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8-13]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함”
9절에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하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 없습니다.
1. 말씀은 매이지 아니함(8-9)
바울은 주후 65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서를 기록했습니다. 감옥에서는 복음 전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서 1장 12-13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착고에 매였지만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옥에 갇힘으로 더 효과적으로 복음이 증거되었고, 바울이 순교한 지 200년 후에 로마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죽었지만 생명의 말씀은 죽지 않고 계속 전파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특징지어 부르는 몇가지 별명이 있습니다. 첫째, 계시종교입니다. 보편적으로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는 행위로, 태양, 달, 바다 등 눈에 보이는 대상을 신으로 삼고, 때로는 사람을 신으로 섬깁니다. 이런 종교를 자율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행위를 배제합니다. 계시란, 가리워진 것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인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알리심으로 믿게 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자연만물과 말씀을 통해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환상이나 망상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이고 인격적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셔셔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둘째, 그 책의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나름대로 경전을 가지고 있지만, 타종교의 경전과 성경은 전혀 다릅니다. 이슬람교의 코란은 시대상에 따라 변합니다. 불교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이 있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지만, 이 경전을 전부 다 읽은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한 번도 읽지 않았어도 불교도가 될 수 있습니다. 유교의 사서삼경도 그 비중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성경 중심적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라는 뜻은 예수교, 그리스도교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야, 인자, 하나님의 아들, 주, 말씀이라고 부르는데, 이 모든 말의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문화와 인종과 언어와 민족이 달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말씀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요 1:14).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9).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접 계시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의 말씀이요, 영원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면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비가 많이 쏟아져도 그릇을 놓지 않으면 물을 받을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 그릇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이 역사할 때 은혜가 임합니다(행 1:8-1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자유하고 능력이 있습니다(중국의 기독교 성장).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 쇠퇴와 함께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도수가 줄면서 경제가 어렵고 이단이 득세했습니다. 신자들이 진리를 막아버리는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양심 쓰지 않고, 진리대로 살지 않고, 욕심으로 교회 다니고, 믿음이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스스로 말씀의 능력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2. 인내로 구원과 영광을 얻게 하라(10)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인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에는 지독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모두 택함을 입고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았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택하심과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8下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했는데, 우리가 구원받아 성도가 되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아무 공로와 의가 없이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거저 전해야 합니다.
장로교를 칼빈주의라고 말하고, 칼빈은 5대교리를 말했는데,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전적타락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남과 다르고 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까? 매일 신문과 방송에 정말 악한 사람이 많습니다. 살인, 강도, 폭행, 사기, 불의, 악독, 비방을 저지르는 그들과 자신은 다른 사람입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질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 8:7).
둘째,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남보다 낫거나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무조건적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제한적 속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고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데 내가 그 안에 포함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넷째, 불가항력적 은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를 많이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불순종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못된 길로 치달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참아주시고 권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능력으로 강권적으로 붙드셔서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게 인도해주셨습니다.
다섯째, 성도의 견인, 궁극적 구원입니다. 택함 받은 성도는 주 앞에 갈 때까지 하나님이 그 믿음을 지켜주십니다. 다 잊어버려도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성도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인내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되 그들이 영원한 영광을 얻도록 해줘야 합니다. 영원한 영광은 내세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야 합니다. 용서 받았으니 용서해야 하고, 사랑 받았으니 사랑해야 하고,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3. 참고 전하면 왕노릇 함(11-13)
11上에 “미쁘다”라고 했는데, 믿을만한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11下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했는데, 주가 맡긴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으면 주의 생명으로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12上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만큼, 환난이 오고, 환난을 참는 만큼 그리스도의 왕권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다 싫어하지만 고난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평안할 때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보다 고난당할 때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이 더 잘됩니다.
13절에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주께 대하면 신실성이 없지만 주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대로 구원하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인내로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과 영광을 얻게 함으로 신실하신 주의 말씀처럼 왕 노릇하는 성도가 돼야겠습니다.
대전 탄방교회 이창경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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