)고 가르친다. 때문에 욥의 소망은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안정된 가운데 장수하고 번영을 누리며 존경을 받고 영구한 힘을 발휘할 것을 소망했다(욥 29:18-20).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함께 하신다는 증표이며, 불의한 자들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욥은 건강과 마음의 평화와 존엄성을 모두 잃고 말았다. 이 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도전을 받기도 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육체의 고통과 잿더미 위에 앉아 있는 욥에게 있어서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시험이 분명했다. 고소하는 자는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욥 2:4-5). 그러나 욥은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왔었다.


이 과정에서 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확신하게 되었다(욥 21:9; 28:24-27). 때문에 그가 누렸던 하나님의 복(욥 29:2-6)이나 공의를 행사할 수 있는 지혜와 권위(욥 29:7-17), 심지어 건강과 힘(욥 29:18-20)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욥 19:21)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욥의 말도 이 때문이었다. 이것이 그의 대적자들과 다른 욥의 관점이었다.


때문에 욥은 자신이 행사했던 지혜(욥 29:21-23)와 도덕적 정직(욥 29:24)과 강력한 영도력(욥 29:25)을 담대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이것은 제사장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는 복의 선언이다. 욥은 제사장과 같은 자세로 그 백성들의 지도자로 존재했다. 욥은 백성들의 중재자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의 화목을 유지시켜주는 중보자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욥은 우스 땅에서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욥 29:25).


욥은 지금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서서 변호해 주고, 증인이 되어 주고, 보수자로 욥의 무고함을 선언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있다(욥 9:32-34; 16:19-21; 19:25-27). 그런데 욥은 그 백성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었다. 욥은 우스 땅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며 증인이며 보수자(히브리어 고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백성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자시며 증인이시며 보수자(히브리어 고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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