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박계원 선교사가 소책자 '대영 박물관과 성경'을 책의 저자 제이 스미쓰 동의를 받아 번역하여 코람데오닷컴에 소개합니다.- 편집장 주
‘대영 박물관과 대영 도서관에서의 성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가이드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기록들을 성경 외부의 증거들을 통해 확증하고자 합니다.
이 가이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가이드는 그저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고학적, 문헌학적 증거들을 살피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신화와 전설로 이루어졌다는 도전에 대항해 답을 주기 위해 이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러한 시도의 중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결코 스스로 역사 문헌일 뿐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 자료들, 예를 들면 민족들, 장소들, 사건들, 그리고 시간들을 다룹니다:.
* 민족들은 역사 가운데 발견됩니다.
* 장소들은 역사 가운데 존재합니다.
* 사건들은 역사 가운데 일어납니다.
* 이 세 요소들은 역사의 시대들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우리는 성경 외 증거들을 가지고 성경 내의 이러한 요소들을 살펴봄으로 이 범위 내에서 성경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해야 합니까? 역사 연구는 유물들, 문서들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어느 누구나 연구할 수 있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가이드에서 우리의 의도는 이런 자료들을 사용함으로 성경이 정확하게 역사를 서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들, 장소들, 사건들, 그리고 시대들). 성경이 이런 역사적 비평을 통과하고 믿을만한 사료로 인정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이 주장하는 다른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고 그런 내용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칭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책들, 예를 들면 몰몬경, 바가바드 기타 (Bhagavad-Gita), 우파니샤드 (Upanishads), 베다스 (Vedas), 그란트 사힙 (The Grant Sahib), 혹은 코란 등은 회의론자들로부터 신뢰받으려면 먼저 이런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목차
▶신 앗수르 왕국: 주전 934-608년
족장 시대: 주전 1900-1400년
바벨론 왕국: 주전 615-539년
바사 (페르시아) 왕국: 주전 550-330년
고고학자들의 성경에 관한 언급들
사해 사본들
초기 로마 왕국
대영 도서관
신 앗수르 왕국 (주전 934-6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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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에셀 3세의 컬크 기념비, 주전 853년 |
[1] 살만에셀 3세의 컬크 기념비, 주전 853년
앗수르 왕이었던 살만에셀 3세 (주전 859-824년)로부터 시작한다. 앗수르 기간을 통해 우리는 네 개의 도시에 집중하고자 한다.
* 님루드 (아슐나실팔 2세에 의해 지어짐)
* 발라왓 (살만에셀 3세에 의해 지어짐)
* 콜사받 (사르곤 2세에 의해 지어짐)
* 니느웨 (산헤립에 의해 지어짐)
살만에셀 3세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다스릴 시절 페니시아 (팔레스타인)을 공격했다. 아합과 다메섹의 벤하닷은 서로 전쟁 중이었는데 열왕기상 22장 1절에 의하면 이들은 삼년 동안 전쟁을 중단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휴전을 이해하기 위해 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컬크 기념비의 설형 문자에 의하면 우리는 주전 853년에 살만에셀 3세가 페니시아에 와서 하마스의 이훌리니 대왕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훌리니는 도움이 필요했고 아합과 벤하닷을 포함한 열 한 명의 지역 왕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아람-페니시아-이스라엘 연합군은 살만에셀 3세를 격퇴하였다. 이 사건은 열왕기상 22장에서 볼 수 있는 아합과 벤하닷 간의 삼년 간의 휴전의 비밀을 설명하는 동시에 이 기간의 연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주전 853년
이런 거대한 기념물들은 왕들, 즉 값비싼 기념물들을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기록되었음을 염두해 두자.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이지만 또한 정복자의 관점으로 기록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왕들은 흔히 이런 기념비들을 남겼다. 역사는 어떻게 보면 이런 승리자들만의 기록이다. 예를 들자면, 컬크 기념비는 강들이 시체로 뒤덥혔고 골짜기들이 피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하며 앗수르인들이 승리했다고 증거함으로 콸콰르 전투를 언급한다. 그러나 실제로 살만에셀의 진군은 가로막혔고 땅을 정복하지도 못했다. 고로 기념비는 살만에셀의 업적들을 부추기고자 쓰여진 “과장된 기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열왕기상 22장에 기록된 아합과 벤하닷 사이의 휴전의 성경 기록을 확증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필요로 한다. 두 번째 확증을 위해 우리는 검정 오벨리스크로 이동한다.
[2] 검정 오벨리스크, 주전 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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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오벨리스크, 주전 841년 |
검정 오벨리스크 또한 살만에셀 3세의 치정 때 만들어졌다.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열왕기상으로부터 아합이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군사 장관 예후를 방문한다. 예후는 아합의 가족을 진멸하고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것을 명령 받는다. 예후는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로부터 바알 경배를 제하였으며 28년간 다스렸다 (주전 814년까지). 역사가들이 질문하는 것은, “예후는 역사적 인물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이 오벨리스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열왕기하 9장과 10장에 의하면 예후는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살만에셀 3세를 찾아 간다. 이 상황은 주전 841년에 기록된 검정 오벨리스크에 묘사되어 있다 (사진의 두번째 칼럼, 역자주). 오벨리스크에 기록된 앗수르 설형 문자에 의하면 엎드려져 있는 사람이 “예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에 대한 역사적 기록 중 가장 최초의 것이며 열왕기하 9장과 10장에 언급된 사건들과 연관되며, 성경의 정확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세 번째 확증을 위해 발라왓 도시로 가보자.
[3] 동으로 만들어진 발라왓 대문들, 주전 9세기 중순
예전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살만에셀 3세 역시 물리적 유산을 남기기 원했다. 그는 여름 궁전으로 삼기 위해 발라왓 도시를 건축했다. 오늘날 이것은 단지 시리아 사막 가운데 위치한 동산일 뿐이다. 동산들, 또는 “텔스 (tels)”라고 불리우는 둔덕은 중동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동산들을 접한 한 고고학자는 둔덕이 있는 지층들 아래, 도시들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도시들이 진멸된 후, 주민들은 같은 위치 위에 마을을 형성하여 층층 구조를 만들게 된다. 고고학자들은 각 층들을 파봄으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도자기 파편이나, 유골들이나, 화재로부터의 훼손이나, 홍수 후 보수 등을 통해 도시의 역사를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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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 만들어진 발라왓 대문들 |
이 큰 문들은 대영 박물관에 의해 지어진 발라왓의 현대 모형이다. 유리 전시관 안에 있는 원래 문의 돌쩌귀는 동으로 만들어졌고 도시의 가장 낮은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전시되어 있는 문 위 두 번째 칼럼에서 우리는 손이 뒤로 묶여 있는 채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왼쪽 그림의 두번째줄, 역자주). 이들은 하마스나 아람의 죄수들로서 살만에셀 3세의 면전으로 나아간다. 돌쩌귀의 뒷부분엔 설형문자로 ‘이르훌리니’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록 많은 군인들은 전쟁 가운데 포로가 되었을지라도 이르훌리니 왕은 폐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발라왓의 문들은 열왕기상 22장과 열왕기하 9, 10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였음을 세번째로 입증한다.
[4] 디글랏 빌레셀 3세, 주전 745-727년
앗수르의 살만에셀 이후 다섯 왕은 이스라엘과 크게 연관을 갖지 않으므로 우리의 가이드에 중요하지 않다. 주전 8세기 중반 즈음, 앗수르는 팔레스타인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이스라엘을 두 번 공격했다.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이스라엘을 정복 했을 때 그는 그의 꼭두각시로 므나힘 왕을 세웠다. 디글랏 빌레셀왕은 성경에서 본인의 이름과 ‘불 (Pul)’이라는 별명으로 아홉 번 언급된다 (열왕기하 15: 19-20과 역대상 5: 26절을 보라). 역사가들은 세속사가들인 헤로디투스와 투시디데스가 그를 ‘불’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별명 ‘불’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역사가들은 디글랏 빌레셀 3세를 ‘불’이라고 언급하는 한 전차의 벽화를 발견하기 전까지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성경 저자가 그를 이렇게 언급한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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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글랏 빌레셀 3세 |
별명 ‘불’과 같은 소위 모순들이 이젠 성경을 확증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발견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발굴들은 성경이 처음 가정한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동시에 ‘불’이라는 별명을 알고 있다는 것은 열왕기하나 역대상을 기록한 사람들이 그 당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5] 사르곤 2세, 주전 721-705년
디글랏 빌레셀 3세 이후로 두 왕을 건너 우리는 오른쪽 벽화의 왼편에 묘사되어 있는 사르곤 2세를 방문한다. 그는 콜사바드라는 거대한 도시를 건축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사야 20: 1절에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사르곤 2세는 이스라엘의 북쪽 열 지파를 공격했고, 진멸하여 포로로 끌고 갔으며, 자신의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열왕기하 17: 6, 24). 그러나 그는 그들의 하나님께 유일하게 신실했던 남 유다 지파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비록 성경은 열왕기하서와 이사야서에서 사르곤 2세를 언급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주후 1843년이 되어서야 콜사바드 도시가 발굴되고 님루드 프리즘이 발견되고 나서야 그는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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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 2세, 주전 721-705년 |
님루드 프리즘은 사르곤 2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기록한다. “예전보다 더욱 사마리아를 번창케 하고 있다. 나는 내 손으로 정복한 나라들로부터 사람들을 이 도시로 데리고 왔다. 나는 나의 내시를 이들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나는 이들을 앗수르 사람으로 여겼다.”
[6] 산헤립, 주전 704-681년
위 벽화의 오른쪽에 묘사된 사람은 사르곤 2세의 아들 산헤립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하지 않은 일을 하여 남 유다 왕국을 진멸시켰다. 이 왕은 우리의 가이드에 중요한데 왜냐하면 의로운 유다 왕인 히스기야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비롯해서 성경에 이 왕에 대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느웨라는 거대한 도시를 만든 왕도 산헤립이다.
[7] 라기스 전쟁, 주전 701년
주전 701년, 산헤립은 유다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공격하기 위해 앗수르로부터 페니시아를 거쳐 왔다. 라기스 (예루살렘의 서남쪽)는 공격을 받은 요새들 중 마지막 두 번째 도시였다. 이 전시관은라기스의전쟁을묘사하고있다(열왕기하 1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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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쟁에 사용되던 물매와 돌들 |
고고학자들이 라기스 둔덕의 층층들을 조사하면서 전쟁의 물품들을 발견했다. 둥근 돌들, 물매들, 화살촉들, 유골, 그리고 쇠. 이들은 또한 테일러 프리즘을발견했는데, 여기엔 라기스와 예루살렘을 포함한 산헤립의 전쟁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테일러 프리즘, 즉 설형 문자로 기록된 육각형의 진토 원통은 성경의 기록 (열왕기하18, 19장)과 일곱 가지 측면에서 동일하다.
1. 히스기야는 산헤립을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2. 유다의 요새들이 진멸되었다.
3. 라기스 또한 멸망했다.
4.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 포위 되었다.
5. 그는 산헤립의 호의를 얻기 위해 삽십 달란트의 금을조공으로바쳤다.
6. 예루살렘은 멸망 당하지 않았다.
7.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에 단 하나의 화살도 쏘지 않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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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프리즘 |
그들은 왜 떠났는가? 테일러 프리즘을 포함한 역사 기록들은 여기에 대해 어떤 설명도 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이유를 알기 위해 성경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갑작스런 떠남의 이유는 무엇일까? 열왕기하 19: 9절과 이사야 37: 9절에 의하면 그는 구스 (현재 북아프리카)의 왕 디르하가 (또는 틸하카)왕이 남쪽으로부터 그의 왕국을 침공했기 때문에 되돌아가야 했다. 역사가들은 디르하가의 존재에 대해 의심했는데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 외에 그런 왕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디르하가는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대영 박물관은 우리가 조금 있다가 보게 될 디르하가에 대한 증거를 최근 발견했다. 현재로 우리는 오직 성경만이 산헤립의 돌아간 이유가 그의 니느웨 도시를 디르하가 (또는 틸하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8] “히스기야 벽화,” 주전 8세기 말
설형문자로 기록된 이 벽화는 히스기야 왕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 벽화는 니느웨 궁전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벽화에 의하면 산헤립은 200,000명의 군사들과,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히스기야를 진멸하기 위해 두 번째로 진군했다. 그러나 벽화가 이야기하듯 그는 화살도 한번 쏴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기에 왕이 패망했다거나, 도시가 진멸되었다거나, 전리품이 확보되었다거나 하는 기록이 없다. 역사가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위대한 왕이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앗수르로 돌아갔다. 바벨론 연대기에의하면, 산헤립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위대한 구스 왕 디르하가를 최근 멸하고 권세의 최고조에 있던 이 왕을 왜 두 아들이 죽였을까? 극적인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열왕기하 19: 35-36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고고학에서는 찾지 못하는 자세한 설명을 발견한다.
성경에 따르면 한밤중,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 산헤립의 군사 185,000명을 진멸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앗수르로 돌아가야 했고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벽화들은 (우리가 가이드 첫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왕들의 위세를 위한 기록이다.왕들은 그들의 패배한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이런 벽화에 그러한 굴욕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에 역사가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생략된 세부 사항을 제공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들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산헤립의 복귀에 대해 설명 할 수 없다고 치부할 것인지. 더 나아가 현대 고고학적 증거들은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고, 유다도 진멸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데 성경만이 유일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9] 디르하가 (또는 틸하카/탈할코)
우리는 이제 지배자 디르하가와 관련한 비밀을 해결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첫 번째 공격 중, 산헤립이 성경에서 언급되었듯이 디르하가 왕의 니느웨 침투 (열왕기하 19: 9, 이사야 37: 9)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 왕에 대한 아무 기록도 발견되지 않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아문 동상 위의 사형 문자가 해독되며 디르하가를 그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신화적으로 여겨지던 왕이 이제 역사에 실제 존재했던 왕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디르하가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신뢰할 만하다. 우리는 또한 디르하가가 현재의 수단, 이집트, 그리고 이디오피아를 포함하는 구스를 다스렸던 지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산헤립을 공격했을 때, 그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산헤립은 그래서 그를 대항해 방어하기 위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그 후 구스 제국은 그 세력이 약화된다.
사우쓰헴턴 고고학 박물관에는 자전거 받침대로 사용되던 한 왕의 동상이 있었다. 1999년 1월, 대영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책임자가 이 박물관을 방문했다. 이 책임자가 동상 위에 기록된 사형 문자를 살펴보며 디르하가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우쓰헴턴 박물관은 자신들이 어떤 물품을 소장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디르하가와 관련해 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이 성경의 다른 인물들, 장소들, 사건들, 그리고 시대들을 더욱 더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 니느웨의 벽화들, 주전 615년
나훔 선지자는니느웨가배교로인해불과물로멸망할것을예언했다 (나훔 1: 10, 2: 13, 3: 13-15). 히스기야 벽화를 비롯한 니느웨 도시의 벽화들은 화재로 인한 손상의 증거들을 보여준다. 바벨론 연대기에서 우리는 주전 612년의 사건들을 지지하는 문서적 증거들을 살펴볼 것이다. 바벨론인들은 먼저 궁전에 불을 지르고 (물리적 화재 손상), “코서 강으로 통하는 수로들”을 열므로 홍수가 나게 하여 니느웨를 멸망시켰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나훔의 예언의 성취에 대한 실제적, 문서적 증거를 볼 수 있다. (계속)
대영 박물관과 성경: 족장 시대 주전 1900-1400년 (0) | 2017.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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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구약의 복음서, 66장 그리고 39장, 27장. (0) | 2017.12.04 |
욥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0) | 2017.11.27 |
시편은 무엇을 말하는가? (0) | 2017.11.27 |
예레미야 4장 안일, 안락, 자기만족에 취할 때가 아니다 (김형익목사 (0) | 2017.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